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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Jan 01. 2021

어렵게 배워야 더 오래 기억한다

성장을 꿈꾸는 심리학



타고난 기억력보다 생각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 갈수록 자신 없는 분야가 생깁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억력입니다. 젊을 때는 기억력이 끝내줬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드니 건망증도 심해지고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의 총명했던 기억력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억력은 인간의 능력 중에서 한 두해 만에 갑자기 변화하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인 인지능력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급격히 나빠진다고 느낀다면 젊었을 때 좋았는데 나빠졌을 가능성보다 젊었을 때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아닌데, 나는 분명히 기억력이 퇴화하고 있는데'라고 느낀다면 기억력에 관한 몇 가지 원리를 익히면 금세 좋아질 수 있습니다. 


간단한 암기 실험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래 열 개의 단어를 천천히 한 번씩만 읽고 최대한 많은 내용을 기억해서 써보세요. 빈 칸이 있는 단어는 원래 단어가 뭐였을지 생각해 보면서 빈 칸이 채워진 온전한 단어로 기억해 내시면 됩니다.





사실, 이 실험은 단순한 기억력만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대부분 빈칸이 있어 음절이 빠진 부분을 채우게 한 단어들을 온전한 단어보다 더 잘 기억했을 텐데요, 기억에 있어 생성효과(generation effect)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생성효과란 빈 부분을 채우는 노력이 기억을 강화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완결되지 않은 무언가를 채우려는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기억력은 순식간에 높아집니다. 


첫사랑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면 이 역시도 상당 부분은 생성효과 덕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첫사랑은 완결되지 않은 기억이고 무언가 채우려는 시도를 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지능이 높을수록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능이 다는 아닙니다. 빈칸을 채우게 하는 단순한 조작으로 기억은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실험에서 여러분이 잘 기억하지 못했던 빈칸이 없는 단어들을 더 잘 기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다녀온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스토리를 만들면 됩니다. 


“광화문에 가서 세종대왕 동상을 보고 교보문고에서 회계원리와 조직문화, 비즈니스 관련 서적을 찾아보았다.”


이렇게 단어를 자신과 관련지으면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자기참조효과(self-reference effect)라고 합니다.


단순히 기억력에 의존하는 기억보다 이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일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을 높이는 몇 가지 생각 습관만 익혀도 기억력을 쉽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은 퇴화한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가 천재라고 착각하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특히 아이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할 때 깜짝 놀랍니다. 아이가 작년 생일을 어제 일처럼 구체적으로 기억하거나 작년에 같은 반 아이들의 이름을 출석번호 순으로 줄줄이 말하는 경우처럼 말이죠.


정작 이런 천재 같은 아이를 낳은 부모인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도 애초에 무엇을 꺼내려고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데 우리 아이의 기억력은 정말 비상합니다.


그런데 사실, 만일 당신이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퇴화한다고 느낀다면 과학적으로는 기억력 자체의 퇴화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큽니다.


첫째, 간섭효과 때문입니다. 


기억 저장을 여러 색깔과 모양의 젤리가 든 봉지에 비유한다면 아이의 젤리 봉지 속의 젤리는 어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작년 생일에 있었던 사건을 젤리 봉지에서 꺼낼 때 방해하는 젤리들이 거의 없으므로 쉽게 꺼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주머니 속의 물체들이 많아집니다. 작년 생일을 꺼내야 하는데 재작년 생일, 부모님 생일, 동료 생일 등등이 방해합니다. 그래서 쉽게 꺼낼 수가 없습니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머리에 든 게 없을 때는 쉽게 꺼낼 수 있지만 내용이 많을수록 한 번에 딱 맞춰 꺼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단순히 저장했다가 꺼내는 단기기억 체계보다는 기억의 다른 체계들을 훨씬 더 자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최적 경로를 생각하거나, 작업장에서 기계를 작동하며 일을 하거나, 과거 경험을 통해서 얻은 교훈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기억 체계를 활용하지만 단기기억 체계를 작동시키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기억 체계는 단기기억이나 장기기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암묵 기억, 의미 기억, 절차 기억 등 기억의 다른 체계들이 있어서 필요에 따라 기억의 다른 체계를 활용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기억의 어떤 체계는 덜 작동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 어떤 체계는 더 활발하게 작동시키기도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마흔을 넘어서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에는 둔감해지고 내부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정보를 더 중요시하게 됩니다.


