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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환 Jun 30. 2024

현대 사회의 몽타주 (1): 서사 위기의 시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과 문자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의 균형적 발달로 인간 정신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시각 정보 처리와 문자 정보 처리 사이 불균형이 발생했다.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SNS의 등장으로 시각 정보가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유튜브 쇼츠와 틱톡이 큰 인기를 끌면서 시각 정보가 문자 정보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시각 정보는 즉각적이고 수동적이다. 시각 정보를 처리한 이후에는 느낌이 남는다. 느낌은 표면적인 현상이다. 느낌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입체적인 깊이가 생겨난다.  표면적 느낌을 넘어서 의미와 가치가 탄생하는 것이다. 느낌(시각 정보 처리) 이후의 후속 작업(문자 정보 처리) 과정에서 한 사람의 개성이 탄생한다.

 유튜브나 틱톡의 쇼츠 시청 후 남는 것이라곤 느낌뿐이다. 느낌은 충분하지만 더 이상 느낌을 능동적으로 음미하고 고찰해야 생겨나는 의미는 없다. 쇼츠 시청 이후 곧바로 다른 쇼츠를 시청하기에 의미가 탄생할 시간이 없다. 짧은 시각 이미지를 강박적으로 섭취해야 하기에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어서 빨리 또 다른 시각 정보를 통해 도파민을 얻어야 한다. 더욱 즉자적이고 자극적인 시각 이미지를 찾는다. 그렇게 도파민에 절여진 이들에게는 개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언어가 없다.

 시각 정보와 문자 정보의 무너진 균형으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수동적인 시각 이미지 처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능동적인 깊이읽기를 요구하는 텍스트조차 단순하게 처리한다. 그러니 텍스트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자연스럽게 문해력이 떨어진다. 텍스트(문자 정보)는 깊이 읽어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깊이읽기는 텍스트 사이로 다이빙하여 유영하는 것과 같다. 텍스트 사이를 유영하면 텍스트 사이가 비틀어지면서 틈이 생긴다. 그 비틀어진 틈이 바로 해석의 공간이다. 그 빈 공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메꾸는 과정에서 텍스트의 뜻을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의미와 가치가 탄생한다.

 텍스트를 깊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저자, 화자, 또는 등장인물에 감정 이입된다. 텍스트 사이로 다이빙하는 것은 타자 속으로 다이빙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타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껴본다. 이후 타자로부터 빠져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나 자신을 바라본다. 이때의 ‘나’는 ‘기존의 나’와 다르다. 무언가 달라져 있다. 바로 낯설고 새로운, ‘타자로서의 나’이다. 그렇게 깊이읽기를 통해 ‘나와 동일시된 타자’와 ‘타자로서의 나’를 만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인식의 한계가 벗겨지고 단순 정보가 아닌 지식을 습득한다.

 문해력과 동시에 이해력과 공감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서로 다른 언어의 체계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언어가 다르면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와 대화가 잘 안 통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언어는 깊은 감수성을 통해 감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뜻은, 상대방이 내뱉는 낱말 그 자체를 이해한다기보다, 상대방의 언어 밑에 흐르는 강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어 저변의 흐름, 상대방의 낱말과 낱말을 연결하는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곧 상대방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중요시하는 가치와 상대방의 개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강물을 이해하여 서로의 강물이 유기롭게 흐를 때 비로소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다. 

 누군가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깊이읽기보다 더 어렵다. 상대방이 내뱉는 텍스트를 처리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비언어(미묘한 표정 변화 등)를 동시에 포착하여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언어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은 많은 연습과 경험으로 길러진다. 그러나 SNS 가상 세계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실제 세계에서의 상호작용이 줄어드니 비언어 포착 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더불어 시각 정보 급류에 휩쓸린 나머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NPC(Non Player Character)처럼 가벼운 정보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확산한다. 스스로의 언어와 이야기가 사라지니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을 수 없다. 
 
 텍스트를 깊이 읽는 것와 누군가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고 가꾸는 것 또한 어렵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때로는 괴롭기도 하다. 그러나 감동과 가치는 시간을 들여야만 꽃을 피운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종이학 천 마리를 접어서 선물하는 것을 떠올려 보아라. 요새는 접어진 종이학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종이학을 접어 선물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 감동과 가치는 비효율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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