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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17. 2018

대화는 나중에 해주세요









 정환은 연극배우다. 아는 사람은 안다. 정환이 국내에서 가장 연기를 잘 하는 배우란 것을. 안타깝게도 그는 날개를 펼 수 없었다. 그가 출연하는 작품 때문이다. 그는 극단 소속으로 극단이 연출한 작품에만 출연했다. 극단의 단장은 연출 일을 겸했는데, 실력이 부족했다. 동료들은 자주 넋두리를 했다. "연기를 선보여야 인정받고 자시고 하지, 관객이 좆도 없어. 정환 선배가 제일 불쌍하지." 그의 능력을 아는 몇몇 연출자나 대형 극장 관계자는 그를 섭외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는 대쪽같이 거절했다. 


정환이 속한 극단은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극단 이름은 체리 극단. 체리 극단의 단장은 가명을 쓴다. 그녀의 활동명은 변체리. 변체리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그것은 자체 제작 연극만 극장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상영한 모든 극은 그녀가 만들었다. 체리는 정환의 부인이다. 정환의 능력을 진작에 알아봤으나, 그가 슈퍼스타가 될 것이 두려워 일부러 형편없는 작품을 연출해왔다. 그가 세상에 나가면 자신을 떠날 것 같았다. 정환의 능력을 알아본 몇몇 매니아 층이 있는데, 그들 덕분에 간간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인터넷을 통해 그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체리는 더욱 정환을 통제했다. 정환에게 오는 섭외 문의는 모두 극단 관계자를 통해야 했는데, 관계자가 체리였다. 


2018년 어느 날, 국내 최고의 영화평론가인 이동준이 지인의 추천으로 체리 극장을 찾았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매표소 직원이 그의 얼굴을 못 알아봤기 때문이다. 200석 규모의 극장의 1/3이 채워진 시점에 극이 시작됐다. 극의 제목은 급행열차 호러대특급. 동준은 조용히 객석 한 구석에 앉았다. 극이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A4용지와 모나미 펜을 꺼냈다. 영화평론가의 커리어를 시작하며 갖게 된 습관이다. A4용지에 극에 관한 분석을 하는 것이다. 분석하는 게 습관이라 영화가 아닌 연극에서도 극을 파악하는데 집중했다. 


동준은 극이 진행될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연출이 엉망이었다. 개연성을 찾아볼 없었고, 특수 효과나 조명의 사용도 엉망이었다. 놀랍도록 극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극이 20분가량 진행됐을 무렵 그는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으로 어찌할 줄 몰랐다. 평소 유순한 성격으로 잘 알려진 그는 극을 추천한 지인이 미워졌다. 가뜩이나 관객이 없는 극장이라 자신의 이탈은 극과 관객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눈치 보다 결국 나가길 포기했다. 대신 칭찬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공간에서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쓸 만했다. 헐거운 연결고리를 어떻게든 연결해주는 게 그들의 연기였다. 극이 30분 정도 지날 무렵 정환이 등장했다. 동준은 숨을 죽였다. 그는 쓸 만한 정도를 넘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무궁화 2호 열차는 정차 없이 질주했다. 기장실 문이 잠겼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승객들은 알 수 없었다. 논리적 연결이 헐거워 관객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수라장에 탐정 K는 사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K와 그의 조수 혁구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수사에 임했다. 그들은 국내 최고의 탐정 사무소 출신의 탐정팀이었다. 셜록과 왓슨을 모티브로 따온 관계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행동도 어느 셜록 시리즈에서 볼 법한 것들이었다. 조수인 혁구는 짐짓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관객들을 통제했고, 용의자를 추려 심문을 시작했다. 따분한 내용이 이어지다 용의자 5로 지목된 지체장애인 김정팔이 무대 위로 나타났다. 


