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전세 사기 피해자를 외면하는 이유

by 박진우

사람들은 왜 무고한 피해자를 외면할까?


세상은 대체로 공정하다. 열심히 살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런데 현실은 가끔 이 믿음을 깨뜨린다. 착하게만 살던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성실하게 공부한 학생이 탈락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무고한 피해자(innocent victims)를 만나면 연민을 느껴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말로는 안타깝다고 하겠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행동으로는 거리감을 둔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just-world belief)


심리학에는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just-world belief)'이라는 개념이 있다. 세상은 결국 공정하게 돌아간다는 믿음이다.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고통스러운 오늘을 버틸 수 있다. 그 믿음이 흔들리면 삶의 동력 자체가 흔들린다.


문제는 무고한 피해자의 존재가 이 믿음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저 사람은 왜 저런 일을 당한 걸까?' 이 질문에 가장 빠른 답은 피해자를 탓하는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평소 행실이 어땠는지 누가 알아' 이런 생각들은 공정한 세상을 지키려는 방어기제다.


무고한 피해자로부터 거리를 두는 심리


그리고 최근의 심리학 연구는 우리가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도 이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Dawtry, R. J., Callan, M. J., Waldren, L. H., & Sherman, C. (2026). Social distancing from innocent victims by spatial distality.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30(3), 431–451.). 영국 에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Essex) 심리학과 Dawtry 교수 등은 참가자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의 이름을 보여주고, 2D 화면 위에서 '나'를 나타내는 점을 자유롭게 배치하게 했다. 피해자가 부당한 일을 당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점을 피해자로부터 더 멀리 옮겨놓았다. 피해자를 직접 비난하거나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거리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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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wtry, R. J., Callan, M. J., Waldren, L. H., & Sherman, C. (2026). Social distancing from innocent victims by spatial distality.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30(3), 431–451.


참가자들은 가상의 인물(예: "Alex")이 어떤 결과를 받았는지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무작위로 두 조건 중 하나로 배정된다.

- 공정한(Just) 조건: Alex가 노력이나 능력에 걸맞은 공정한 결과를 받음

- 불공정한(Unjust) 조건: Alex가 아무 잘못 없이 부당한 결과를 받음

이후 참가자들은 2D 화면을 제시받는데, 화면 한쪽에는 피해자의 이름이 고정되어 있고, 참가자는 자신을 나타내는 점("나")을 화면 위 어디든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


Study 1a — 가치 유사성(Value Similarity)

배치 과제 전에 참가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평가하는 설문에 응답한다. 이후 피해자도 동일한 가치관 문항에 동일하게 응답한 것처럼 제시된다. 참가자는 자신과 피해자의 가치관 유사성을 인식한 상태에서 공간 배치 과제를 수행한다.

Study 1b — 성격 유사성(Personality Similarity)

Study 1a와 동일한 구조이나, 유사성의 기반이 가치관에서 성격 특성으로 바뀐다. 참가자들은 Big Five 성격 척도에 응답하고, 피해자도 동일한 성격 프로파일을 가진 것으로 제시된다. '이 사람은 나와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맥락에서 배치 과제를 수행한다.


두 연구 모두 부당한(Unjust) 조건에서 일관되게 거리두기 점수가 높아졌다. 피해자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그 피해자로부터 심리적으로 멀리 떼어놓았다.


무고한 피해자가 우리와 더 비슷할수록 더 멀어진다.

더 주목할 점은, 피해자가 자신과 비슷할수록 이 거리두기가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와 성격이 닮고,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일수록 더 멀리 밀어냈다. 그 사람의 불행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을 차단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마음속에서 선을 긋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후속 연구다. 연구자들이 밝힌 불편한 진실은 피해자의 특성이 참가자들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될수록, 참가자들은 그 피해자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더 강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취업에 거듭 실패한 친구에게 슬슬 연락이 뜸해지는 것. 큰 병을 진단받은 지인의 모임 초대가 어느 순간 끊기는 것.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된 동료를 다들 조용히 외면하는 것. 우리는 그들을 나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라고, 그냥 바빴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연구는 그 말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이 공정하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해자의 불행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만들어낸다. 피해자가 가장 힘들 때, 가장 외로워지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오류(just-world fallacy)


사실 심리학의 정확한 개념은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세상이 공정하다는 착각(just world fallacy)이다. 세상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세사기 피해자 문제다.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처럼 비교적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제도를 신뢰하고 성실하게 계약 했음에도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었다.


처음 이 사건이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고, 피해자들을 향해 깊은 연민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왜 그런 집을 계약했을까’, ‘조금 더 알아봤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안타까움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피해자의 선택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개인의 판단이나 선택으로 돌린다. 그래야만 ‘나는 다르게 행동하면 저런 일을 피할 수 있다’는 감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은 이 불편함을 더 키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불행은 더 쉽게 공감되면서도, 동시에 더 강하게 밀어내는 대상이 된다.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억울한 피해자일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립된다.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거리를 둔다.


무고한 피해자로부터 심리적 거리두기를 넘어서려면?


그렇다면 이 본능적인 거리두기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심리학 연구들은 몇 가지 솔루션을 제시한다.


첫째, 거리두기 충동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한 발 떨어져서 관찰하는 능력이다. 편향된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반응의 강도는 실제로 약해진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밀어내고 있구나'라고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자동 반응 대신 의식적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둘째, 공정한 세상에 대한 신념 자체를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믿음이 반드시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지나치게 경직될 때다. 공정한 세상의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피해자를 더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세상은 대체로 공정하지만, 예외가 존재한다'는 유연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피해자를 향한 공감 능력이 더 높게 나타났다.


셋째, 거리두기의 진짜 원인은 피해자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다. 심리학에서는 이 공포의 뿌리를 통제감 상실(loss of control)에서 찾는다.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피해자를 향한 방어적 거리두기가 줄어든다. 통제감을 회복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자신이 실제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영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불확실한 미래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작은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통제감은 회복된다. 불안을 없애는 게 목표가 아니다. 불안에 잠식되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다.


거리를 좁히는 것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연락을 끊지 않는 것, 어색해도 옆에 있어 주는 것,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가 아니라 '많이 힘들겠다'는 말 한마디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거리를 먼저 알아채는 일이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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