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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09. 2018

프란츠 카프카 - 변신

내 마음대로 책 리뷰





변신은 다음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다. 중단편 분량으로, 독서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량과 감상 후 드는 생각의 길이는 비례하지 않는다. 소화에 다른 장편보다 많은 시간을 요한다. 글로 정리하기 위해 생각을 정지해놨다. 이번에도 다른 리뷰나 독후감을 읽지 않고 내 생각을 먼저 정리해볼까 한다. 남의 글을 먼저 읽으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타인의 주장을 내 것처럼 포장할 가능성도 있다. 다 쓴 후에 다른 비평과 비교할 예정이다. 

줄거리
그레고르는 노쇠한 부모님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맡고 있다. 어느 날 잠이 깼을 때, 그는 벌레였다. 출근하지 않은 그를 보러 온 지배인과 가족들은 그에게 생긴 변화를 알게 된다. 벌레가 된 그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 변화, 가족 역할의 변화, 그레고르의 심리 변화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변신은 그가 죽고 난 후 새 출발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며 끝난다. 


구성원
보수적, 가부장적인 그의 아버지, 음악에 꿈이 있는 누이동생,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어머니. 아버지는 그레고르의 수익이 가족을 부양하기 충분해 일찍 은퇴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집에서 입지가 좁다. 경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집에서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정이 많아 가족들, 특히 오빠 그레고르를 잘 챙긴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사려 깊다. 자식에 의존한다. 

가족 태도 변화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첫날 아침을 제외하곤 말을 할 수 없다. 언젠가 그가 원래 몸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과 가족의 당위를 근거로 가족은 벌레인 그와 동거한다. 동생은 그가 머무는 방에 식사를 제공하거나 청소를 한다. 부모님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싫지만, 동생의 행동을 묵인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나 벌레로 변한 그를 볼 자신이 없다. 아버지의 태도는 분노로 축약할 수 있다. 다른 가족들을 힘들게 만든 그의 자식이 밉다.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경제 활동도 못 하고, 집 공간만 축내며, 가족들 귀찮게 만드는 짐이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생각이 강해진다. 반면 그레고르의 정신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다. 사고는 그대로 하지만, 행동엔 제약이 따른다. 벌레가 된 후에도 자신의 생각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요구한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큰 부상을 입고도 가족을 증오하거나 해치지 않는다. 그들의 무관심과 분노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마지막엔 그의 존재를 거의 잊는다. 그가 머무는 방은 창고가 된다. 그레고르는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방에서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 들어 살게 된 3명의 청년들은 그레고르 동생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한다.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연주에 흥미를 잃고 딴짓을 한다. 동생의 열정과 예술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 그들이 못마땅한 그레고르는 병든 몸을 이끌고 거실로 향한다. '자신은 응원한다. 너를 알아봐 주는 내 앞에서 연주해.'라는 말을 그녀 뒤에 서는 걸로 대신한다. 벌레의 존재를 몰랐던 청년들은 소란을 떨고 집을 나간다. 가족은 수입원을 망친 그레고르에게 분노한다. 무관심 속에 그레고르는 숨을 거둔다. 가족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기차를 타고 집을 나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난다. 


실존주의
 인간은 실존하는 존재다. 목적이 뚜렷한 사물과 차별되는 점이다. 그러면 인간의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영혼과 육체를 구분 짓는다. 그레고르는 육체를 잃었지만, 영혼을 갖고 있다. 그레고르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보면 처음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중간이었다. 그 후엔 쓸모없는 인간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존중한다. 그에게 그는 껍데기가 벌레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중할 실존하는 존재다. 

가족의 의미
3세기 전, 산업화가 시작되며 자식은 생산 수단의 위치를 벗어났다. 그전까지 아동이란 개념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가족의 역할이나 모성애도 학습되어 변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모두 문화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게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모성애나 가족애 따위는 나라가 대중을 통제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미래의 산업 역군이 문제없이 자라려면 그들의 부모의 지원이 필요하다. 문학, 예술, 정치란 채널을 통해 대중을 세뇌시킨다. 조선시대만 해도 서자, 혹은 노비와 사이에서 놓은 자식은 노예로 취급받았다. 순혈주의가 중요한 시절엔 노비나 양민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은 가치가 없었다. 결국 근대 가족 개념은 교육을 통해 주입당한 것이다. 모두 경제적인 방식으로 커온 셈이다. 가족 구성원이 경제적으로 메리트가 없다면 버려도 되는 세상이었다.(고려장, 장애 자식 유기) 육체가 없어진 것을 방패로 쓸모가 없는 그레고르가 자신들의 가족임을 부정한다. 그레고르의 흉측한 외형은 관습을 무시할 수단이 된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이기심의 발현이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의 지탄을 피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기심을 드러낸다. 


