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Apr 03. 2018

돌아'봄'


2년 전인 2016년 4월에 봄이란 주제로 글을 썼다. 내가 활동하는 글쓰기 모임 현 소소하다 구 파운틴의 4월 공통주제였다. 모든 멤버가 봄이란 주제를 받아들었다. 저마다의 봄을 글로 풀어냈다. 2년만에 같은 주제를 받아드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당시 봄을 이방인의 신세를 드러내는 소재로 사용했다. 재밌는 시도였다. 같은 주제를 2018년 버전으로 쓰면 재밌을 것 같다. 20대 나에게 30대의 저력을 보여주리라. 




나의 봄 / 2016년 4월


가끔 인터넷으로 음원 순위를 확인한다. 영어권 국가에 살지만, 빌보드 차트엔 딱히 관심이 없다. 케이팝 차트를 모니터에 띄우고 스크롤을 내린다. 외국 생활이 5년이 돼가는 시점에서도, 김치를 달고 사는 김치남의 정체성은 확고하다. 두유노싸이? 레파토리가 구닥다리가 된 시점에도 속으로 싸이는 죽지 않았다고 외친다. 어떤 케이팝 전사들이 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순위를 훑어본다. 역시 봄은 봄이다. 당돌하게 봄이 좋냐 묻는 곡이 차트 맨 위를 차지하고 있다. 화면을 조금 내리니 벚꽃 엔딩이 인사를 하고 있다. 5년이 지났는데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여의도 공원이 차트 뒤편으로 보이는 것 같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 한국에 찾아왔다. 여기는 무더위에 지친 몸이 한숨 돌릴 참이다. 정반대의 계절 속에 from Korea 택을 단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한국 방송을 보고, 한국말로 쓰인 책을 읽는다. 아무래도 국적을 잊고 살 수가 없다. 추위가 시작되는 호주의 4월, 그래서 계절을 역행해 새로움이 가득한 봄날을 느낀다. 전기장판을 꺼내며 봄 노래를 듣는 아이러니란. 일본엔 '붉은 실'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말하는 단어인데, 먼 바다를 건너 실 한 올이 팽팽하게 느껴진다.

  외투 없이는 밖을 나갈 수 없는 시기가 왔다. 거리를 걷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놀란다. 여름 내내 땀 닦아 주던 고마운 친구의 변심은 이리도 빠르다. 수족냉증이 있어, 추운 날이면 손 발이 차가워진다. 차가운 발이 겨울이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창백한 손으로 벚꽃 엔딩을 재생한다. 가사가 봄바람을 부르고, 흩날리는 벚꽃 잎이 손등에 내린 듯 촉각을 자극한다. 가족 친구들은 이 계절을 즐기고 있겠지? 모두의 소맷자락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길 바란다. 


 얼마 전에 친구가 영상 통화를 걸었다. 다른 친구와 둘이서 유원지로 꽃구경을 갔다. 멀리 있는 내가 안쓰럽다며 풍경을 보여준다.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봄이 존재를 과시한다. 사람들의 가벼운 옷차림을 보니, 유난히 추웠다던 이번 겨울이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난 듯하다. 아무래도 머릿속에 있는 나의 봄은 한국의 봄이다. 이 밤의 끝을 잡았던 20년 전 어느 가수처럼, 몇 년이 지났음에도 잡은 한국의 봄을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던, 봄은 4월이다. 옆에 있는 친구도 마찬가지인 듯 초겨울의 봄을 즐긴다.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친구와 봄 길을 나선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보낸 따뜻한 봄을 떠올린다. 

 아이폰4s가 기술의 첨단을 걷던 시기, 한국에서 마지막 봄을 보냈다. 들뜬 마음을 주체 못 하고, 하루가 무섭게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는 대부분 석촌호수였다. 가디건을 목에 두르고 벚꽃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걸었다. 다리가 아파질 때쯤엔 호숫가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까마득한 미래가 이야기의 화제가 된다. "우리 30살 이 무렵에는 뭐 하고 있을까?"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전 세계를 안방처럼 누빌 자신을 그렸다. 내 서른에 성공은 필수 전제였다. 친구에게 호기롭게 말을 건넸다. '그때는 고급 일식집에서 초밥이랑 사케 사줄게.'


