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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Feb 13. 2021

26. 동백꽃 필 무렵엔

내 편 들어주는 사람

설 연휴라서 아껴 두었던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고 있다. 곧 봄이니, 마음에 살랑살랑 바람 불어넣어 줄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 고른 게 2019년 KBS에서 방영된 <동백꽃 필 무렵>이다. 그런데 보육원 출신에 미혼모인 동백이의 고달픈 삶이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살랑살랑 봄바람 이전에 삼한사온 겨울철 칼바람부터 담고 있는 드라마다.


힘들지만 아들과 둘이서 꿋꿋이 살아가던 동백이에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매에 걸린 엄마가 찾아온다. 치매에 린 엄마의 행동을 보며 동백이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안다. 나를 버리고도 행복하게 살진 못했구나. 남의 집 가사도우미를 하며 겨우 살았구나. 엄마를 보며 동백이는 생각한다.



‘잘 살았대도 못 살았대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다.’

     



김 조카가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와 막 같이 살게 되었을 때, 조카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버린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물어보았단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부모(나는 그들을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를 찾아볼 생각이 있냐고.  물론 조카는 거부했다. 녀석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날은 또 자신을 낳은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하다고 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서 내 또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사람들 이름을 잔뜩 발견했다. 조카가 자신을 낳은 사람을 궁금해한 적도 있고 외출이 잦았기에, 나 모르게 조용히 그들을 찾고 있나 하는 추측을 했다. 나중에 그 이름들이 교수님 이름인 걸 알게 되었지만, 스무 살 청년은 자신을 낳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궁금증 사이에서 가끔 갈팡질팡했다.  



조카에게 조언했다. 지금 찾지는 말라고. 찾았는데 그들이 잘 살고 있으면 화가 날 거라고. 너는 힘들게 살았는데 그 사람들은 너 버리고 편하게 살았으니. 못 살고 있어도 괴로울 거라고. 나 버리고도 고작 이 정도밖에 못 살았나 싶어서.


그리고 네가 찾아갔을 때 그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반겨주면 다행인데, 오히려 자신들의 숨겨진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려워할 수도 있다고. 새로운 삶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면 너를 적대시할 수도 있다고. 어느 경우든 네가 상처를 입을 테니 지금 찾지 말라고.     



정 찾고 싶다면 네가 사회에 온전히 자리 잡았을 때, 마음이 단단히 뿌리 내려졌을 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면 안도할 수 있고, 힘들게 살고 있다면 도울 수도 있을 거라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들을 찾아봤자 절망감 외엔 얻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거라고 했다.    



김 조카와 같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과 고민을 종종 어머니께 토로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녀석에게 부모를 찾아 주자고 하셨다. 어머니가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내겐 조카지만 어머니에게 손자는 아니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 자식이 남의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 하고 있는 고민을 원래 고민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했던 그들)에게로 넘겨주고 싶었으리라.  

   

그건 조카의 영역이고 우리가 절대 먼저 나서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녀석이 원치 않는데 우리가 그들을 찾아 준다면 아이를 망가뜨릴 수 있다고. 원망을 들을 수 있다고. 그건 조카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에게는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있다. 게장 골목 상가연합회 회장인 곽덕순 여사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장사하며 아들 셋을 홀로 키웠다. 그렇기에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안다. 그래서 동백이를  지켜주고 챙겨준다.


동백이는 어려서는 고아로, 커서는 미혼모로 사람들을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고 자랐다. 내 편이 없었다. 이런 동백이에게 곽덕순 여사는 자신이 친해져 본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살면서 처음 얻은 소위 '빽'이었다.    


동백이는 곽덕순 여사에게 말한다. 자신에게도 회장님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다. 명절이 되면 보육원 출신 조카들은 더 외로워진다. 주변에서 묻는다. 설 연휴에 어디 안 가나고. 고향이 어디냐고. 녀석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그렇게 탈출하고 싶었던 보육원밖에 없다.

 


작년 설부터 김 조카에게 내 부모님"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르라고 인사시킨다. 올해는 김 조카가 전병을 사 왔다. 할머니한테 돈 쓰는 건 안 아깝단다. 정작 어머니와 나는 '돈 모아야 하는 녀석이 돈 썼네'하며, 속으로 녀석의 지갑이 가벼워진 걸 아까워했다. 아버지는 기특하게 잘 컸다며 김 조카를 안아주셨다.  아직 어색해해서 잠시 들리고 떠나지만, 조카가 이곳을 편하게 느끼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다른 많은 조카들에게도 명절에 찾아갈 곳이 생겼으면 좋겠다. 동정심이 아니라 가족 같은 마음으로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길 바란다. 녀석들에게도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백꽃 필 무렵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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