그레고르가 보여준 것
 그레고르는 유일한 인물(혹은 존재)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존중하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았기에 타인의 존엄을 챙길 수 있다. 동생의 자아실현, 꿈을 위해 다소 무리를 해서 그녀를 음악 학교에 보내려 했다.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족으로, (정신적) 인간으로서 그녀를 아끼고 응원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부조리에 저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항한 것이다. 그레고르는 육체의 장애를 뛰어넘어 그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실천한다. 사과 박히고 마른 몸을 이끌고 먼지를 질질 끌며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벌레는 존엄을 향한 인간의 발걸음이 아닐까

벌레로 변한 이유
책 어디에서 벌레로 변한 이유가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삶을 생각했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왜 많은 고민과 노동, 배움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더 이유가 필요한가? 이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그레고르는 그날 아침, 그냥 벌레가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어쩌면 그것과 상관없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 단지 살아갈 뿐이다. 이유가 없다는 게 이유다. 


쓸모
사람은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다. 그레고르의 동생이 특히 그렇다. 가족에서 특별히 맡은 게 없다. 경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집안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으로 나서서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녀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이 존재하길 바란다. 그런 역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에게 밥을 주고, 그의 방을 청소할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그레고르 전담 노동을 통해 쓸모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믿는다. 가정은 작은 사회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중엔 경제 활동을 통해 가정에 보탬을 준다. 그러면서 그레고르 전담 노동에서 손을 뗀다. 그것 외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쓸모는 꼭 타인을 통해 규정 받는 것인가? 쓸모라는 단어는 대상화를 드러낸다. 그 자체로 귀한 인간이고 싶다면, 쓸모의 유무를 구분 짓는 부조리를 깨닫고 저항해야 한다. 아버지가 집에서도 제복을 입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은 아직 쓸모 있다며 소리 없이 외치는 것이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의 쓸모에서 벗어났다. 벌레가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엔 정체 모를 타의로 벌레가 됐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났기에 주제 의식이 강해졌다.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을 키워드를 통해 풀었다. 이 글은 순수하게 나의 이성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글을 쓰기 전에도 카프카의 생애와 이 책이 실존주의 문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물음에 사로잡혔다. 

최고의 작가란 칭호가 뿜는 아우라가 없었다면 이렇게 깊이 생각했을까? 

나는 카프카가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명이며, 실존주의 문학의 거두고, 변신이 그의 저작 중 대표임을 알았다. 만약 그런 사실을 배제하고 이 책을 읽었다면 같은 해석이 나왔을까? 그렇지 않다. 후광에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후광이 더한 작품이 그 시대의 작품인지 모른다. 후광까지 인식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는 의견. 그렇다면 없는 후광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역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사는 역사가가 중요하게 여겨야만 후대에 전해진다.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다. 문학 역시 비평가의 간택을 받아야만 후대로 전해진다. 나는 죽어가는 무수한 책들 사이에 누군가가 선별한 수 천, 수만 분의 1을 제공받는다. 선별할 능력이 없다는 게 아쉽다. 언젠가 발굴하는 입장이 되길 바란다. 

결국 나는 실존주의에 근거해 중심 내용을 해석했다. 이제 내 해석과 주류 해석을 비교해 볼 시간이다. 나의 해석과 정리가 선행되어야 권위자의 생각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내가 놓친 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다. 뭔가 아쉬우니 조금 더 분석을 해볼까? 

셋방살이 3인방
집의 왕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객인 그들은 주인처럼 군다. 돈에 쪼들리는 그레고르 가족에게 돈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은 그레고르의 존재를 철저히 숨긴다. 벌레와 동거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그 사실이 발각된다. 그들은 가족의 전기를 나타내는 소재다. 그들을 내쫓으며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회복한다. 가족의 결속력을 더하고, 진취적으로 살 것을 천명하는 계기다. 새로운 희망 (그들이 그레고르 없이도 생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레고르의 가족 누구가 아닌 그들 자신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쓸모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타 지역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레고르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제 객체-> 주체가 되는 변화를 나타냄.

이 정도가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분석이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못 하지만, 책을 다시 읽고 더 생각한다 해도 결과물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책을 이해하는 것엔 옳고 그름이 없다. 내가 이렇게 느꼈다면 맞는 것이다.-라는 말은 차치한다. 나는 문학의 주류 상징체계와 해석 방식에 가까이 가고 싶다. 그 간극이 좁으면 좁을수록 만족감을 더할 것이다. 이 글은 얼마나 주류 해석과 나의 해석이 맞닿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다는 말도 통한다. 내게 독후감의 의미는 작품이라는 숨은 그림 찾기에서 얼마나 많은 숨은 그림을 찾느냐에 달렸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나, 내 이해가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이들의 것과 비슷하길 바란다. 그게 현재의 독서 지향점이다. 언젠가 그들을 뛰어넘는 분석을 원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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