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낫프로
매니저로 일하는 건 이전과는 다른 문이 열리는 일이었어요. 연봉은 작고 귀엽게 올랐지만 책임이 늘어나고, 일 인분의 일을 거뜬히 해야 하고, 팀원을 챙겨야 하고, 프로젝트 전체를 봐야 하고, 더 알아야 하고, 미팅을 주도하고, 이전보다 앞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일을 다음 단계로 진행시키기 위해 중간에 껴서 적당히 말을 전해야 하더라고요.
중간에 끼는 일. 그 일이 어려웠어요.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내부의 입장을 잘 취합하고 정리해서 그나마 기분이 덜 상하게 한쪽에 전하고, 원하는 조건을 얻기 위해 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일이요. 이런 일은 못하면 티가 팍 나고, 당연하게 잘해야 하는 일이라 샌드위치가 될 때마다 괴로웠어요. 와,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 어떻게 전달하지? 하는 막막함 때문에요.
프로젝트가 버벌 브랜딩을 마치고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더 힘들었어요. 의사소통 단계가 추가되고 조금이라도 클라이언트를 잘 아는 제 의견을 말하면서 디자인팀의 입장도 고려해야 했거든요. 버벌 브랜딩이 끝났으니까 나는 끝-이 아니라, PM이니까 마지막까지 무사히 마무리해야 하는 거죠. 물론 디자인 디렉터님이 일을 척척 해주시지만 리뷰도 참석하고 디자인 보고를 위한 기획도 하고 가끔 관련 설명도 해야 하고 다르지만 알아야 하는 분야까지 커버했어요.
일을 하다 보면 입장 차이가 있고 그게 쌓이면 한 번씩 클라이언트가 디자인팀에 대한 불만을 저에게 이야기해요. 물론 제가 주도했던 버벌 브랜딩에서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내가 한 일에 대한 불만은 반박도 하고 이해도 하며 상황을 조율하지만 다른 팀에 대한 이야기는 그대로 전하면 분란만 만들 수 있잖아요. 적당히 이야기를 편집해서 디자인팀에 전하는 거죠. 말도 순화하고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면서 디자인팀 맞장구도 쳐주고 으쌰 으쌰 하는 거죠. 클라이언트와 통화할 때는 그분의 입장을 잘 들어주고요.
여러 사람이 개입하는 일이니 불만이 나올 수 있어요. 다만 얼마나 잘 정리하고 넘어가느냐 그 과정에서 한쪽이 크게 기분이 상하냐 마느냐는 중간에 끼어있는 저 같은 사람이 역할을 잘해야 부드럽게 넘어가더라고요. 원활한 교통정리를 위한 완충재가 되는 거죠. 하지만 완충재도 수명이 있잖아요? 원투펀치로 맘 상하는 일은 한 번씩 생겨요. 사무실 밖에 나가 후- 하고 심호흡하면서 다른 매니저님과 우리는 도가니예요 하하하 웃으며 이를 앙 물기도 했어요.
불만을 듣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모든 결정이 다른 팀에게 있을 때는 발 동동 구르게 돼요. 도가니가 닳다 못해 없어지는 기분이었죠. 이런 일도 해야 하니까 회사에서는 직급도 달아주고 돈도 주는 거겠지, 어느 회사를 가도 사회생활이란 도가니가 닳고 닳는 일을 포함하는 거겠지 하고 나를 달래요. 일이 항상 내 맘 같지 않으니 힘든거겠죠.
무슨 일을 해도 도가니가 닳는 순간은 있을 거예요. 쌓이고 쌓이다가 마음이 확 터져버릴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툭툭 털고 새로운 도가니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점심시간 동료와 에잇, 이 사람들이, 으아아 아 하다가 으하하하가 되고, 저녁에 함께 하는 맥주 한 잔에 닳고 닳은 도가니를 회복하는 씩씩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샌드위치의 중간 속이 빠지면 그건 그냥 빵이니까, 도가니가 없으면 사람은 뛰지 못하니까요.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여기 치이고 저리 치여도 나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 최면을 계속 걸 거예요.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의 힘을 믿고 싶어요. 맘이 상해도 사람으로 위로받고 사람으로 계속 일하게 되고, 도가니가 닳아도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지속할 수 있어요. 무한 생성 도가니를 위해 몰캉몰캉 마인드로 일을 합니다. 몰캉 몰캉이지만 껍데기는 강인하게 장착. 앞으로 나가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