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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근육 May 16. 2019

해외에서 산다는 것

생각보다 이겨내야 하는 것이 많다.

워싱턴 출장 중 하늘이 유독 맑은 어떤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렸기에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보니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침 일하던 사무실이 백악관 근처였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동료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백악관을 향해 걸었다. 백악관에는 그날도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여기저기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나름의 준비 끝에 그곳을 들렀던 일부 방문객들이 경찰을 향해 무슨 일이냐 물었고, 그 소리들은 공중으로 분산되며 조각난 채로 내 귀에 들려왔다.


그날 백악관의 하늘은 참 맑았다.


같은 색깔로 티셔츠를 맞춰 입은 단체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거나 주요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까이는 미국 국내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우리로 치면 수학여행쯤 되는 행사 정도로 보였다. 그들은 재잘거리며 여행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백인으로만 구성된 한 무리의 중간에서 밝은 미소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그들과 우리는 서로를 스쳐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건 참 묘하다고. 낯선 이를 향해 손을 흔든다는 것. 그 나이가 무척 어린 소년이었지만 자칫 인종차별적이라는 표현을 들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인종차별은 과거 노예제와 연관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 근원적인 이유가 된다. 만약 그 소년이 '여행 와서 들뜬 마음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반가워서' 손을 흔든 것이라면 무어라 말할 거리도 없지만, '신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손을 흔든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어른이 가르쳐야 한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가르쳐야 알 수 있다. 극단적인 성선설을 믿더라도 구체적인 사례들에 닥칠 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결국 경험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동양인이 거의 없는 곳에서 홀로 파견 갔던 회사 선배는 식당에 갈 때마다 몰래 자기 자리로 와서 구경하고 가는 아이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나 역시 미국 파견 중에 동료와 놀러 간 여행길에서 그런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차로 긴 시간 운전을 하다가 우리는 한적한 동네의 한 식당에 들렀다. 그 동네는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고 우리나라 표현으로 빌리자면 '홍길동 의상실'이라고 불림 직한 가게들이 짧은 거리를 작게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가 영어를 말하는 것에 신기해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지 마시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고, 아이들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시선을 옮겼지만 그것을 막아대는 부모의 손길에 이내 포기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개구쟁이 아이 하나가 결국 우리 테이블 옆으로 왔고, 2~3초간 머물며 우리를 바라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 눈빛에는 '신기함'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말했다.


"이런 시선 집중이 즐거워야 할까요?"

"아뇨. 언짢은 게 맞는 상황이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니군요."


해외에 살면 견뎌야 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 언어가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다르고, 환경이 바뀐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가 바뀐다. 건강 때문에 이민을 간 사람이 문화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간 사람이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내가 사는 곳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곳이 반드시 유토피아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예전엔 '헬조선'이라고 부르며 이를 탈출하자는 분위기에 신중을 기하라는 글을 페북에 쓴 적도 있다. 꼰대처럼 보이겠지만 해외를 많이 다녀본 입장에서 느끼는 점을 반드시 말해 주고 싶었다.


가끔씩 유튜버들이 해외여행 중 겪은 인종차별, 성추행 사건들을 찍어서 올려 이슈가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까지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걸까? 대사관에 연락하고 해당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해야 할까? 그런다고 얼마나 바뀔까? 미국이라 치면 - 예를 들어 내가 여행 중 들렀던 그 작은 마을 - 구석구석까지 의식 개선 캠페인의 영향이 미칠까? 그렇다면 이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하여 참고 있으면 되는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며 자위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내가 그 나라 언어로 충분히 항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그저 분노 속에 묵히고 있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인종차별의 근원이 '다름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듯, 해외에 나가서 사는 것은 '완전히 열린 또 다른 세계'라는 데 핵심이 있다. 귀여운 아이의 손짓 하나에 생각이 길었다. 꼬마야 아저씨도 반가웠다. 다만 나는 수학여행으로 간 게 아니라서 너만큼 웃진 못했구나.





곧 미국으로 다시 파견을 갑니다. 지난번 파견은 혼자였지만 이번은 가족과 함께입니다. 지난번은 미국 남부였지만 이번엔 미국 동부입니다. 제 생활에도 변화가 생길 것 같아 미리 글을 남깁니다. 업무로 가는 파견이라 제가 항목 하나하나를 취사선택할 수는 없지만 업무적으로도 가정생활 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길 텐데 그 앞에 기대와 더불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네요. 앞으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또 하나의 매거진으로 남길지 혼자 삭힐지 고민입니다. 어쨌거나 조만간부터는 글이 올라오는 시간대가 한국과 정 반대가 되겠네요. 이 사람 또 잠 안 자고 무엇하나 걱정 마시라고 신변의 변화를 알립니다. 금방 다시 찾아올게요! 모두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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