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분노하자 우리 모두 일베다' 칼럼 비평

by 띤떵훈

- 근래에 봤던 비평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이다. 생각치 못 한 관점에서 현상을 조망했고, 우리가 만들어놓은 선만을 인정하며 범주 밖의 존재에게 배타적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비평은 우리가 보지 못 한 곳을 보고, 사유와 배경의 부족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용을 명확하게 꺼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오영훈의 칼럼은 훌륭했다.




[오영훈의 문화 시론] 그만 분노하자 우리 모두 일베다

오영훈(문화 칼럼니스트)


-우린 모두 일베다라는 강렬한 제목으로 시작한다. 비평글의 특성인지, 비평가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다수의 비평가가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거기에 낚여서 글을 보는 나같은 독자가 있으니 이런 제목 짓기는 계속 되리라.


우리 사회가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지난 2015년 초에 나와 주목을 받았다. 가만 보면 일반인·평론가를 가리지 않고 사회문제를 논할 때 분노가 꽤나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분노는 힘이 넘치지만 한쪽으로 쏠린 용광로와 같다. 너무 뜨거워 균형감각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분노는 문제의 핵심을 특정 인물, 인물을 둘러싼 조직, 당파, 경향성에게로 돌린다. 분노를 통할 때 우린 나 아닌 누군가에게 쉽게 책임을 돌린다. 나는 안 그런데 ‘저기’엔 비상식적인 사람들만 있다는 생각이다. 분노는 내 자신과 나의 주변을 마른 정신으로 성찰하는 폭넓은 시선을 가로막는다.


- 분노 조절에 약한 우리 사회. 요즘 분노에 촛점을 맞춘 비평글이나 에세이가 많이 눈에 띈다. 분노의 특성은 책임전가와 성찰 방해. 요즘은 분노의 사회, 나아가 혐오의 사회이기도 하다. 이번 강남역 사건을 도화선으로 해서, 남성 혐오,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졌다. 그에 맞춘 주제인 듯 하다. 다만 쉽게 분노하는 사회가 아닌 분노할 것이 많은 사회가 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부분은 작가와 궤를 달리한다. 인터넷 자료의 범람, 스마트폰 대중화가 기여한 작품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분노가 만연한 사회라는 것은 서로 동의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분노의 대상이 일상적으로 인터넷에 모습을 드러내다보니, 분노 표현 역시 일상적인 것이 됐을지 모른다. 결국 반복된 분노가 쉬운 분노를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서는 이해력·공감력이 설 자리가 적다.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대상으로 쉽게 낙인찍는다. 그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게 용납되기 때문이다. ‘내 분노는 그의 분노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용인된 분노’야말로 2010년대 우리 사회의 아이콘이다. 이 분노는 특히 민주주의·다양성의 적, 대표적으로 ‘일베’에게 향해있다. 그래서 나는 분노를 용인하고 부추겨 온 이상한 가치, 민주주의와 다양성이라는 성역을 공격해볼 요량이다.


- 여기서 인상적인 표현이 나왔다. 어찌보면 이 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 '용인된 분노'. 일베를 향한 분노만은 대중이 용인하고 있다. 오히려 부추기고, 공격성을 띈 댓글이나 표현에 칭찬하고 격려한다. 글의 주제인 민주주의와 다양성이란 성역에 대한 비평.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권력계층, 기성사회, 사회의 통념에 시원한 일갈을 날리는 아웃사이더를 보면 속이 시원하다.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옳음은 없기 때문에, 사회의 가치에 침식될 쯤, 그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존재가 고마운 탓이다.


어디에나 있는 일베


지난 5월 31일, 홍익대 조소과 학생이 일베를 상징하는 손 모양 조형물을 제작·전시했다가 전시 하루 만에 일반인 3명에 의해 파괴된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조소과 4학년 홍기하 작가의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 제작 의도를 ‘사회에 만연하게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베라는 것을 실체로 보여줌으로써 이것에 대한 논란과 논쟁이 벌이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홍 작가는 “저의 작품을 통해 … 예술의 정의와 범위가 무엇인지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건강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작품을 훼손하는 행위도 일베가 하는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고도 덧붙였다.


