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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Mar 16. 2018

 띤떵훈 조각 모음

매일 20분 








 내 블로그엔 매일 20분이라는 게시판이 있다. 20분동안 한 가지 주제로, 혹은 주제가 없는 상태로 글을 쓴다. 그리고 20분이 지나면 글을 끝낸다. 간단한 맞춤법이 틀리는 것은 예사고, 주어 서술이 안 맞는 경우도 있다. 비문도 많다. 다만 그 한정된 시간이 주는 특별한 맛이 있다. 시간에 쫓겨 '에라 모르겠다'하고 질러버리는 이야기가 많다. 일반적인 글쓰기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오늘은 최근에 쓴 20분짜리 글 몇개를 모아서 올린다. 


글 시작과 끝에 시간이 적혀있다. 





문화의 우열


5:25


문화의 우열을 나눌 수 없다는 문화상대주의자들과 문화에도 수준이 있고, 따라야 할 표본이 있으며, 서구의 진보가 롤 모델이 된다는 문화보편 주의자들은 언쟁한다. 나는 누구 편에 서서 응원해야 할까? 팀을 먹기 위해서는 서로의 장단점을 나눠야 하고, 분석해야 한다. 물론 한쪽으로 치우쳐서 편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결말이 그렇게 날 것임을 확신한다. 다만 어느쪽을 조금 더 응원할지, 어떻게 응원할지를 정하는 글쓰기가 될 것이다. 


보편주의자들은 큰 위험을 안고 있다. 서구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보편주의는 제국주의를 정당화 한다. 무지한, 미개한 이들에게 선진 문명을 보유한 우리가 가르침을 내리겠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다. 우열이 확실히 나뉘어지면 판단은 쉬워진다. 열등은 우등이 되어야 한다. 열등이 가진 다양한 가치는 무시되고 파괴될 수 있다. 나치 독일과 천조국의 강대국 파워 남용을 인정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 그래, 쟤들이 더 똑똑하고 우등하니 저럴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우리가 될 수 있다. 위험하다. 


하지만 보편을 나누지 않으면 복잡하다. 너도 짱이고 나도 짱이고 우리 모두가 짱이야. 서로 영원히 존중하며 살자. 우수한 것은 없어. 모든 것을 포용한 문화란 개념에 모든 게 오케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소개념에서도 같은 판단 근거를 갖게 된다. 예술에는 우열이 없어. 모두 예술이고 아름다워. 존중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흔하다. 다만 다른 분야에선 모호하다. 아이폰X는 최신 기술을 탑재해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서 짱이야. 아이폰3는 아름다운 디자인, 느리지만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기회를 주기 때문에 짱이야라고 하는 사람은 적다. 이렇게 시간의 변동이 가치를 열등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한 첨단 기술 장르에서는 모두 짱이리고 하기 어렵다. 아이폰3가 짱이라고? 그럼 평생 그거 쓰면서 짱해라. 베터리도 10분이면 완충되고 10분이면  다 쓴다. 남은 시간에 명상하고 인생을 돌아보고 문명의 이기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자고. 역시 아이폰3도 짱이야. 모든 게 짱이야라고 하는 소리는 입발린 소리다. 우열을 말하는 게 불편해지면 우리는 뻔히 보이는 상황을 포장해서 돌려 말해야만 한다. 보편 없인 불편이 있다.


상대주의는 모두를 포용하기 때문에 가치가 소멸되는 일이 적다.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다양한 사회에서 우리는 넓게 보기가 가능해진다. 넓게 보면 결국엔 더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더 큰 가치'라는 것도 말하기 까다로운 상황이기 때문에 또 다른 가치라고 말해야 한다. 불편하지만 효용이 있다. 무엇보다 폭력과 무차별적인 힘의 논리를 피할 수 있다. 너 열등해? 그럼 흡수돼라. 식의 생각이 없는 사회에서 모두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정말 모든 걸 포용해야 하는가?  사람의 목숨을 재물로 바치는 문화나 인종을 차별하는 문화를 상대주의라는 명분 아래 인정할 수 있는가? 또 다른 폭력과 차별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자고로 여성의 아름다움이라 하면 작은 발이지. 전족 문화에 희생된 여성들과 그들의 자라지 못 한 발을 보며 '너의 문화를 이해해. 너무 다양하고 아름다운 사회다.'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보편의 가치가 있다. 남녀평등, 인권 등. 보편과 상대주의는 상호 보완적이다. 보편 없이 상대주의를 말 할 수 없고, 상대주의 개념 없이는 기본적 보편이 존중받지 못 한다. 