 꿈이 반은 이뤄졌다. 다만 폭스바겐 할아버지의 폐차 세레모니가 다음 주에 있을 예정이고, 여러 문제로 사업은 정체기를 보내고 있다. 빚 없는 게 어디냐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어제는 일식집에서 13불짜리 뎀푸라 우동과 해피아워 특별 할인으로 3.9불에 아사히 맥주를 마셨다. 아이폰 7의 출시가 가까워졌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면, 봄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는 것. 다시 긍정적으로 다음 몇 년의 봄을 그린다. 


 올해도 먼발치에서 맞는 봄이다. 이번 봄엔 염원의 석촌호수를 걸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온다. 유튜브에서 케이팝 차트를 찾아 재생한다. 스크린 속 벚꽃을 보며 아쉬운 대로 나의 봄을 즐긴다.







나의 봄 (2018년)



주제를 선정한 분께 죄송한 말이지만 여기는 여름이다. 뭐, 상관없다. 2년 만에 봄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됐다. 몇 달째 더위에 시달리다 이제야 땀 식힌다. 반대 계절을 언급하자니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 토라질 것 같다. 지난 이 년, 나는 유부남이 됐고, 학교를 졸업했으며, 토론 레벨을 올렸다. 예쁜 말로 토론, 거친 말로 말싸움이다. 와이프와 의견 차이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장과 논리의 근거를 상대에게 쏟아붓는다. 격렬한 전투의 끝엔 상대의 똑똑함에 탄복한다. 지지 않은 자신에게도 박수친다. 써먹을 곳 없던 배움이 역할한다. 

와이프는 문화재 전문가로서의 두 번째 해를 맞는다. 그녀와 길을 걸으면, 지나치는 건물의 건축 양식과 건물의 역사를 듣는다. 그 집이 그 집 같아 어느 하나 기억할 수 없다. 나는 팟캐스트를 열심히 청취하며 집에 있는 책들 섭렵하고 하루 몇 번씩 위키피디아 읽고 있다. 잡지식을 바탕으로 블로그에 하나 둘 흔적을 남긴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를 보낸다. 벚꽃엔딩이 다시 차트에 얼굴 내민 이 시점에 다시 외투를 꺼내든다. 그리웠던 외투의 따뜻함과 재회하며 사소한 차이를 음미한다. 인스타그램엔 어김없이 벚꽃 올리는 친구들로 가득할 예정이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상대 없는 싸움에서 홀로 승자가 될 예정이다.


신체 변화가 눈에 띈다. 평생 없던 뱃살이 생겼다. 30년 치 한 번에 받았다. 어린아이가 방방처럼 뛰어놀기에 부족함이 없다. 워낙 많이 나와 잘못하면 이용자가 반동으로 천장을 뚫을지 모른다. 최근엔 흰머리 한 올을 발견했다. 평생 안 볼 것 같은 친구였는데, 뱃살과 함께 불쑥 찾아왔다. 봄바람 몇 번 더 휘날리면 성인병 걸릴지도 모르겠다. 헬스장에 가는 빈도가 조금씩 줄었다. 역기랑 다시 친해질 필요가 있다. 불룩 나온 배처럼 정신도 거만해졌다. 이건 헬스장도 어찌 못 하겠다.