- 홍대 학생의 작품을 두고 벌어진 사건의 개요


이에 흥미로운 논쟁이 오갔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는 아래 인용한 한 네티즌의 댓글이 아닌가 한다. <오마이뉴스> 기사(16.6.1)에 대한 댓글 중에 가장 투표를 많이 얻은 비판론이다.


서울시청 앞에 욱일기를 달고, 예루살렘에 나치 상징물 설치하고, 워싱턴에 KKK단 상징물 세우는 것들이 표현의 자유로 인정될까요? 자식 잃은 부모들 앞에서 낄낄대고 조롱하며 폭식이벤트나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여성이 희생을 당해도 비아냥대는 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죠. 일베의 배후에 무엇이 있기에 이리도 건재할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일단 이 비판은 작가의 의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게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일반에 잘 이해되지 않은 듯하다. 작가는 일베에 찬동하려는 게 아니라 일베담론을 공론화하려고 했다. 예술을 사회와 무관하게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 수단으로 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함을 불러일으키려는 것도 작가의 목적은 아니었다.


- 작가의 의도를 오도한 네티즌과 거기에 동의하는 많은 네티즌. 의도는 일베 담론을 공론화하기 위함이며, 거기에서 표현의 자유의 월권은 없었다. 옹호하는 것이 아님.


한편 논쟁 사이에는 작품 훼손을 비판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 역시 헛다리를 짚었다. 작가는 작품훼손까지도 작품설계 시 염두에 둔 듯하다. 때문에 작품훼손이 작가의 의도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즉 작품을 사회문제 참가의 수단으로, 일베를 꺼내 놓고 얘기해보자는 기폭제로 의도했고 적어도 이는 얼마쯤 성공했다.


나는 일베를 공론화하자는 작가의 의도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나는 일베를 잘 모른다.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그들의 ‘못된 짓’만 알 뿐 도대체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어떻게 생성된 운동인지 알지 못한다. 알고 싶고 대화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 지인들 중에도 분명 열성파가 있을 거라 믿는다.


- 작품을 통해 일베에 대한 관심 증대. 그들이 벌여온 자극적인 악행만이 아닌, 행동의 이유와 발단을 알고 싶게 만듬.


작가의 작품 행위를 통해 수면 위로 오른 건 일베가 아니라 반일베 정서다. 그 정서는 일베가 깔아뭉개 온 다양성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지만 방식은 폭력적이었고 분노라는 습관을 강화시켰다. 중요한 건 일베/반일베 양쪽 모두가 폭력성을 띈다는 것이다. 거기엔 찰나지만 벼락같은 분노(‘이미 인간이 아니죠’=폭력의 용인)가 여기 저기 녹아들어 있다. 작가의 의도완 무관하게 작품활동이 폭력을 불러일으켰고 갈등을 부추겼다면 이건 위험한 훈련이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위험한 일을 벌였다. 만일 작가가 일베를 공론화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폭력을 줄이길 원했다면 이건 실패작이다. 일베/반일베 사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 저 무대와 관객을 가리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는 한바탕 소동 속에서 ‘어디에나 있는’ 일베의 모습을 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회적 파장이 작가에게 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작가는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이게 그가 알고 싶었던 21세기 한국사회의 예술의 의미다.


-내가 앞서 말한 분노의 습관화가 나왔다. 쉽게 분노하는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의도는 추측한 대로였다. 작품의 궁극적 의의가 폭력의 점진적 소거였다면 이는 실패이다. 오히려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결국 일베나 반일베나 폭력에 잠식된 이들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용인하고, 사용하며, 소수자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는 행위가 양측에 똑같이 있다. 자신이 주류에 속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됐다.


