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그냥' 만큼 무결하여 무거운 어절은 없다.
최소한 내 경험상 그렇다.
Just do it의 강력함은 'Just'에서 나온다.
그냥 해!
나이키는 자신들의 로고만큼이나 무결하고 더 없이 깔끔한 문장을 뽑아냈다.
그냥 해!
'응. 알겠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냥이었다.
네가 좋은 이유를 100만 가지를 대라면 댈 수 있었다. 애써 지어낼 필요도 없다. 너의 모든 것, 발톱의 떼까지 좋은 거니까.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그것이 너라서 그렇다. 네가 지닌, 네가 지니게 될, 네가 지녀왔던 모든 것들이 좋다. 백만 가지도 모자라다. 그러니 다짜고짜 좋은 거다. 그냥 그것이 너라서 그렇다. 그냥 너. 이것을 세간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은 그냥이라는 어절과는 반백년은 떨어진 어절로 여겨진다. 사랑이라는 어절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렇다. 그냥은 사랑스럽지 않다. 나에게 그냥은 엄혹하고 냉정하며 차갑기만 하다. 혹은 무겁고 버겁고 질식할 것 같다. 그와 냥 사이에 블랭크를 한 없이 넣어봐도 그렇다. 그냥은 어쩔 수 없이 그냥이 돼버린다. 어퍼스트로피 하나로 복잡한 수식을 해결해버리는 미분 같다. 참고로 난 공대생은 아니다.
그냥이면 안됐다.
이토록 무결한 수사를 이별통보에 붙이면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좋아서 좋았을 뿐이었던 내가 헛소리를 해대며 잠을 깨고 있다. 어디까지가 꿈인지 가늠이 안 되는 삶이 돼버렸다. 너무 무거워서 그렇다. '그냥'이 24시간을 짓누르고 있다. 숨이 찬다. 그러니 뭐라도 했어야 했다. 백만 가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핑계라도 내게 줬어야 했다. 넌 못생겼어. 넌 너무 가난해.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뻔하고 뻔한 이유들이 많이 있다. 아니면 솔직히라도 말해줬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솔직해야만 했다. 우리 사이에 가식은 지내온 사랑의 시간과는 너무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냥 나 남자 생겼어라고 솔직했으면 그만이었다. 그냥 헤어지자니. 그냥 좋은 것만큼이나 강력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나한테 왜 그랬어?
'그냥'
그렇구나.
난 네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냥'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니 어떤 측면에서는 편하기도 하다.
난 이 곳이 우리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흰고래 수염의 뱃속이라고 믿는다. 동화책 속 상상의 세계에서 안데르센 같은 작가가 꾸며낸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리라. 난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넌 이미 세상 밖으로 탈출했으리라 그렇게 믿게 되어 편하다.
그냥.
그냥 그렇게 믿으면 그만일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