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초기 기획 회의였다. 윤팀장은 신규 서비스 방향에 대한 의견을 팀원들에게 물었다. 그때, 입사 5년차인 정프로가 강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방향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제가 맡아서 새 버전으로 완전히 재구축하겠습니다.”
윤팀장이 부드럽게 응대했다.
“좋은 의견인데, 팀 전체 의견도 듣고 일정과 리스크도 검토해야죠.”
그러자 정프로는 말했다.
“왜 매번 제 의견은 이렇게 제동을 거나요? 제가 뭘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누구도 말을 잇지 않았다. 회의는 형식적으로 끝났고, 이후 정프로는 프로젝트 슬랙 채널에서도 존재감을 감춰버렸다. 보고서 마감일 전날, 자신의 몫인 결과물과 함께 글을 올렸다.
“전 더 이상 의견 내지 않겠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감정 폭발도, 대립도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 가장 위험한 신호일 수 있다.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날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장면에서 정프로를 예민한 직원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최근 Büttner et al. (2025) 연구는 이 현상이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77,289명, 14년 종단 연구, ESM(일상 경험 샘플링), 6개의 실험을 통해 다음을 밝혀냈다.
- 나르시시즘이 높은 사람은 배척 신호에 과민하다.
- 이들은 작은 반대, 지연, 침묵도 고의적 무시로 해석한다.
- 반사회적 의도는 상승하지만 행동은 억제된다.
- 겉으로 평온하지만, 조직에서 이들이 일으킬 리스크는 크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래 그래프다.
출처: Büttner, C. M., Rudert, S. C., Albath, E. A., Sibley, C. G., & Greifeneder, R. (2025). Narcissists’ experience of ostracism.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X축(나르시시즘 수치)이 증가할수록 1~6의 모든 상황 시나리오에서 ostracism perception(배척 인식)이 상승한다. 특히, 모호한 상황일수록 상승 기울기가 가파르다. 다시 말해, 나르시시스트에겐 명확한 공격보다, 모호한 중립이 훨씬 더 위협으로 느껴진다는 뜻이다.
즉, 윤팀장이 재검토를 말했을 때, 정프로는 이것을 자기 능력을 부정하는 신호이자 존재감을 깎는 공격으로 해석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조직에서 단순한 의견 제시를 공격으로 인식하고, 의견 조정을 도전으로 해석하며, 중립적 표현을 무시로 받아들인다.
나르시시트를 대하는 과정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괜히 감정 자극하지 말자', '칭찬하면 풀리겠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부드러움을 양보로, 침묵을 복종으로, 배려를 포기 선언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들을 대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힘과 구조의 언어다. 즉, 적극적인 전략적 체계가 필요하다.
1) 철저히 절차로 대응하라 (모호성 제거)
- "지금은 의견 제시 단계입니다. 다음 단계에서 구체적 설계를 검토하겠습니다."라고 표현하라.
- 감정 게임을 절차 게임으로 바꿔야 한다.
2) 경계를 분명한 선으로 그어라
- "의견은 환영하지만, 태도 비난은 허용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라.
- 타인을 공격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행동 규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
3) 공개된 구조로 이동시켜라
- “모든 논의는 슬랙 오픈 채널에서 진행합시다.”
- 뒷담화, 조작을 관찰 가능한 행동으로 바꿔야 한다.
4) 책임과 권한을 함께 묶어라
- "시도해보고 싶다면, 일정과 산출물에 대한 책임도 함께 합시다."
- 나르시시스트가 뽐내고 싶은 우월감을 책임 부담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윤팀장의 침묵과 배려는 정프로의 나르시시즘을 부정적 방향으로 강화시킨 셈이다. 나르시시즘을 다루는 가장 강력한 전략은 공감이 아니라 체계이고, 대립이 아니라 명확한 경계 설정이다. 부드러움은 미덕이지만, 다크가 센 사람들로부터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어제, MBC 스트레이트, <'선택적 검란'과 '대장동'>을 시청했다. 방송을 시청하면서 이 논문이 오버랩됐다. 스트레이트 방송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
지난 10월 31일 나온 ′대장동 사건′ 1심 선고. 피고인 5명 가운데 두 명은 검찰 구형보다 더 무거운 형을, 나머지 세 명은 더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새벽,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이 사건 수사팀장이었던 강백신 검사가 쓴 글이 올라왔습니다. 강 검사는 ″수사팀은 만장일치로 항소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검찰청이 재검토를 지시했다″며 ″법무부가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만석 당시 검찰총장 대행은 ″항소 포기는 중앙지검장과 협의해 내린 결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중앙지검장은 ″중앙지검의 의견은 달랐다″며 항의성 사표를 던졌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강제성이 있는 수사권 지휘가 아니었고, 신중히 판단하라는 의견만 전달했다고 해명했습니다.
노만석 검찰총장 대행은 항소 포기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검란′을 두고, 우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검찰에 의견을 전달한 것 자체가 사실상 항소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게 뻔한, 즉 부적절한 조치였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하지만, 법무부의 의견은 ′수사지휘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의견 표명에 그쳤기 때문에, 항소가 꼭 필요하다면 검찰이 항소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MBC 스트레이트, 2025년 12월 7일 방송)
검찰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을 바라보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검찰은 법률, 지식, 권력이 집약된 조직이며, 스스로를 국가 최정상급 지성집단이라고 인식하는 경향, 즉 나르시시즘이 강하다. 따라서 그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단순한 의견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과 존재 가치가 걸린 문제로 해석되기 쉽다. 이 때문에 의견 충돌이 곧 존재 위협, 재검토 요구가 모욕, 관련 단체들의 침묵은 배척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앞서 예시로 든, 정프로의 사례와 유사하다. 모호한 상황에서 나르시시즘이 높은 개인이 배척 신호를 과대 해석하고 내면의 적대감이 행동 억제를 뚫고 표면으로 등장한 것처럼, 조직의 리더가 단호한 기준과 절차를 제시하지 못하면, 나르시시즘 기반의 갈등은 확대될 뿐이다.
앞서 다룬 정프로 사례도, 검란도,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나르시시즘과 모호성의 파괴적 조합이다. 침묵을 선택한 윤팀장이 결국 더 큰 문제를 만든 것처럼, 검찰 조직도 '알아서 정리되겠지'라는 방관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공감적 설득이 아니라, 시스템적 전략이 필요하다. 오히려 명확한 기준과 절차, 공개된 결정, 책임 구조가 도입될 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열망을 정당한 방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 결과, 조직은 파괴적 충돌을 예방하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생산성으로 전환할 수 있다.
조직과 리더는 모호한 해석의 영역을 가급적 제거하고, 모든 과정이 공개된 규칙에 따라 진행되도록 만들고, 주장에는 책임을 연결하고, 공격을 원칙 위반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실제, 검찰 내부에서도 이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