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 조형물, 이후에 대한 소고 비평

by 띤떵훈

-브런치에서 '비평' 이란 검색어로 찾은 글이다. '길수컷'이란 작가의 글로 통찰과 분석이 나쁘지 않다. 그의 첫 투고라 다른 글은 찾을 수 없었다. 전공자나, 실력 있는 아마추어로 예상한다. 다각도로 사건을 보려는 시도를 거듭하다보면, 더 완성도 높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부족한 부분도 많은 글이었는데, 문단 하나하나 정리하고, 코멘트를 해볼까 한다.



상징물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의 분노 아닌 짜증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후에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려 반문할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이후 사람들은 각자의 습으로 돌아가 같은 허물을 반복할 것이다. 사실, 나의 이어지는 무딘 비판이 효용이 없으리란 것은 잘 알고 있다. 발언의 시작은 모종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내 자신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일게다. 그럼에도 발언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 모멸이지 싶다. 내 안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게워내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마칠 때 쯤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라며 운을 떼본다. 상징물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의 분노 아닌 짜증은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후에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려 반문할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이후 사람들은 각자의 습으로 돌아가 같은 허물을 반복할 것이다. 사실, 나의 이어지는 무딘 비판이 효용이 없으리란 것은 잘 알고 있다. 발언의 시작은 모종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내 자신의 모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는 것은 무척 부끄러운 일일게다. 그럼에도 발언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 모멸이지 싶다. 내 안의 모순을 조금이라도 게워내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마칠 때 쯤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라며 운을 떼본다.


- 일베 조형물 파괴로 본 일상적인 대중의 분노. 특징은 쉽게 점화되고 쉽게 꺼진다는 것. / 글을 쓰는 의의도 언급했다. 아무래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분노와 혐오의 대중화, 습관화가 많은 비평가가 짚는 구조의 문제이다. 어떻게 분노가 상황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글의 핵심이 될 듯 싶다. 그의 문장을 미뤄볼 때, 구성을 대략적으로 해놓고 글을 전개하는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방식인데,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완결 짓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최근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드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반대로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글도 아마 그에 해당하겠지만, 나름 균형을 추구하며, 양자 모두에 전달될 수 있도록 애썼다.

왜 부서져야 했을까? 먼저, 이 질문은 해당 작품의 공공 적절성 여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더욱이 예술가 한 개인의 의도를 시비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향간의 그러한 류의 비판은 실로 저급하다고 본다. 조금 비약하자면, 이런 식의 비판(난)은 반성을 유보시킨다. 이는 강남역 살인 사건과 관련해 ‘Misogyny(여성 혐오 혹은 대상화로 번역)로 볼 것이냐, 정신질환으로 볼 것이냐’, 또는 구의역 사건(사고와는 구별된다. 언론은 수정해야 한다.)에서의 ‘시스템의 문제냐 안전 불감증이냐’ 로도 전치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처럼 구조가 아닌, 개인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정지 혹은 퇴보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프레임 상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 왜? 라는 질문이 모든 비평의 시작이다. 작가는 글 전반에 걸쳐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답을 구한다. 내가 좋아하는 비평가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사람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제대로 된 비평은 왜?로 시작해서 왜?로 끝나야 한다. '왜'가 많아야 생각이 더 깊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 거시적 관점에서 사건을 조망해야 한다는 의견. 왜?의 답을 시스템에서 찾아야 함. 썰전의 패널도, 앞서 비평한 문화비평가들도 같은 병명을 진단했다. 진단에 대한 과정이 얼마나 세밀하고 정확한지가 핵심이다.


이 글을 읽는 어떤이는 개별 사건과 사회 구조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또 어떤이는 다른 세가지 사건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지, 반문할 수 도 있다. 부족하나마 설명을 이어 나가면 이렇다. 구조-무의식은 일상이란 지층 아래서 항상 꿀렁대고 있는 무언가를 말하는데, 평소에는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가, 지층을 때리는 사건에 의해 표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지층 아래에 박혀있던 가시는 일상의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거의 모든 가시화된 문제(폭력)들은 이런 방식을 경유해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구조-무의식은 드러난 사건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 숨겨진 비밀이라 할 수 있다.


- 대부분의 문화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유기적이며,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찾으려고 한다.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사건을 통해 순간적으로 구조를 엿 볼 수 있다는 게 작가의 생각. 발터 벤야민의 도시 분석과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 갈등은 대부분 은폐되어 있고,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문제는 파편의 목격 (사건을 목격)을 시작으로, 분석을 통한 더 깊고 완전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세 사건은 어떻게 한 데 묶을 수 있을까? 세 사건 모두, 우리 사회내 드러나지 않았던 병폐의 분출, 즉 일종의 사회-증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누구는 이를 폭탄에 비유하는데,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들 사건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사회 기저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오래 묵힌 상처처럼 작용하고 있다. 치유하지 않으면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재발하게 될 것이다.(외면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거나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부족한 기술이지만, 강남역 사건과 구의역 사건에 대한 프레임이 왜 구조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 뇌관이 터진다고 했던 최강민과 비슷한 비유. 사회 구조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 모든 사건은 다른 듯 하지만, 공통점이 있고, 그것은 사회 구조에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반복될 것임을 말함.


