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예의일까, 회피일까?
회의 자리에서 팀장이 무심코 말했다.
“요즘 신입들은 다들 멘탈이 약한 것 같아. 특히 여자애들이 더 그렇지.”
그 말이 나온 뒤, 침묵이 흐른다.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팀원들의 생각은 같다.
'지금 저 말,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걸까?'
대부분의 직장인은 이러한 장면에 익숙하다. 침묵은 예의이고, 언급하면 갈등야기라는 사회적 문법 속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피하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최근 미국 듀크대 연구팀의 실험은 이 통념을 뒤흔든다(Berkebile-Weinberg, A. L., Brown, R. M., McMahon, C. E., & Craig, M. A. (2025). The Anticipated Relational Effects of Confronting Bias (or not) in Interracial Friendships. Psychological Science, 09567976251372125.).
상대의 편향을 지적하면 관계가 나빠질까?
최근 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연구는 인종 간 친구 관계에서 한쪽이 편향적 발언을 했을 때, 그걸 지적(confront)하는 것이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실험했다. 참가자들은 백인 친구가 아시아인에 대해 편향적 말을 했다는 상황을 가정한 뒤, 그냥 넘어가는 경우와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경우를 각각 상상하고 그 뒤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예측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대부분은 지적할 때 오히려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침묵이 관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면, 친구가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이해받을 기대(anticipated understanding)’가 있을 때, 사람들은 항의가 관계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신뢰의 표현이라고 인식했다. 사람들은 오히려 침묵이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항의나 침묵 모두 관계 향상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까?
미국은 개인주의, 저맥락 문화(low-context) 사회다. 저맥락문화에선 감정이나 의견을 직접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솔직함이나 진정성(authenticity)으로 여겨진다. 항의는 공격이 아니라 관계의 투명성을 보여주는 행위다.
반면, 한국은 집단주의·고맥락(high-context) 문화다. 우리나라에서 직설적 표현은 솔직함이나 진정성보다는 관계적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지적하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배운다. 즉, 문화적 문법이 다르다.
미국에서는 말하지 않으면 가짜 관계이고, 한국에서는 말하면 깨질 수도 있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침묵이 아니라, 배려의 문법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항의도 침묵도 아닌 gentle confrontation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표현은 공격적 항의가 아니다.
“아까 그 표현이 어떤 사람에겐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제 생각을 덧붙여도 될까요?”
gentle confrontation은 공격(challenge)이 아니라 보완(add)의 언어다. 상대의 체면을 지키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방식이다.
저맥락 언어 습관의 서구에서 말할 용기(courage to confront)가 강조된다면, 한국에서는 배려 있게 말하는 기술(the art of gentle confrontation)이 더 중요하다.
이 연구가 전하는 진실은 관계가 불편함을 통과할 때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문화가 달라도 진심은 통한다. gentle confrontation은 “당신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에, 그냥 넘길 수 없다”는 메시지다. 서구에서는 그 진심이 직설의 언어로, 한국에서는 배려의 언어로 표현될 뿐이다.
리더십 교육에서 자주 나오는 오해가 있다. '편향을 지적하면 팀 분위기가 나빠진다.' 하지만 진짜 팀은 불편함을 피하는 팀이 아니라, 불편함을 안전하게 다루는 팀이다.
리더가 “다른 시각이 있으면 편하게 말해 달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진정성은 정말로 말해도 괜찮았던 경험으로 증명된다. 그 경험이 쌓일 때, 침묵은 점점 줄고 심리적 안전감이 자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 뒤에 있는 관계의 의도아고 실제 보이는 배려적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