결국 기본적인 보편이 제공된 사회에서 상대주의 개념을 말하는 적당히 혼재된 상태가 맞다. 그 비율을 정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사회의 합의,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하고 그렇다고 소수가 희생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데 얼마나 기여하느냐의 여부로 봐야 한다. 


5:45












어떻게 그리도 힘든 길을 걸어왔니?


5:34


 안녕 나를 소개할게. 내 이름은 아무개, 취미는 유튜브 비디오 보기. 

오늘도 다양한 주제, 다양한 길이의 영상을 시청했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비디오는 이거다. 'School Swap: Korea Style, Episode 1 Full BBC Documentary 2016'. 영국 고등학생의 한국 고등학교 체험하기. 누군가가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방송사는 그들을 통해 한국의 치열한, 다소 광적인 교육열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선 그들은 학교 생활 잘하는 웨일즈 출신의 남녀 고등학생 3명을 뽑았다. 한국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현지 학생처럼 수업을 듣는다. 우수한 영국 학생들이 한국에서도 우수할 수 있는가가 궁금했다.


각각 파트너가 배정됐다. 한국산 과열 교육 시스템의 표본이 될 만한 학생들이었다. 웨일즈 친구들은 그들의 분신이 되어 한국 학생의 일상을 가감없이 경험했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자정에 귀가하는 일정이었다. 중간중간 호스트가 시청자의 흥미를 돋우려는 목적에서인지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 성취도를 테스트했다. 그녀는 영국 고등학교 수학 문제지를 한국 학생들에게 건넸다. 문제 풀이 시간은 한 시간이었으나, 대부분의 학생이 15분 안에 문제를 풀었다. 그녀는 문제 난이도가 어땠는지 손을 들어 알려달라고 물었고, 모든 학생이 너무 쉽다에 손을 들었다. 다시 생활은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학생들은 한국식 교육에 신음을 토했다. 그들의 고통스런 얼굴에 나의 과거를 투영했다. 


가끔 머릿속으로 과거의 몇 장면을 재생한다. 그리고 자문한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지? '내'가 아닌 단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시절이다. 개인시간은 극히 제한된다. 나의 안녕과 평화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다수를 위해,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희생당해 마땅한 존재다. 군대에서 보낸 2년은 그 시간 중 하나다. 자살하는 이의 심정이 이럴까 감히 예상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늦게 자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생활의 고단함은 둘째고, 피할 수 없는 정신적 폭력이 나를 말살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데, 끝이 안 보이는 시간 속에 인생 낙(落)만 면해도 잘한 일이었다. 부속품이 된 나의 존재를 곱씹을 때 마다 피폐해졌다. 


학창 시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가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학창시절엔 그 시간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가끔 무협 소설로 도피할 뿐이었다. 아침 7시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학교에 존재해야만 했다. 어떤 행위를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냥 존재할 뿐이었다. 잠을 자고, 멍을 때리고, 책에 낙서를 하는 등의 시간을 '떼우는' 활동으로 억지로 버텨야 했다.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이며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없는 곳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 친필 사인을 받아오고 나서야, 자율 학습 시간에 자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었다.


