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여행자 Oct 19. 2023

앞쪽에서 서비스해 주신 두 분입니다

친절의 美

  나는 친절을 베푸는, 베풀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승무원이다.

  비행기에 타서 보는 승무원들은 대부분 초지일관 친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 또한 이러한 직업 이미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신입 시절에는 '친절'에 온 오프 모드가 있는 것 마냥 구분 지으며 비행을 했다. 직업에 의해서 의무적인 친절을 베풀었지만 오히려 행복감과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라고 정확하게 선을 그어 말할 수는 없지만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통해 진정한 '친절'을 배울 수 있었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청주에서 제주로 가는 아침 비행.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비행 덕분에 나를 포함한 승무원들은 졸음과의 사투를 벌였다. 객실 준비를 마치고 승객 탑승 시작까지 10여 분 정도 시간이 남은 상황. 잠을 깨우기 위해 갤리에서 커피 믹스 2 봉지를 뜯어 진하게 타서 마셔보지만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침 지상 직원이 비행기로 들어와 승객 현황을 공유해 준다.


  "사무장님, 오늘 승객 만석이구요, 인펀트(Infant 24개월 미만의 유아) 승객은 5명입니다."


  진한 커피로도 잠이 깨지 않았는데 '만석'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건 왜일까? 기장님의 탑승을 시작해도 좋다는 말씀에 어기적거리며 내 위치로 이동한다. 보딩(Boarding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승객들은 물밀듯이 비행기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언제 졸았냐는 듯 승객들을 향해 밝은 미소로 환영 인사를 하며 맞이한다. 참고로 승무원들은 승객들이 탑승하는 동안 단순히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승객들을 스크리닝(또는 모니터링이라고도 표현한다)을 하며 탑승 인사를 한다. 여기서 스크리닝이란 탑승하는 승객들 중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던지, 승무원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지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비행기 출발 전 안전 운항을 위해 반드시 하는 승무원의 '보이지 않는 업무'이다. 겉으로는 환한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지만 승무원은 매의 눈으로 승객들을 스크리닝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러던 중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여자 승객이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용 유모차를 들고 있었고, 등에는 아이 기저귀 가방처럼 보이는 백팩을, 앞쪽에는 아기띠를 메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보통 유아를 동반하는 보호자 승객은 짐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케어해야 해서 티켓 발권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데까지 애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배우자 또는 조부모님과 같이 다른 보호자와 함께 비행기에 타는 경우가 많다. 내 눈에 띈 여자 승객 주변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승객이 없는 듯했다. 즉, 승객 스크리닝 중 '도움이 필요한 승객'으로 판단이 되었다.


  "손님, 유모차가 많이 무거워 보여요. 제가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녀는 반가운 표정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의 손에서 유모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후배에게 눈빛을 보냈다. 같은 팀으로 1년 넘게 비행을 해와서 그런지 후배는 나의 눈빛 하나로 찰떡같이 알아듣고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승객의 남은 짐 보관을 함께 도와주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손님의 자리는 맨 앞자리였고 승무원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탑승을 했다.

  아이 엄마도 그제야 한시름 놓였는지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비행 내내 아이와 아이 엄마 승객의 컨디션을 살폈고 다행히 아이는 엄마 품에서 사랑스럽게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비행이라 그런지 대부분 승객들은 잠에 취해 있었고 덕분에 비행기 안은 고요했다. 서비스를 끝내고 후배와 함께 점프싯(Junp Seat 승무원 전용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와 아이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저 손님은 혼자서 애 보랴, 짐 들랴 얼마나 정신없었을까요? 이따 제주에 도착해서도 분명 우리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승객 내릴 때 아까처럼 유모차랑 짐 꺼내는 것 도와줘요."


 후배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가 제주 공항에 착륙을 하고 주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승객들은 서로 먼저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틈에서 아이 엄마는 선반에서 짐을 꺼내는 타이밍을 놓쳐 안절부절못하였다. 아이는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잠이 깼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손님,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가서 도와드릴게요. 괜찮으시면 자리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라고 말을 전했고 그녀는 모든 승객들이 내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려주었다.

  나와 후배는 그녀에게 다가가 선반에 보관되어 있던 유모차와 백팩을 꺼내 전달해 드렸고, 그녀는 내릴 때 별다른 말없이 아이와 함께 내렸다.

  인사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 말 없이 내린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겠거니 생각했고 이후 그날의 일을 잊고 지냈다.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팀 단톡방에 20개가 넘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휴대폰 화면에 떠있는 마지막 내용이 'OO 사무장님, OO 씨 축하드립니다'였다.

  '이건 난데? 생일도 아닌데 뭘 축하드린다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나와 후배가 칭송 레터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칭송받은 내용을 읽어보니 청주 비행에서 만났던 아이 엄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칭송 내용은 이러했다. 남편 없이 10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였고, 아이와 함께 비행기 타는 일은 처음이라 탑승 전부터 많이 떨리고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승무원이 먼저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하여 글을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후배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용 말미에 '앞 쪽에서 서비스해 주신 두 분입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팀 단톡방에는 칭송받은 우리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로 가득했지만 공개적으로 축하받는 것이 나로서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민망했다. 칭송을 유도하기 위해 한 행동도 아니었고 매 비행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승객이 있을 때면 그날과 다름없이 도움을 드려왔다. 나는 단지 승무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아마 다른 승무원도 그 상황이라면 분명 나와 똑같이 했을 것이다. 칭송을 받은 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기에 승객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다. 하지만 혼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비행기 타기란 '긴장되어 있는 상태'라고 표현할 만큼 난이도가 상당히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이 칭송받은 일을 계기로 아이를 데리고 혼자 비행기에 타는 승객들을 보면 더욱 마음이 쓰인다.


 예기치 못한 친절과 도움의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뜻밖의 감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언제 어디서든 환영을 받는다. 승무원이라는 직업 정신으로 친절을 베풀었지만 베푼 만큼 나의 마음에는 따뜻한 감정들로 가득 차오른다. 상대를 위한 행동이지만 결국은 나의 마음이 풍족해진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마음속에 숨겨둔 친절을 꺼내 상대에게 표현해 보자. 아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분명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 순수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순수한 친절을 베풀었을 때 그 '친절'이 더욱 의미 있고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승객들을 향해 외친다.

  "손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PS. 승객이 내릴 때 승무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었는데요, 칭송을 받고 그런 생각을 한 제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승무원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었지만 아이와 함께하기에 정신이 없어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녀가 그때 비행을 계기로 앞으로는 아이와 함께 비행기에 탈 때 발걸음이 가벼웠으면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