그렇다면 일베 조형물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다룰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나는 먼저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이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되돌아 보려 했다. 모든 사건은 내면의 거울로 삼기 충분하다. 그렇기에 작가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관찰한 사람들 대부분은 일베 조형물에 대해 강한 불쾌를 드러냈다. 조형물을 향해 계란을 던졌고, 비방 포스트잇을 부착했다. 언론은 주변에 상주하며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고, 결국 설치 이틀 만에 조각은 파괴되었다. 주동자는 자신의 행위가 익명의 광기로 해석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며 떳떳한 ‘범법자’이길 자처했다. (이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다.-아래 계속.) 이 상징물이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사람들을 이토록 흥분시킨 것일까.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많은 사례를 종합하진 못했지만,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과 SNS 게시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학교 구성원으로써, 자의와 상관없이 주어진 불명예에 수치스러워 했고, 공공에 불쾌감을 주는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도덕성을 비난했다. 함께, 설치 및 장소 선정의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더불어 표현의 자유 논란은 이번에도 역시 빠지지 않았다. 난 이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찾고 싶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또다른 혐오였다.


- 일베 조형물을 같은 시선(큰 그림으로)에서 봐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함.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반일베의 혐오와 폭력은 떳떳함을 수반.


혐오의 대상은 대개 시야 밖에 존재하는데, 혐오의 대상이 표층으로 드러나면 제거해야할 적으로 상정된다. 혐오로 접근하기 위해, 나는 여기서 ‘더러움’ 개념을 설명한 문화 인류학자 더글러스의 시선을 참고하기로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더러움’ 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 이다. 밥알이 입 안이나 밥 그릇에 있으면 괜찮지만, 식탁이나 옷에 묻으면 ‘지저분한-더러운’ 대상으로 느껴지는 게 그 예이다


- 더러움=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려함


이 '더러움' 은 '두려움' 과도 밀접한 지점을 갖는데, 제자리에서 벗어난 대상이 자신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어야 할 강력범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충분히 두렵게 만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들려서는 안될, 소리의 원인이 주변에 있지 않은 소리는 우리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을 제거, 격리함으로써 안정을 되찾으려 한다. 이처럼 혐오는 자신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발현되는데, 이런 혐오의 예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그득한데, 사실 이 혐오는 두려움에 기반한다.-아래 다시) 다시 말해, 혐오를 억압한다는 것은, 사실 그 대상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IS의 테러도 서구연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란 말은 사실 같은 감정을 은폐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 더러움은 두려움을 수반함.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없애고자 하며, 여기서 혐오는 방어기제이다. / 혐오의 대상에게 가한 폭력은 두려움의 반증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모든 현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움이 항상 두려움을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저분한 파리나 문방구 앞 불량식품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물론 위의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못하지만, 이를 종합해, 소박한 나의 관점으로 혐오를 도식화 해본다면, 혐오의 감정은 결국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대상을 향한다. 다시 말해, 낯선-두려운 대상, 우리의 ‘정상 질서’를 뒤흔드는 대상이 혐오를 덮어쓰게 된다는 말인데, 이 때 우리는 이질적인 혐오의 대상을 우리와 분리시켜 놓으려는 충동을 경험하게 되며, 이를 실천으로 옮겨 격리시킨 장소가 감옥, 정신병자 수용소, (병원, 군대) 이었다는 식의 인상 설정도 가능해 보인다. (이런 식의 접근은 ‘소수자 혐오’, ‘인디언 거주 구역’등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다.)


- 반례 가능성이 있음을 시인. 제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언제나 혐오를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혐오의 타겟은 비정상(낯섬, 두려움). 우리가 가진 정상이란 기준을 흔드는 이에게 혐오를 보낸다. 격리하려는 욕구가 생긴다./ 혐오의 대상을 격리하고 차별하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유태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격리하고 제거하려는 나치의 모습이 그 예이다. 많은 철학 담론이 오갔던 철학자의 나라인 독일에서, 그것도 불과 한 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거친 접근이라 따져봐야할 지점들이 아주 많겠지만, 상기의 논의들을 프레임 삼아, 이번 사건을 해석해 본다면. ‘일베’는 우리의 면역을 강하게 발동시키는, 표층으로 드러나선 안되는 집단이었고, 이를 가시화한 상징-조형물은 ‘있지 말아야 할 곳' 에 있는 ‘있어선 안될’ 대상이었기에, 다중의 혐오를 불러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각을 파괴시킨 주동자는 스스로 ‘정상 질서’를 회복한 인물로써 당당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 해볼 수 있다.(사실, 주동자(랩퍼 성큰)는 '정상성' 개념을 이용해 자기 실리를 챙긴 케이스로, 포퓰리즘 영합으로 봐야 한다.)


