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떠나고 난 자리
화장실 청소는 승무원이 비행 중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세면대는 물기 없이 깨끗하게 닦아 놓아야 하고, 두루마리 화장지는 호텔 화장실 마냥 삼각 접기를 해야 하고, 거울에 물 자국이 있으면 닦는 것은 기본이고 바닥 여기저기에 튄 오물들까지 정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항균 스프레이를 확- 뿌려주면 화장실 청소가 마무리된다(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변기 위에 변기 커버까지 씌우는 일까지 했다). 이 모든 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다. 화장실 청결 상태 유지를 위해 비행 내내 승객 1명 사용 후 1회 점검을 한다. 서비스 매뉴얼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승객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승무원들은 어떤 승객이 화장실을 쓰고 나왔는지 파악하고 있다.
한바탕 바쁜 식사 서비스가 끝나고 그제야 기내 안은 평화를 찾아가는 듯했다.
갤리에서 산더미처럼 나온 쓰레기 더미들을 정리하기 바쁘다. 그때 쾅-하는 소리가 들려 닫혀있던 갤리 커튼을 서둘러 열어본다. 한 승객이 화장실을 쓰고 나와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문 좀 살살 닫지..'
갤리에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둘러맸던 앞치마를 벗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 일회용 장갑을 끼고 문을 연 순간 내 몸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변기는 내리지 않아서 용변은 그대로 남아있고, 바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두루마리 화장지 쪼가리, 거기에 세면대에는 침을 뱉어놓은 자국까지 승객은 화장실 쓰고 간 흔적을 적극적으로 남기고 떠났다.
'하...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마터면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숨을 참는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고 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지 쪼가리들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니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흡흡 거리며 숨을 참아보지만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손에는 비닐장갑을 두 겹씩 꼈지만 왠지 모를 축축함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승무원에게 악의가 있던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는다. 욕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꾹 눌러 담아 쓰레기통에 휴지들을 쑤셔 넣는다. 마무리로 항균 스프레이를 화장실에 덕지덕지 뿌려준다.
청소를 하고 난 뒤의 화장실은 방금 전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깨끗해졌다.
오물이 묻은 장갑을 벗어던지고 손을 벅벅 씻는다. 몸에 냄새라도 베였을까 봐 갤리로 돌아와 향수를 마구 뿌려댄다.
원래도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는데, 승무원을 하며 별의별 일을 수도 없이 겪고 난 뒤로는 그런 성격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특히 더럽게 화장실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지긋지긋해졌다. 덕분에 화장실 사용 에티켓은 누구보다 좋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여의도에 있는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소개팅을 하는 날이었다. 소개팅 중간에 잠시 화장실을 갔다. 사용을 하고 난 뒤에는 비행기 화장실에서 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삼각 접기까지 하고 나왔다(사실 삼각 접기는 무의식 중 한 행동이다. 습관이 무섭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소개팅남과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셰프로 보이는 분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저.. 이거.."
셰프는 우리에게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민다.
"저희 안 시켰는데요?"
소개팅남이 대답을 한다.
"아, 서비스입니다."
서비스 음식 치고는 너무 푸짐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셰프님이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몇십 년 동안 장사하면서 손님이 화장실 쓰고 청소해 주시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너무 놀라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요. 직원이 화장실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저한테 얘기해 주더라고요. 보니까 마지막으로 화장실 쓰신 분이 손님이라서요."
셰프님은 화장실 청소해 주는 손님을 처음 만나 적지 않게 감동을 받으신 듯 보였다.
누구에게 칭찬받으려 한 것도 아니고, 서비스를 받아내기 위해 한 행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 또한 어리둥절하였고, 셰프님에게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음식을 테이블 위에 후다닥 놓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썼다는 이유만으로 음식 서비스를 받고 감사하다는 말까지 들을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게 썼으면 이렇게까지 하실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중 화장실에 가보면 깨끗이 사용해 달라는 간곡한 문구를 많이 본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알바생들이 죽을 지경입니다'라는 문구. 오죽하면 '죽을 지경'이라고까지 표현을 했을까 싶다.
시민의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화장실 사용에 대한 시민의식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우리는 '공공', '공중'이라고 하면 그저 편하게 마음껏 사용하려는 심리가 있다. 비행기 화장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승객은 쓰고 간지도 모르게 깨끗하게 쓰는 승객이 있는가 하는 반면, '화장실 잘 쓰고 갑니다~'티를 팍팍 내고 가는 승객도 있다. 화장실 사용하는 에티켓만이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매너 수준'을 보여주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 결국 나의 '품격'이 만들어진다.
비행기 화장실 바닥에 휴지를 버리고, 세면대에 침을 뱉어놓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간 그 승객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손님, 집에서도 이렇게 쓰나요?"
PS. 화장실 깨끗하게 쓴 덕분에 서비스 음식도 받고 소개팅남에게 점수를 땄지 뭐예요ㅎ 살다 보면 가끔은 재밌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