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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Aug 29. 2018

내 양성평등 지수

아직 멀었다.

요즘 동화책들이 참 대단하다. 잠자리 침대에서 딸에게 책들을 읽어주노라면 상당히 어려운 주제를 간결하고도 재미있게 잘 녹였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오늘 읽은 책은 성의식을 고착화하지 않게 해주는 내용이었다. 즉 남자라면, 또는 여자라면 응당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비튼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런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종종 느꼈을 것이다.


이는 어른도 마찬가지다.




나는 스스로 꽤 괜찮은 남편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52시간제 이전) 잦은 새벽 퇴근에도 남겨진 설거지가 있으면 내가 했고, 주말에도 와이프가 빨래를 하면 내가 청소를 하는 식으로 가사 분담을 잘 했다. 아이가 생기고는 후딱 밥먹고 아이를 안아 와이프 식시시간을 확보했고 똥기저귀 치우는 데 손사레를 쳐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진지한 대화를 종종 나눴고 내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우선, 나는 내가 (평균 퇴근 시각 대비, 이 연배의 보통의 아빠들 대비, 우리 회사 직원들 대비, 내 주변 친구들 대비, 등등) 꽤 괜찮은 남편이라고 '혼자서 과신'하고 있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나는 여전히 부부가 하는 일들은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신혼 초부터 와이프에게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이거였다. '집안일은 돕는게 아니고 그냥 같이 하는거야.'.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나는 이말을 들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회사ㅡ집만 반복하고 헬스 외 마땅한 취미도 없는 '재미없지만 괜찮은 가장'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모성애와 부성애의 타고난 차이를 감안한다고 하여도, 아이가 아빠 혼자와는 자지 않으려 한다는게 가장 극명한 증거였다. 와이프가 아픈 데도 아이 생각을 떨치지 못하게 했던 어느날 나는 스스로가 몹시도 미웠다.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던 짧은 몇개월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귀국을 하고나서도 52시간제 덕분에 가족간의 끈끈함을 유지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물론 아이가 좀 더 자라면서 나와 말이 통하게 된 덕분도 있다.


함께 한 미국 생활이 얼마 전이어서 그것을 올해의 여행으로 치고, 올해 여름 휴가는 강원도로 향했다. 여정은 즐거웠다. 아이는 휴게소에서 평소에 자제 당하던 갖가지 간식과 뽑기를 획득했고 엄마 아빠는 서울서 맛보지 못하던 현지식으로 입맛을 달랬다.


그런데 그게 탈이 났을까. 와이프는 다음날 크게 배앓이를 했고 결국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오후께 퇴원했다. 오전 나절을 병원에서 보낸 아이가 힘없이 얘기했다. 오늘 물놀이 가기로 했던 날이라고.


와이프 상태가 호전되어 호텔로 돌아와 눈을 잠시 붙일 때 나는 딸 손을 이끌고 물놀이장으로 향했다. 우린 신나게 놀았고 그날 딸은 아이용 침대에서 나와 끌어안고 잠들었다.


부녀 락카는 모자 락카에 비해 한산하다.




엄청나게 피곤했지만, 혼자서 모든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순간 내머리를 스친 생각에 나는 아직도 내 갈 길이 멀다고 통감했다.


"오늘 잘했으니까 나중에 XXX 사도 되냐고 물어봐야징~"


아직 멀었다. 아직 나는 아이 돌보는 것을 '도와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일을 당연히, 자연스럽게, 남김없이 하지 못하고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멀었다는 신호다.


그럼에도 지치지 말고 한발씩 나아가야 할 뿐이다. 그런 노력이 가족을 지탱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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