학교와 군대를 벗어나고, 심지어 한국을 벗어난 후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했다. 오사카의 한 식당에서 10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주 6일 동안 부침개 부치고, 고기를 볶았다. 이동 시간을 빼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9시간이 되지 않았다. 일 외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선 수면을 줄여야 했다. 일이 곧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곁에서 이런 생활은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불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먼 길을 돌아 이제서야 사람답게 산다. 하루 6시간 일하고, 남은 시간 배우고, 쓰고, 논다. 여가와 자율이 보장된 삶이다. 타인과 단체의 목적을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주체적 시간이다. 핸드폰 충전하는 것처럼, 에너지를 쓰면 보충해야 한다. 개인 시간을 사치라고 느꼈던 시절을 벗어나 잘못된 것을 본다.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나의 정상은 비정상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의 안녕과 만족을 위해,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살 뿐이다. 물론 환경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시스템 밖을 벗어나기 불가능한 경우도 다수다. 예를 들면 군대와 학교같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그 힘듦이 과거여서 다행이다.'


6:04



이건 10분 오바했다.








배고프다



현재 시간은 3시48분이고, 나는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다. 오랫동안 공복 상태다. 영혼의 허기짐, 외로움의 방증으로써의 허기짐이 아니고 진짜 배고프다. 뭔가 먹으려고 했는데 못 먹었다. 면접 시간에 늦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버거킹에 들릴 수 없었다. 버거킹(호주명 헝그리 잭스)에서는 런치 셋트를 판다. 7불을 주면 패티가 맛있는 햄버거, 감자튀김, 치킨너겟,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받는다. 혜자다.

이미 런치 타임은 끝났다. 면접도 끝났다. 뭘 사먹고 싶지만 카페를 벗어날 수 없다. 한 번 나갔다 오면 다시 자리에 앉기가 민망하다. 커피 한 잔에 일회용 자리세가 포함되어 있다. 어딜 갔다 오면 2회 체류가 되기 때문에 상도에 어긋난다. 다시 앉으려면 새로운 커피를 사야 한다. 돈 내고 커피 한 잔 더 사는 것은 싫고 배는 고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시간은 흐른다. 

카페에서 파는 빵쪼가리를 먹으면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 안타깝게도 카페 빵쪼가리는 비싸다. 편의점에서 2불이면 사는 머핀은 4불, 햄 두 장 넣은 크로와상은 6불이다. 헝그리잭스에서 먹을 수 있는 버라이어티한 셋트매뉴를 생각하니 도무지 뭘 살 수가 없다. 

글을 쓰는 중에 생각이 바뀌었다. 배고픔을 말하니 더 배고파졌다. 배고픔에 집중하지 않아 버틸 수 있었는데, 배고픔이란 단어를 사용하니 배고픔이 형체를 갖춰 나를 삼켰다. 카페 빵쪼가리 비싼 돈 주고 사먹어야겠다. 

주문하고 왔다. 빵쪼가리는 6불이 아니고 7불50센트였다. 돈이 너무 아까워서 눈물이 난다. 사실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문학적 표현이다. 비싼 돈 준 만큼 음미해야지. 




이건 시간도 안 쟀다. 









너는 나 몰라



나는 내게 한 사람이지만, 타인에게 여러 사람이다. 상대에 맞춰 어떤 내가 될 지 고른다. 그 후보군을 포함한 모든 나를 나라는 대범주에 넣는다. 내겐 그 모두가 나다. 그러나 타인에게 나는 부분적인 나다. 상대에 맞춰 자신을 바꾼다는 말은, 그 사람은 나의 다른 모습을 모른다는 뜻이다. 영어로 하면 쉬운데, one of me가 누군가를 상대하고 the others는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쓰려니 쉽지 않다. 속도도 나지 않는다. 역시 시간 제한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매일 20분 게시판용의 글로 바꾸겠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20분 동안 전력질주하겠다.

