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에서 배운 다정함의 한계

히틀러의 식탁에서는 평화를 논할 수 없다.

by 삐딱삐약이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주의(사티아그라하)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정치적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힌다. 총칼을 앞세운 대영제국의 폭력을 침묵과 인내로 '머쓱하게' 만들며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이끌어낸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위대한 철학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작동하는 절대 원칙은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영국에는 통했지만, 히틀러의 나치 앞에서는 철저히 무력했다.


에릭 와이너가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표현했듯, 비폭력주의는 "특정한 조건에서만 나타나는 무지개"와 같다. 거시적 역사에서 비폭력이 작동했던, 그리고 실패했던 메커니즘을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는 개인의 일상과 관계 속에서 비폭력주의가 성립하기 위한 서늘하고도 명확한 조건들을 발견하게 된다.


1. 거시적 성공의 조건: 수치심과 착취의 구조

간디의 비폭력이 대영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핵심에는 영국 사회가 느낀 자기모순과 도덕적 수치심이 있었다. 당시 스스로를 민주주의와 법치, 기독교적 윤리를 수호하는 문명국이라 자부했던 영국에게, 무장 해제한 채 평화 행진을 하는 인도인들을 몽둥이로 내리치는 자국 경찰의 사진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뼈아픈 수치심과 정치적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또한, 영국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도의 '착취'에 있었다는 점도 비폭력 저항이 효과를 발휘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인도인들이 살아서 노동을 하고 세금을 내야만 제국이 굴러갈 수 있었기에, 비폭력 불복종은 이 착취의 톱니바퀴를 멈춰 세우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였다.

이처럼 상대가 최소한의 도덕적 준거를 가지고 있고, 나를 파괴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닐 때 비폭력은 상대의 양심을 찌르고 무너뜨리는 예리한 창이 된다.


2. 거시적 실패의 조건: 극단적 비인간화와 절멸

반면 파시즘과 홀로코스트 앞에서는 비폭력주의가 설 자리가 없었다. 나치에게 유대인은 해칠 때 도덕적 가책을 느낄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상대를 벌레나 병균으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비인간화 앞에서는 가해자의 수치심이나 양심이 작동할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었다.

게다가 히틀러의 목적은 유대인의 착취가 아닌 '절멸(말살)'이었다. 언론이 통제되고 제3의 관찰자가 철저히 배제된 수용소라는 밀실에서, 저항하지 않는 희생자는 그저 조용하고 편리한 학살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상대를 파괴하려는 맹목적인 의도 앞에서의 비폭력은 고결한 희생이 아니라 참혹한 방치이자 포기에 가깝다.


3. 미시적 성공의 조건: 개인의 관계에서 비폭력주의가 작동하려면

거시적 역사에서 드러난 비폭력주의의 명암은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할 때, 일방적인 희생자나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공감 능력과 양심이 있어야 한다. 영국 시민사회가 느꼈던 수치심처럼, 상대 역시 내 고통에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더 나아가 타인을 통제하고 짓밟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성향의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스스로를 개인적 차원의 홀로코스트로 밀어 넣는 행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비폭력적인 대화가 아니라 단호하고 물리적인 단절이다.


둘째, 파괴가 아닌 관계의 '유지'라는 공동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서로 갈등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 관계를 지속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양측 모두에게 있어야 한다. 영국과 인도의 지배 관계조차 상대의 생존을 전제로 했듯, 서로의 존재를 지우려는 목적이 아닐 때만 평화적 조율이 가능하다. 갈등의 원인이 서로의 '충족되지 않은 다른 욕구' 때문일 때 비폭력주의는 기적처럼 작동한다. 와이너의 말처럼, "가장 창의적인 해결책은 양측이 자신이 원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수치심을 일깨우는 명확한 경계선(Boundary)을 세워야 한다. 영국의 소금 전매제와 고액 세금에 저항하여 직접 소금을 채취했던 간디의 소금 행진(1930)이 보여주듯, 진정한 비폭력은 결코 수동적인 순응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불복종이다. 개인의 비폭력 역시 자신의 존엄성을 해치는 타인의 행동에 명확히 반대할 수 있는 단단한 자아의 경계선을 요구한다.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투명하게 표현하되, 상대가 선을 넘었을 때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대의 내면에 웅크린 양심을 직면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타인의 폭력성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우아하고 강력한 방법이다. 그러나 역사와 인간의 깊은 심리적 역동에 대한 냉철한 이해가 동반되지 않은 맹목적인 비폭력주의 신봉은 위험하다.

진정한 비폭력주의자는 누구에게나 온화하게 웃어주는 무해한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자신의 폭력성을 비추고 있는 거울을 깨부수려 하는 맹수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

상대가 기꺼이 그 거울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단단한 평화의 힘,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서 구현되어야 할 진정한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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