같은 이유로 소수의 권익을 존중한다 하여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불편하다. 민주주의(기회의 평등)와 다양성(다름의 용인)의 추구는 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폭력을 용인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민주주의와 다양성은 본래 우리에게 이질적인 가치다. 전통적 유교질서 아래 우리 사회는 장유유서와 조화를 개인주의식 평등주의와 다양성보다 우위에 두었고 지금도 전반적으로 그래 보인다. 작은 예로 우리는 모두 해마다 ‘함께’ ‘자란다‘고 믿는다. 남녀노소 모두 동일한 인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는 서구식 개인 개념은 우리 사회에 이질적이고 한 번도 실천된 적이 없다. 우리 전통과 서양 전통 사이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아 나가는 게 갈등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서양을 닮아가려는 열망을 반대할 까닭은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민주적이라기보다는 위계적인지, 다양성보다는 조화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 작가의 시선: 민주주의와 다양성 추구는 위험하다. 왜? 상호이해를 위한 노력이 없고 폭력을 용인하기 때문. 폭력 또한 용인될 대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유교사상과 충돌하기 때문. 서로 상충하는 가치이다. 위계적이며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도 인정해야만 갈등을 줄일 수 있다.

- 다만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양성과 조화를 반대의 개념으로 놨기 때문인데, 다양성을 추구하는 근본적 이유는 조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남녀노소 동일한 인간 가치가 있다는 서구식 개념이 한 번도 실천된 적 없다는 점도 문제가 있다. 근대 이후 교육을 통해, 이런 개념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가 됐고, 매일, 매 순간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지나친' 다양성의 추구는 조화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의 사례에서 소피스트들은 저마다 다른 사상을 들고 나왔고, 이에 사회가 혼탁해졌다. 그 때 '이데아'라는 절대 진리가 있다며 등장한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세상에 혼란이 잠잠해졌다. 그러고 보면, 다양성의 추구가 항상 조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다양성의 추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조화를 위한 다양성 추구를 만들어야 한다. 오영훈은 그것은 유교사상과의 가치중립적 태도라고 봤다.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치즘을, 파시스트를, IS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 집단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한 <오마이뉴스>의 기사(‘홍대 앞 일베 조형물 작가는 ‘성공’했다‘ 16.6.1)에도 불편한 마음이 든다. 나치즘·파시즘·일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 IS를 극단적인 폭력이라고 규정할 때 서구제국주의라는 더 큰 힘과 폭력의 역사·현실 앞엔 눈을 가린다. 이렇게 누군가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역사인식은 잘잘못을 따져 쏟아 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노를 용인한다. 그 이분법엔 ’우리‘가 있어 선을 규정한다. 이건 변명할 여지없는 다양성의 모순이다. ’다른 건 다 돼도 일베는 허용할 수 없다‘는 다양성은 사회를 아우르지 못하고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파시스트와 꼬리물기를 반복할 뿐이다. 우리 사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교과서적 이상의 숭배다.


- 오마이 뉴스 기자는 나와 같은 맥락에서 올바른 다양성 추구를 말했다. 오영훈은 여기서 다른 시선으로 본다. 나치, 파시즘, 일제는 패전국이고, ISIS는 패배가 자명한 상대적 약자이다. 서구제국주의라는 더 큰 힘과 폭력을 인지하지 못 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선과 악을 나누며, 승리자는 같은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사회에 용인되며 '선'이 된다. 이분법과 다양성은 모순되는 개념이다. 오영훈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이분법적인 사고가 무의식에 산재해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다양성에 대한 열망이 분노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수자에게 맘껏 멸시를 퍼붓는 일베는 다양성의 적이 아니라 조화를 외면한 다양성·민주주의의 극한이다. 홍 작가에 동의한다. 일베는 어디에나 있다. 내게 감춰진 파시스트적 일베의 본성을 인정하는 게 분노를 다스리는 출발점이다.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부르짖기 전에 그를 추구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자.


-결론은 조화를 외면한 다양성, 민주주의 추구를 멈추고,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다.란 것이다. 정리하면,

파시스트적 일베의 본성은 인정하기 = 분노 다스리는 첫걸음 = 전통 유교 사상과 서구 사상의 접목의 한 장면 인데, 사실 분석에 아쉬운 점은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 전통 유교 사상을 차용하는 것과 동일하게 본다는 점이다. 인정은 그냥 인정일뿐, 유교적인 내용을 굳이 끌어올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편 가르기, 선과 악 나누기, 악에게 행하는 폭력을 용인하기'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유익한 글로, 세상을 보는 시선이 진일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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