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림 Aug 29. 2016

가을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래서인가,

맹장이-사실 맹장이 어디 붙어있는 건지 모르겠다-일을 하지 않는다. 혹은 일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먹어도 장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위에서 위로 올려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을바람이 불기도 전에,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을 직감해서인가. 싸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어김없이 장꼬임이 찾아오곤 했었다. 총학생회 선거, 1년을 대중들에게 평가받는 그 거대한 시험대를 코앞에 두면 어김없이 장이 꼬여왔었던 것이다. 이제 날 평가할 시험대는 남아있지 않건만 , 오랫동안 떠나 있었건만, 관성인 건가.


그녀는 왜 어김없이 가을에 떠난 걸까. 싸늘한 바람과 함께 스칼렛 오하라를 흉내 내며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지도. 내가 그렇게 부탁했건만 그녀는 사라지는데 실패를 했다. 이제 그러려니 한다. 널 사랑한 나에게 유죄를. 죗값은 치를 테다. 죄는 죄가 없다.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 이 정도 장꼬임은 아무것도, 아무 일도 아니다.


차가운 것은 입에 대지 않는다. 냉장고에 있던 소화에 좋다는 양배추 볶음을 렌지에 데운다. 데핀다가 편한데, 난 아직 고향조차 떠나지 못했구나 싶-다. 냉장고 속 베지밀을 바로 마시고 싶지만 차가움을 떠나는 일은 기다림을 훈련하는 일이다. 베지밀을 식탁에 올려놓고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그새 뜨거운 커피가 마시고 싶어 져 커피를 내리기로 한다. 동생이 신혼여행을 갔다가 사온 고양이 똥커피를 거름종이에 담고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켠다. 따뜻한 나라에서 물 건너온 커피의 향을 맡는다. 네 똥에서 살짝 신내음이 난다. 신맛 나는 커피가 고급인 거라며, 네 똥 굵다 생각하며 내려진 커피에 설탕을 탄다. 커피에 설탕을 넣기 시작한 것도 최근에야 일어난 일이다. 당이 필요하다. 커피에도, 일상에도. 쓴 건 참으로 지겨운 일이다.


김연수의 책을 집어 들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제목부터 쓸쓸한 이 책은 가을을 맞이하기에 참 좋은 책이다 싶-다. 당신이 영감을 받았다던 메리 올리버의 시는 이제는 내게 너무 사치스럽고 당신의 글은 이제는 내게 너무 무겁다. 아니, 그냥 당신들 모두 버겁다. 이제는 내게-

책은 언젠가부터 읽던 자리 그대로다. 총학생회 선전국장의 남자 친구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녀와의 식사는, 그녀와의 대화는, 그녀와의 잠자리는-




커피가 식었다. 차가운 베지밀은 그새 온기를 품었고 식은 커피는 설탕을 품었건만, 난 베지밀의 빨대를 뽑아 주둥이에 꽂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가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태어나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