3:17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춰 상대한다. 어려운 이야기, 문학적인 이야기, 깊이 있는 이야기는 글에서 풀거나, 그 장르에 조예가 있는 사람과 나눈다. 나와 관심분야가 비슷한 사람, 생각이 깊은(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설사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 해도, 쉽게 그런 소재를 꺼내지 못 한다. 오바하는 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부담스러워 할 가능성도 많다. 우리는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데 익숙해져 있다. 어느 선을 넘어가는 이야기는 낯간지러움을 수반한다. 삶이, 죽음이,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압박과 우리의 암묵적 동의 등을 풀어내기 위해선 비일상적인 어휘와 철학과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속으로 이해했다 해도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규정된 개념이 필요하다. 그 규정된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아는 범위까지 이야기하고픈 것이다. 

타인과 깊은 대화를 안 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타인이 내 말을 이해하려면 비슷한 수준의 사유가 가능하거나, 최소한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앞에 있는 사람 기분 맞춰주기 위해 이해하는 척하지만, 이해를 가장한 내실 없음은 곧 눈에 띈다. 나 혼자 말하고 허공에 소리가 메아리 친다. 탁구 처럼 말의 오고감이 필요한데 나는 빈 공간에 홀로 서브한다. 아무 것도 얻을 것 없는 나홀로 서브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깝다. 그 시간에 글로써 생각을 정리하거나 상대에 맞춘 우스개소리를 해서 서로 즐거운 편이 낫다. 

이 글만 보면 나는 위대한 사상가같다. 너무 똑똑해서, 머릿속에 생각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범인들과의 대화를 피하는 고고한 사상가. 계몽을 외치지는 않는 사상가다. 굳이 누군가의 지식을 끄집어내고 앎으로의 열정에 불을 지필 생각은 없다. 너 그 정도는 아니야라고 또 다른 내가 말한다. 그러나 The others는 저 새끼 뭐야. 무시해. 너 짱 맞아.라고 발언한 나1을 졸라 깐다. 나의 생각의 깊이를 파악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사실 제대로 풀어낼 능력도 없다. 나의 글을 사유의 겉을 훑고 알맹이를 끄집어낼 능력이 없다. 나는 진짜 전교 짱 급인데, 글에서 보면 반 3짱 정도다. 글을 보면 위대한 사상가같고, 실제 나의 세상 속에선 전지전능 사유의 신이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났다. 

그런데 어떤 대단한 것을 품고 있길래 이리도 자신감이 있는가? 굉장한 것을 품고 있다. 글이 그걸 끄집어 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소크라테스도 마르크스도 아이슈타인도 내 세상에 들어오면 미아가 될 것이다. 너무 방대한 그 곳의 크기에 정신을 잃을지 모른다. 수조 개의 나와 상대하려면 영원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무한하다. 앞으로 만날 누군가에 나는 또 새로운 나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와의 역사에 따라 처음 지정한 나의 구분값은 또 변할 것이다. 나는 이런 부류의 타인과 상대할 때는 나532을 꺼낸다. 그러나 상대와의 역사가 생기면 나의 버젼은 변한다. 나532.231246..... 결국 매번 새로운 내가 되는 셈이다. 무한한 나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규정하려 해도 그것은 나를 알기 쉽게 만드려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매번의 나는 규정될 수 없다. 

상대를 깔보고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조금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상대에 맞춰 이야기를 하고 반응을 달리하는 것은 아주 평범하다. 왜냐면 이 세상 모두가 그러기 때문이다. 내가 편하기 위해, 헛수고하지 않기 위해,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이다. 

시간이 2분 남았군. 나의 하나는 왜 이런 결론 없는 글, 무의미해보이는 글을 쓰냐고 묻는다. 나의 다른 하나는 이걸로 의미가 생긴다고 말한다. 의미 없는 것을 말하면 의미가 생긴다. 사실 나에겐 의미가 있어서 글을 쓴 것이다. 글로 그 의미가 안 들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쓰면 어떤 의미던 생기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의도에 맞는 글인지 아닌지 여부는 차치하고 결과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3:37









어떠셨나요 여러분. 매일 20분 게시판에 올린 저의 글이 마음에 드셨나요? 마음에 드셨다면 별풍선 쏴주세요. 텔레파시로. 제가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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