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하필이면

by 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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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지글거리는 전 부치는 소리가 떠올라야 하지만 내 귀청엔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어깨야’하며 당신 스스로 연신 몸을 주무르던 할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할미는 좀체 내게 몸을 맡기지 않았다. 내가 처음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 당신의 어깨에 손을 댔을 때, 할미는 탁! 하고 세찬 손길로 내 손을 걷어냈었다. 그때, 할미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노려봤었다. 부들거리는 눈동자로. ‘할머니. 나예요 나예요’ 하며 안아드렸다.
그때 할미를 안았던 가냘팠던 감촉을, 나는 기억한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양파 간장에 찍어먹는 빈대떡 한 점이 떠올라야 하지만 나는 오늘 나를 위한 미역국을 끓이기로 했다. ‘불린 미역을 빠득빠득 주물러야 해. 그래야 미역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지’ 하던 할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할미는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지 않았다. 고기를 아예 드시지 않았다. 붉은색은 질색이라고 했다. 익힌 고기에서도 피비린내를 느끼셨다. 소고기를 넣지 않고도 깊은 맛의 미역국을 할미는 참 잘 끓이셨다. 내 다음 생일이 기다려질 정도로.
그때 할미가 해주신 깊고도 담백했던 미역국의 맛을, 나는 기억한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창밖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떠올라야 하지만 나는 쏟아지는 빗방울 아래 말없이 앉아있던 할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할미는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광장을 나가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말이지 어김없이 광장을 나가셨다. 그날은 할미의 친구 분이 돌아가신 직후의 수요일이었다. 여느 때 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할미를 위로했다. 이제 할미의 친구가 마흔네 분 남았다고 했다. 아니, 이제는 마흔세 분.
그때 휠체어에서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던 할미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끓어오르는 미역국의 냄비 위로 코를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향이 깊지 않았다. 불을 끄고는 간을 봤다. 맛이 없었다. 소금을 더 넣을까 하다 포기했다. 다시 끓일까 하다 또 포기했다. 할미가 해준 생일상을 받기만 했던 터라 내 몸이 기억하는 레시피가 없었다. 하필이면.
할미를 안았던 촉감과 삭신이 쑤신다던 할미의 목소리와 눈시울을 붉히던 할미의 눈동자와 할미가 끓여줬던 미역국의 맛과 향기는 모조리 기억나는데 할미의 미역국을 내가 끓일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미역국을 뒤로한 채 달력에 동그라미 쳐진 오늘의 날짜를 쳐다봤다.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우산을 챙기고 신발에 발을 욱여넣으며 시간을 확인하고는 현관문을 여는데 순간, 목이 허전하다 느껴졌다. ‘아! 스카프!’ 신발을 신은 채 할미의 방으로 들어가 할미의 스카프를 목에 대충 두르고는 집을 나섰다. 할미의 스카프에서 할미의 냄새가 났다. 할미가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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