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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Feb 11. 2021

25.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 않다

김 조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복싱을 배우고 싶어 했다. 운동 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도 좋다고 도장을 알아보면 학원비를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걱정되는 마음도 있어서 “너 복싱 배우고 나서 누가 너한테 시비 거면 어떻게 할 거냐?” 물었더니 “가만히 안 둬야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운동 좀 배웠다고 누구랑 싸우는데 쓸 마음이면 운동을 안 배우는 것만 못하다고 혼을 냈다. 그리고 태권도, 유도 등 우리가 운동을 이야기할 때 ‘도(道)’는 정신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운동으로 몸만 닦는 게 아니고 마음도 다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삼촌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법원보안관리대원들(법원 청사 보안과 법정 질서 유치를 책임진다)은 대부분 특전사나 운동선수 출신인데, 그런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무기니까 오히려 함부로 몸을 쓰지 않는다고. 어설프게 운동 좀 배웠다고 사람 때렸다간 네가 삼촌 직장(법정)에 붙들려 올 수도 있다고도 경고했다.      


조카가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저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요?”하고 여유 있게 웃었다. 조카가 운동을 좋아하고 덩치도 커져서 누구한테 맞고 다니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누구를 때릴까 봐 걱정되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비겁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경고했다. 약육강식의 원리로 살아간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약육강식의 원리를 넘어서 약자를 보호한다고. 고아나 장애인도 보호하고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복지제도를 만들며, 우리와 다른 종인 북극곰을 위해서 환경도 생각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설명했다.      



스무 살이 되지 조카는 두 달 동안 열심히 술을 마시러 다녔다. 그런데 소주 두세 병을 마시고도 멀쩡히 들어왔다. 친구들 중에 자신이 주량이 센 편이라고 했다. 아직 필름 끊겨본 적이 없는데 필름 끊기면 어찌 되는지 궁금하다고 하기에, 필름이 끊기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니 두려워진다고 경험담을 얘기해 줬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악한 마음이 나올 수 있으므로, 술을 마시고도 태도가 변하지 않게 계속 훈련해야 한다고도 했다. 삼촌은 그 두려움 계속 스스로 마음속으로 훈련해서 지금은 술 마시면 더 공손해진다고는 얘기도 듣는다고 했다.     


하루는 조카와 강변을 산책하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어르신 두 분이 산책로를 넓게 막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분들을 피해서 걸었는데 조카가 그분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내게 토해냈다.

그래서 “저번에 필름 끊기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지? 네가 이런 사소한 일에서 분노의 감정을 가지면 술에 취해서 필름이 끊겼을 때 그게 폭발해서 사고 치는 거야. 그러니까 정의감 없이 사소한 일에 분노하면 안 된다.”라고 타일렀다.      



자라온 환경 탓에 조카의 가슴에 세상에 대한 약간의 분노가 잠재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상대 앞에게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나와 대화할 때 상대에 대한 적의가 가끔 드러났다. 술을 마시고 통제력을 상실했을 때 그것이 폭발하지 않도록 평소에 잘 타이르고 훈련시켜야 했다. 그런 것들이 폭발하는 사례들을 법정에서 많이 보니까.          


얼마 전에 키가 190cm도 넘어 보이는 거구가 구속되어 법정으로 들어왔다. 40대 후반의 피고인은 이미 전과가 꽤 있었는데, 이제 막 20대가 된 청년들과 술집에서 눈이 마주치자 시비가 붙었다. 그 일로 자신이 칠성파네 뭐네 하며 청년들을 겁주고 때렸다. 피해자라는 20대 청년 셋도 다 건장했지만, 피고인과 비교하니 그 건장함이 초라해 보였다. 아이들이 자기에게 몹쓸 말로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굳이 어른이 애들을 때릴 필요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화를 참지 못한 결과물로 자신이 법정에 서 있지 않은가.

    

다른 사건도 역시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 손님과 시비가 붙어서 일어났다. 건장한 남성이 노인을 폭행하고 출동한 경찰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경찰관마저 폭행했다. 법정에서 CCTV를 재생하여 경찰관과 어르신을 폭행하는 장면을 다 보여줬음에도 죄를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자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살아온 자료들을 제출했다. 어느 지역 상가연합회 대표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상도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 마시고 화를 참지 못해 옆 테이블 어르신과 경찰을 폭행하고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드러난 선행과 드러나지 않은 그 사람의 심성은 다를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은 일상이나 좋았던 순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같이 일을 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힘든 상황을 겪을 때, 그리고 특히 술에 취했을 때 드러난다.      



며칠 전 비슷한 시비를 겪었다. 옆 테이블의 술 취한 20대가 대뜸 반말을 하며 시비를 걸었다. 아직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가게들이 오후 9~10시면 문을 닫으니 일찍 술 먹고 돌아다닌 듯했다.


순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일을 겪는 건 처음이라, 저 녀석 머리를 테이블에 찍어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안에도 폭력성이 잠자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그 오만 생각 중에 김 조카가 있었다. 술 마실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놓고 이 화를 참지 못하면, 조카를 가르칠 자격이 없고 녀석을 볼 면목도 없을 것 같았다.

    

화를 참고 가게를 나오는 순간. 반지의 제왕이 떠올랐다. 갈라드리엘 마님이 절대반지를 가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저는 유혹을 이겨내었군요." 하는 장면

그래서 괜한 기싸움이나 자존심 따위는 버리기로 했다. 계산을 하고 바로 가게를 나왔다. 화를 참지 못하고 상대를 폭행했다면 치료비를 물어주고 내가 형사 법정에 섰을 것이다. 상대에게 맞았다면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설 연휴부터 가족들을 걱정시켰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카에게 가르친 게 모두 거짓이 되었을 거다.


도망치는 건 생각만큼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인격의 밑바닥을 세상에 드러냈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다.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었고, 조카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만족감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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