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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Jan 16. 2021

부모님의 요양병원 한달살기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슬프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코로나 확진자 때문에 어수선하고 마음이 불안한 이 시국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좀 불편했다.


'이 시국에 엘리베이터 교체라니. 그것도 이렇게 추운 한겨울에 하다니. 왜 하필이면?' 

불만이 가득한 나는 관리 사무소와 엘리베이터 회사에 전화해서 부모님의 사정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혹시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어쩔 수 없다'와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친정 엄마는 오랜 기간 투병하는 암 환자다. 게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도 못해 휠체어를 타는 사회적 약자이다. 엄마에게 엘리베이터 공사 소식은 아주 큰 고민이었다. 부모님은 매일 노인 주간보호센터에 가신다. 친정은 9층이다. 아빠도 걱정이지만 휠체어를 타는 엄마는 꼼짝없이 집에 있든가, 다른 거주지를 찾아보아야 했다.

재가복지센터에 전화해서 방법을 물어보았다. 일단 9층까지 걸어서 다니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 쪽으로 3시간, 아빠 쪽으로 3시간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맞는 요양사님을 찾았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 걸어서 다니기에는 힘들겠다고 했다. 걸어서 다니겠다는 분을 찾았지만 한 분뿐이라 3시간의 서비스만 받기에는 부모님이 걱정되었다.
 
 "요양사님이 아침에 오시면 밥을 많이 해놓으라고 부탁드리면 되겠다. 식탁에 차려놓으면 저녁까지 먹고 설거지는 담가 놓고. 아빠 있으니까 위험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이렇게 말하는 건 분명 요양병원에는 안 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빠는 한번 잠이 들면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엄마는 옆에서 보살핌이 필요한 환자다. 나는 엄마의 마음은 알겠지만 마음이 불안했다.

노인 주간보호센터와 상의를 해보니 요양병원도 단기로 이용할 수 있으니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집 근처에 요양병원이 있어서 방문해 보았다. 인원이 제일 적은 4인실을 둘러보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내가 본 그대로 생각보다 괜찮은 점을 강조하며 말했다.

"휠체어와 환자용 변기도 다 들고 가서 집처럼 놓고 사용해도 된다고 하고 힘든 건 요양사님들이 다 도와주고 간호사실도 바로 앞에 있어서 벨 누르면 바로 온대."



'다시 집으로 오기 힘들다'는 그 말 때문에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불안한 표정이다. 나는 집에 계시던 요양사님께 엄마랑 이야기를 잘해보라고 부탁하고 친정을 나왔다. 저녁에 요양사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집에 와달라고 부탁하시네요. 그런데 제가 말했지만 저는 무릎 수술을 해서 9층까지는 힘들 것 같거든요.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요양병원에 가기 싫으신지 계속 부탁하세요. 제가 내일 하루 연습해보겠다고 했어요."

나는 깜짝 놀라 엄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친정으로 갔다.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면 탈이 난다. 그러다가 요양사님 다리가 더 아프기라도 하면 우리 책임이 크고 마음이 불편할 거다. 우리 가족끼리 해결해 보자'라며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 그냥 내가 엄마 옆에 한 달간 있을까?"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그냥 병원 들어가서 있겠다고 말했다. 가고 싶지 않지만 딸이 힘들까 봐 마음을 바꾼 엄마를 보니 그날 저녁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마음이 불편해서 센터장님과 통화를 했다. 상황 이야기를 하니 어떤 어르신이 한 말 때문에 엄마가 그러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양병원에 1년 정도 있다가 나오셔서 우리 주간보호 센터에 다니시는 분이 엄마한테 '요양병원은 절대 갈 곳이 아니라며 가면 못 돌아온다'고 하셨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병원에서 안 좋은 기억이 참 많았다. 엄마가 설암 때문에 수술하고 입원해 있을 때 일이었다. 간병인을 구했더니, 그 분은 매일 먹을 것을 사 와서 방 전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음식을 먹고 소란스럽게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퇴원하는 날 듣게 된 나는 간병인에게 화를 내고 병원 측에 얘기를 했다. 결국 그 간병인은 징계를 받았고, 엄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겼다. 엄마는 그때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 소외감과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때 왕따를 당했다'라고.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슬펐다. 그나마 좋은 요양병원을 찾는 일이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었다. 요양병원에 2인실이 있는지 알아보던 중 한 병원을 찾았다. 그곳은 시아버님이 살아생전에 2년 가까이 지내던 요양병원이었다.

남편은 거기가 좋겠다고 말했다. 바로 찾아가 상담을 하고 방을 둘러보니 확실히 다른 병원보다 아늑한 느낌이 있어서 좋았다. 2인실이라 부모님만 방에 계시니 코로나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부모님도 2인실이라고 하니 안심이 되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한 달간 거기가 내 집이려니 생각하고 다녀올게."

엄마의 그 한 마디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엄마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한 달간 두 분이 여행 갔다 생각하고 거기에서 좋은 생각만 하고 지냈으면 좋겠어. 일 년도 금방 지나갔는데 한 달은 눈 깜짝하면 지나갈 거야."

마음속 진심은 모르겠지만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엄마가 참 고마웠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한 부모님의 요양병원 한 달 살기. 제주도, 남해, 강릉, 부산 등에서 한 달 살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요양병원에서 한 달 살기'를 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다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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