그의 등장으로 극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준은 미묘한 차이를 감지했다. 그의 등장과 더불어 다른 배우들의 표정과 연기에 동요가 보였다. 긍정적인 동요였다. 톤에 한껏 힘이 실렸다. 자신의 지인이 말한 그 지체장애인이 등장했다. 키 캐릭터인 그의 연기는 과장되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 실제 지체장애인이 등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신경질적인 톤의 대사가 튀어나왔다. 완벽한 발성으로 또렷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괴리는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천천히 뱉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의 말을 듣는 귀는 온도를 느꼈다. 극에 설득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물 하나가 모든 극을 바꿔놓았다. 


이후 지체장애인 김정팔의 독무대였다. 그의 출연 분량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매 등장마다 극에 힘이 실렸다. 부족한 개연성과 연출을 표정과 대사로 메워나갔다. 극이 종반으로 향하자 동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무대 위로 밀고, 모든 이목을 그의 연기에 집중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더불어 좋아졌다. 김정팔로 생긴 적절한 긴장감이 극의 흐름을 이끌었다. 김정팔이 자신의 비밀이 폭로되자 폭주해서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관객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외침은 귀를 뚫을 것처럼 날카롭고 차갑게 울렸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동준은 입을 벌리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자신 인생에 이 정도 배우는 본 적이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기를 잘한다는 이헌병, 최식민, 하우정 등과 놓고 봐도 밀리지 않는 압도적인 연기였다. 고요한 객석은 김정팔이 사라진 공간에 먹혀버렸다. 탐정 K의 대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숨 막히는 긴장이 이어졌다. 탐정 K와 그의 조수 혁구의 열연으로 극은 끝이 났다. 


동준은 극이 끝나고 자리에 앉아 연극을 곱씹었다.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중 김정팔 역할을 한 정환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대중에게 완성도 있는 영화를 추천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는 비평가로서의 사명이 출중한 동준이다. 정팔의 등장은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한국 영화계에 충격을 주리라 확신했다. 극을 완벽히 이해하고 군림하는 그의 연기는 원맨으로 이어가는 일인 주연극에 제격일 것이다. 배우 대기실에 들어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블로그에 그의 연기를 다룬 글을 올렸다. 극찬과 함께. 




그의 방문과 더불어 관객수가 늘어갔다. 머지않아 극단 사람들은 이동준이 자신들의 연극을 보러 왔음을 알게 됐다. 블로그에 글이 올라간 지 한 달이 지나자 극장은 만석을 채웠다. 체리는 관객의 절반이 그 소문의 김정팔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임을 알았다. 체리는 만석이 된 객석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다음 날 단원들을 소집해서 극단 해체를 알렸다. 




 변체리와 정환은 그 후에 캐나다 벤쿠버로 떠났다. 변체리의 부모와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사는 곳이었다. 영주권자인 변체리와 그의 남편 정환은 새로운 보금자리에 정착했다. 정환은 성인이 된 이후로 연기만을 해왔는데, 연기에 실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와이프가 그로 인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둘은 20살 예술 대학에서 처음 만나 연을 이어왔다. 하나의 잎을 공유하는 두 덩어리의 체리같았다. 체리의 아버지에게 원조를 받으며 둘은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 사이 역설적으로 정환의 이름은 본격적으로 대중과 평론가, 영화계 유명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 극단 동료들이 체리의 횡포를 폭로하며 정환의 아까운 재능을 이야깃거리로 실어 날랐다. 폐쇄적인 체리 극단에서 나와 여러 극단과 영화계로 퍼진 그들은 정환의 전설적인 연기력을 예찬했다. 체리는 바다 넘어 정환에 향하는 모든 연락을 차단했다. 정환은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그 정도로 유명해진 줄 몰랐다. 둘은 체리 아버지의 원조로 평생을 살았다. 그가 죽은 이후론 유산을 연금 형태로 바꿔 매달 수령하며 살았다. 정환은 낮에는 체리와 함께 비둘기 모이 주며 공원 산책을 했고, 저녁에는 캐나다 방송을 보며 살다 죽었다. 죽을 때 정환은 행복했다. 체리는 불행했다.

작가의 이전글 정영진 씨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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