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의식 세계가 창작에서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며 그 무의식은 꿈을 통해 나타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창의성이나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따금 꿈을 통해 의식으로 드러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우리는 꿈에서 깨는 순간 그 꿈속에서의 기억을 망각하게 된다.
그러한 원인으로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 근본적으로 무의식의 힘이 부족할 경우이며,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그 의식이 맑지 못할 경우라 한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은 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공론화된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의식을 이해하고 그를 조절함으로써 외부로 표현되는 의식과 행동을 더욱 창의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의식은 일반적으로 각성하지 않은 심적 상태, 즉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각 작용과 기억작용이 없는 이른바 무의적(無意的)인 의식장애의 현상 또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인 ‘프로이트(Freud, Sigmund, 1856년~)’이다.
그는 인간의 행동이 합리적인 사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사고에 의해 더 크게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심적 현상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무의식을 다시 ‘전의식(前意識)’과 ‘본래의 무의식’으로 나누었다.
이때 전의식이란 자극에 따라 의식이 될 수 있는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보통, ‘빙산의 일각’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외부로 노출되는 의식에는 - 창의성으로 인정되는 무엇이나 때론, 성공으로 발현되는 결과 - 그것의 몇 배에 달하는 크기의 거대한 무의식이 아래에 자리 잡고, 지배하고,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심해에서 지탱해주고 있는 무의식은 심적으로 억압된 관념 및 본능(특히 성적 본능)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후,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년~) ’을 통해 개인적 무의식(내향성)과 집단적 무의식(외향성)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또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이렇게 세 개의 인격이 있다고 한다.
‘원초아’는 폭력적 충동, 부도덕한 충동, 이기적 욕구 등 자기 보존의 본능에 해당하는 원초적 본능이다.
이는 쾌락 원칙으로 반사적인 일차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원초아만 존재한다.
그러나 생후 12개월쯤 자아가 생성되면서 합리적인 인지를 갖추게 된다.
그 후 생후 18개월이 지나면서 부모로부터 대변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 시기에 아이는 엄마로부터 “안돼!”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를 통해 본능적 욕구를 모두 해결할 수 없게 됨을 깨닫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를 통해, 굴복과 좌절감을 경험하게 되며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사회적 억압이나 규칙에 대한 교육에 순응하게 된다고 한다.
그 시기가‘초자아’를 얻게 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초자아는 도덕적 기준, 반복된 훈육의 내면화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시적 충동(ID)과 현실의 외계(SUPEREGO)와의 중개자로, 욕구를 참거나 어떠한 방향으로 지연시키려는 주체로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의 자아(EGO)가 있다.
즉, 인간의 의식에는 우선 원초적인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 욕구의 발산은 그의 훈육의 경험에 따라 타진하고, 그 협상 결과에 따라 실행시키며 의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원초아, 자아, 초자아 사이에 힘겨루기가 항상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이다. 이러한 전쟁터에서 건강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에서 보면 주인공 파이는 난파된 배에서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이때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벵골호랑이도 함께 타게 되는데, 얼룩말은 다리가 부러져 얼마 가지 못하고 하이에나에게 죽고, 오랑우탄 또한 하이에나에게 죽는다. 그리고 하이에나는 호랑이가 죽이게 되며 결국, 호랑이와 파이만이 난파된 배 안에 남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파된 배 안에서는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는 서로를 위협하거나 경쟁하고 때로는 공생하며 생존이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버텨가고 있다. 마지막에 들어서 호랑이의 존재 여부를 두고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연출하고 영화의 끝부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호랑이를 보여주고 있다.
호랑이는 주인공 파이의 종교와 같은 신념을 무너뜨리고 육식을 하게 된다든가, 심지어 살인 – 인육까지 먹으며 생존해 왔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인간 생존의 근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생존 본능인 원초아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갈등하고 대립하는 주인공은 도덕적 의식을 가진 초자아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호랑이의 모습 속에서 주인공이 지녀온 무의식 속 죄의식들을 떠나보내는 모습도 보인다.
무의식 속 자아의 대립과 공존 속에서 삶의 의미와 신에 대한 질문, 이러한 질문을 한 또 다른 예술가가 있다.
“당신의 슬픔은 어떤 색을 갖고 있나요? 당신의 기쁨은요? 당신의 설렘이나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과 두근거림은요?
이것은 색과 면을 사용한 추상화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러시아 출생 추상화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년~)’가 위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마크 로스코는 구체적인 말이나 형태를 통한 지시 없이 그저 커다랗고 모호하고 불분명한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을 캔버스 위에 표현하여 재현 적인 주제 없이,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종교적 경험을 경험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이들은 이 그림 앞에 마주하고는 울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한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라는 시대의 격변 속에서 잃어버린 개인의 자아를 찾고,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은 이 모호한 그림은 무의식을 자극하고, 일깨워 위로받게 해 준 신의 위로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