사실 계절은 중요하지 않다. 봄이 어떻고, 가을이 어떻고 하는 말은 인간의 이야기 소재를 찾는 능력의 발현이다. 요즘 시대에, 한국과 호주처럼 발전한 도시에서 온도를 이유로 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잘 산다. 우리는 이야기할 소재가 필요하고, 새 옷 살 이유가 필요하다. 따끈한 국물로 몸을 녹여야 한다는 이유와 빙수로 더운 몸 식혀야 한다는 이유가 필요하다. 얼마 전, 굳이 일 년의 기온을 4개로 나눠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이름 짓는 사람 마음이다. 8개로 나눌 수 있고, 2개로 나눌 수도 있다. 멜번의 경우는 하루에 4계절이 있다. 일교차가 크고, 비와 구름과 해가 정신없이 자리를 바꾼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데, 분위기 파악을 못 한다. 어쨌든 누군가가 추위 뒤에 적당히 따뜻한 때를 '봄'이라 명명했으니, 그의 노력을 봐서 봄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한국에서 새 학기의 시작이 마침 봄이라 봄은 새 출발의 의미가 있다. 예전에는 그런가 보다 했던 것들에 딴죽을 거는 일이 많다. 촘스키와 니체를 위시한 똑똑한 사람들이 쓴 글을 읽으며 꼬인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섰단 착각을 즐긴다. 그간 나는 충분히 꼬여 있지 않았다. 수동적으로 1이면 1이구나 2면 2구나 하며, 누가 만든 세상에 적응해 모두가 공유하는 생각을 수용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밖에서 3월이 더는 봄이 아니고, 새 출발의 계절도 아니다. 봄을 규정한 사람은 어떤 목적이 있었을까 묻는다. 그는 이미 죽었을 테니 내가 대신 답변한다. 4계절이 뚜렷한 곳이 아열대나 열대지방보다 좋다는 식으로 교육받았다. 여러 옷 입을 수 있어 좋다는 장점을 제외하고는 큰 메리트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우리의 리더 그레이트 유에스에이님이 4계절을 규정한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일까? 미제가 최고야. 비슷한 우리도 최고다. 봄과 가을의 없는 실체마저 더 없어 보이는 작금 국뽕 교육의 희생자인 내가 보인다. 

꼬인 눈으로 봄을 노래하고 예찬하는 사람들에게도 한 소리 한다. 우리 합리적 소비자가 됩시다. 4월에 30도 찍는 우리나라에서 봄 찾을 필요가 있나요. 봄이니 새 기분으로 잘 살아 보자며 변화의 계기로 삼는 것은 좋지만, 여러분 곧 포기할 거예요. 굳이 시작할 이유로 쓰지 말고 자기 패턴대로 사세요. 봄맞이 세일에 혹하지 마세요. 신상 얇은 외투는 곧 장롱 행입니다. 반팔만 입을 거예요. 계절의 경계는 이제 모호해요. 봄이라고 들뜨고 가을이라고 쳐질 필요 없어요. 나뭇잎 색에 휘둘릴만한 줏대 없는 멘탈이라면 개조하세요. 이건 다 여러분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아시죠. 저마다 세상 즐기는 방식이 있다. 나는 그냥 꼬인 말 뱉으며 선민의식 느끼고 싶을 뿐이다. 나는 계절을 벗어나는 초월적 지식과 비판적 사고를 가진 우월한 인간이다!라고.


덧붙여 봄이란 주제를 쓰며 감상에 취하지 않는 나 자신에 취한다. 봄이라면 응당 ~해야 한다는 누가 심어둔 당위에서 벗어난다. 여러분 남이 말한 대로 살면 로봇입니다. 남이 여기서 행복해야 하다고 말해서 행복한 것보다 내가 여기서 행복해도 될 것 같다고 믿어서 행복한 게 나아 보인다. 일해라 절해라 해도 나는 일 안 하고 절 안 할 겁니다. 맞춤법을 지키지 않으면 글 쓸 자격이 없다고 말하면 나는 내 인생의 오회말 카드에 틀린 답을 마킹할 것입니다. 


사실 나도 계절을 즐긴다. 누군가가 규정한 것들을 소비한다. 다만 삐딱하게 소비하며 나는 달라, 나는 특별해라고 말하는 것뿐. 계절을 초월할 수 없지만, 초월하지 않은 너희들이 웃기다고 비웃는 고매한 지식인 놀이를 하며 세상을 즐긴다. 앞으로의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비슷하게 이뤄질 것이다. 잡지식이 늘면 더 쎈척하고 무심한척해야지. 


작가의 이전글 놓을 수 없던 학생 할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