조직에서 내부 DB가 쌓일수록 외부 DB를 활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의 경험치로부터 나온 정보에 집중하기 때문에 외부 정보에 민감한 단기 기억 체계는 덜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흐릿해진다고 느끼신다면 기억력 자체의 퇴화라기보다는 나이가 들어 기억 체계의 가중치를 달리 쓰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인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억의 가장 고전적인 연구는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억 연구의 선구자인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는 우리가 듣거나 읽은 것의 70%는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나머지 30%는 서서히 잊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단기기억의 빠른 망각을 늦추기 위한 최상의 방법 또한 찾아냈는데 바로 인출입니다. 기억을 단순한 저장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언컨대, 기억에서 저장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출, 즉 저장된 것을 꺼내는 것입니다.


인출은 시험을 보는 것,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 자신이 이해한대로 기록하는 것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아주 새로운 정보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인출하지 않고 적당히 새로운 정보는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와 비슷하기 때문에 인출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다시 말해 나이가 들수록 인출의 빈도가 줄어듭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도 총기를 잃지 않은 분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인출 빈도 즉, 한마디로 말이 많습니다. 은퇴한 후에 급격한 기억력 퇴화를 경험한다면 직장에 있을 때에 비해 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1930년생인 워렌 버핏(Warren Edward Buffett)의 매일 밤 잠들기 전 습관은 독서입니다. 그런데 버핏의 독서 습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독서를 마무리합니다. 인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학습을 위해서 망각이 필요하다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을 쓰다가 아이폰으로 바꿀 때는 기존 체계에 대한 망각이 있어야 더 빨리 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단순한 조작법이 아니라 복잡한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정보를 잊어야 합니다.



조직을 옮기거나 새로운 위치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 조직의 지식과 경험에만 기대서는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일에 몰입하면서 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동안에도 이전 지식의 대부분이 장기 기억에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용의 빈도는 현격히 떨어지지만 쉽게 잊혀지지는 않습니다. 사는 동안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면 20년 전에 살던 곳의 주소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사지선다형 시험에서 그 주소가 나온다면 쉽게 고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학습을 위해 망각이 필요하지만 망각은 우리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망각이지만 새로운 학습을 보다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심리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존 지식을 망각하고 새로운 학습에 집중하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 비결은 바로 지식과 기술을 어렵게 익히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야구공을 치는 것은 스포츠에서도 가장 어려운 기술입니다. 공이 홈 플레이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단 0.5초, 타자는 투구의 유형과 공의 움직임, 공이 배트에 도달하는 시간 등을 짧은 시간 내에 정확히 측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습한 타자가 더 실력이 향상되었을까요?


1. 같은 유형의 공을 15번씩 순서대로: 빠른 공 15번, 커브 15번, 체인지업 15번


2. 마흔 다섯번 공이 오는데 빠른 공, 커브, 체인지업이 무작위로


실제 2번에 해당되는 타자들은 1번에 속한 타자들보다 학습이 더 힘들고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6주가 지난 후에 2번 그룹에 속한 타자들이 현저히 나은 타격을 선보였습니다.


1번은 단기 기억에 의존해야 경기력이 높아지는 구조지만 2번은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대응해야 더 잘 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어렵게 익힌 2번과 같은 방식이 실전에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글링으로 유튜브로 쉽게 검색하고 쉽게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환경입니다. 이렇게 찾은 지식과 정보를 남들에게 전달하고 보여주는 것은 쉽지만 스스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검색으로 쉽게 찾은 정보는 실제로는 모르지만 아는 것처럼 느끼는 가짜 유능감을 높일 뿐입니다.




우리 뇌는 평생에 걸쳐 변화한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에 민감한 두뇌 체계를 작동시키지도 않고 이전 지식과 경험을 망각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익히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뇌의 잠재력을 깨우기 위해서는 외부 정보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시도, 그리고 어렵게 익히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뇌는 아주 단순한 원리에 따르는데 쓰지 않으면 없어지고 쓰면 평생에 걸쳐 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새끼 고양이를 수직선만 있는 원통형 방에 넣어 키우면 고양이 특유의 날렵함은 사라집니다. 수평선을 인식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가로막대를 뛰어넘지도 못하고 밑으로 기어 숨지도 못합니다. 수평선을 보는 신경세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위축된 것입니다.


우리 뇌는 쓰지 않은 세포는 죽이고 쓰는 세포는 활성화시키며 연습을 많이 할수록 신경회로 경로의 강도와 속도를 높입니다.


깜빡 잊는 일이 자주 생긴다면 외부 정보에 대해 호기심을 높이면 될 일입니다. 안부를 묻고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답변에 집중하면 단기기억 체계가 가동됩니다.


새로운 정보를 익히고 인출의 빈도를 높이면 됩니다. 일 처리할 때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설명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오히려 이 고비만 넘기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렵게 익히는 것이 쉽게 익히는 것보다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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