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100번의 생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중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생일이 몇 번이나 될까?
30번이 넘는 생일을 맞이했지만 지금까지 잊혀지지도, 앞으로 잊을 수 없는 생일이 있다.
승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생일을 하늘 위에서 보내기도 하고, 해외에서 맞이하는 건 다반사이다(시차 덕분에 생일을 두 번 겪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승무원들 중에는 이런 특혜(?)를 누리고자 생일에 비행하는 걸 즐기는 이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웬만하면 생일에는 비행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연차를 신청하지만 스케줄 팀은 이런 나의 상황을 알 리가 없으니 반려되는 날이 더 많았다.
스케줄이 발표되는 날, 후다닥 휴대폰으로 스케줄 확인하는 사이트를 확인했다.
'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해 생일에도 비행 스케줄이 나왔다. 그나마 동남아 최애 노선인 방콕이 나왔고 게다가 팀 비행이라는 게 위안이 되었다. 생각보다 좋은 스케줄, 팀 비행이 회사가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생일 당일.
오후 늦게 출발하는 방콕 비행 덕분에 거하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손으로 더듬더듬 찾아 습관처럼 확인한다. 카톡 알림이 여러 개가 표시되어 있다. 모두 생일 축하 메시지이다.
'맞다. 나 오늘 생일이지...'
연락 온 카톡에 답장을 하다 보니 벌써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다.
'그래~ 생일을 방콕에서 보내는 거 앞으로 얼마나 더 해보겠어. 팀 비행에 동기까지 있으니 잘 갔다 오자.'
신기하게도 이런 마음을 먹으니 출근길 발걸음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브리핑실.
파티션이 칸칸이 쳐있는 브리핑룸마다 제각각 다른 도시로 떠날 준비를 하는 승무원들로 가득하다. 방콕 비행을 같이 갈 팀원이 자리를 미리 맡아놓았는지 나를 향해 반가운 손짓을 한다.
오랜만에 팀 비행으로 모두 살갑게 인사를 나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비행에 필요한 브리핑을 빠짐없이 해냈다. 다만 빠진 것이 있다면 팀원들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었지만, 오히려 모른 척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게 더 좋았다. 괜히 부담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극 내향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일만큼 불편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브리핑이 끝나고 게이트로 걸어가는 동안 동기 언니가 내 옆에 붙어 속삭이듯 말한다.
"ㅇㅇ아, 생일 축하해!! 생일인데 비행하네.. 우리 방콕 가서 맛있는 거 먹자! 뭐 먹을지 생각해 둬!"
내심 생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해주길 기다렸던 걸까? '생일이 뭐 별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은근슬쩍 생일 축하를 해준 동기 언니가 고맙게 느껴진다.
승객을 태운 비행기는 방콕을 향해 출발을 했고, 정신없이 비행을 하다 보니 생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먹었다.
객실 안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승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객실 조명이 어두워진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려고 하던 찰나, 동기 언니가 내가 있는 갤리로 찾아와 어색하게 말한다.
"ㅇㅇ아, 사무장님이 너 뒷갤리로 오라는데?"
눈치 백단 나에게 느낌이 왔다. 팀원들이 갤리에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해 놓은 듯한 느낌. 모른척하고 싶었지만 동기의 어설픈 연기에 피식 웃음이 난다.
"알았어 언니..ㅎ 지금 뒷갤리로 가면 되지?"
언니도 멋쩍은지 나를 따라 웃는다.
닫혀있는 커튼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팀원들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우고 초를 붙이지 않은 케이크를 얼굴에 들이민다. 혹여 휴식하고 있는 승객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팀원들은 속삭이듯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마무리로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부담스러울 줄만 알았던 생일파티는 막상 축하받아보니 기분이 좋다.
비행기에서의 생일 파티, 비행 끝나고는 태국 맛집에 가서 원 없이 먹은 태국 음식들. 생일에 연차 반영을 해주지 않은 스케줄 팀에게 오히려 감사함이 생긴다.
방콕에서의 2차 생일 파티를 하고 늦은 오후 시간 혼자 카페에 갔다.
빵빵한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 카페라테 덕분에 팔뚝에 닭살이 돋는다. 카페 밖 창밖으로 길거리 음식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 드문드문 보이고 정돈되지 않는 도로 위로 수십 개의 오토바이가 질서 없이 지나간다. 방콕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배도 부르고 방콕 시내를 바라보며 시원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생일을 이보다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싶다. 행복, 여유로움, 편함, 평화 이 모든 것이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그때였다.
이 평화가 지속되지 않길 누군가 바라고 있던 걸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에서 시끄러운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엄마 전화다.
해외로 비행을 나가면 엄마는 국제전화를 하지 않는데 이날따라 국제 전화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비행 간지 모르나?' 또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려고?'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 방콕 비행 왔....!"
엄마의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PS. 승무원에게 비행기에서 생일 파티하는 일은 인생에 남을 만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이다음에 일어난 일 덕분에 잊지 못할 생일이 되었는데요.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