- 정상성은 대중이 공유하는 개념이지만, 전체가 공유하지는 않음. 포퓰리즘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차별과 폭력, 불평등을 조장한다. 조형물을 파괴한 랩퍼 성큰은 이런 배경에서 폭력과 혐오를 떳떳해한다. (여담인데 어떤 노래를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유튜브에 찾아봤다. 자기가 자기 페이지를 만들고 랩을 업로드했다. 조형물 부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랩은 못 한다.)


그렇다면 이를 표현의 자유 논란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정상성’ 이란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접하는 지점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정상성'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이 논쟁의 핵심에 위치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는 주장은 그 동안 귀가 따갑도록 들은 경구 중 하나이다. 이는 우리에게 제한된 자유만이 주어 졌음을 시사하는데, ‘정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는 얼마든지 보장되지만, 이를 벗어나게 될 경우에는 격리 될 각오를 하라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협박으로도 읽힐 수 있다. 선택의 자유는 있지만,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그 자유를 행사 할 수 있다. (사회적 금기를 추적하다 보면 '정상성’ 의 지평 절벽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정상성’은 일련의 드러난 사건들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며, 각 사건은 '(지배적인 권력의) 정상성’에 대한 충성도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지로 활용된다. (이런 식의 금기의 대표로, 종북 프레임-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다.'- 이 있으며,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사회적 광기로 읽히는 파시즘, 혹은 매카시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정치적 수사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는 페미니즘 담론에서 조차도..


- 정상성(기득권)에 반하는 주장엔 리스크가 따른다. 그가 생각하는 정상성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선택적 자유에 범주 밖에선 배척되거나 폭력을 당할 위험이 있음. 일리 있는 말임. 이데올로기에 충성하고 따르는 이들은 올바른 사람이고 반하는 이들은 올바르지 못 한 이가 됨. 다만, 옳고 그름이 절대적일 수 없음. 이 맹점을 사건을 통해 사유해야 함.


관용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논란은 '타자에 대한 존중' 과 '(우리쪽의) 표현의 자유' 로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사실 이들간의 소모적 논쟁은 모종의 연극으로 볼 수 있다. 대결의 양자는 서로를 기준 삼아, 각자의 입지를 굳건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는 양자간의 은밀한 공모가 숨어 있는데,무제한적인 관용의 한계와 대면할 때, 대결 구도는 극으로 치닫는다.여기에는 양자가 서로에 느끼는 두려움이 바탕한다.(혐오를 혐오한다는 식)대개의 이러한 논쟁은 한쪽에 대한 정죄로 종결된다. 다시 말해, 각자의 '정상성' 의 침해에 대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그렇다면 신념을 위한 투쟁은 당연한 수순일까? 여기에서 근본주의와 유사-근본주의의 차이가 드러난다. 흔히, 근본주의를 말할 때, 광신도를 떠올리는데, 사실 이들은 유사-근본주의자들이다. 티벳 불교의 근본주의자나, 프란치스코 교황과 같은 이들은 타 종교에 대해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지켜나간다. 그들에겐 자신들을 향하는 혐오조차도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국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는 유사 근본주의에 속한다.


- 근본주의와 유사근본주의의 차이. / 이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근본주의와 유사근본주의를 나눈 기준도 애매하고, 근본주의는 타자에게 분노나 혐오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주장도 논거가 빈약하다. 정리하면 근본주의 자체가 정치권력이나 사회 이념과 어긋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유사품, 진품을 나눌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교조주의-원리주의-민족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역사 속에서 이념을 지키기 위해 수 없이 많은 살인과 불합리를 강요한 다양한 종교를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올바른 근본주의'의 예인 기독교의 경우 배타적 성향이 강하다. 자신을 향하는 혐오를 무시하지 않을 뿐더러, 교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부정하는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벌한다. 이게 멀고 먼 옛 이야기일까?


이제, 일베 조형물에 대한 다중의 혐오에 대해 중간 점검을 하기로 하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베 조형물에 대한 다중의 혐오는 두려움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소수자 혐오와 민주화 부정이라는 '정상성'에 대한 위협, 그들이 언제 길거리로 뛰쳐나와, 테러리스트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일베에 대한 혐오를 조성한다. 이에, 일베는 퇴치 되어야하는, 억압 되어야하는 대상으로 설정되는데,이는 역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체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정상성'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다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더 큰 위험은,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드러나는 사건들 하나 하나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식의 두려움은 새로운 유사-근본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확고한 근본주의자가 되어야하며, 위협이 되는 대상에 마저도 관용을 취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혐오를 조장하는 이들마저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며, 이들에 대해 엄정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혐오마저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유사근본주의의 문제점 언급. 해결책: 혐오를 관용해야 한다. / 엇나간 주장과 분석이 오류를 불러왔다. 아쉽다. 두려움에 일베를 억압한다는 것인데, 두려움은 부가적인 요소라 본다. 어쩌면 분노를 위한 분노, 혐오를 위한 혐오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이 하나 더 따라 붙는다. 우리는 어떻게 그 '정상성' 을 수용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 초보적이지만, 아브젝트 미술 담론의 주를 이루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개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혐오를 발생시키는 원 감정으로 수치를 언급하는데, 수치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외적 억압으로 인해 발생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치가 반복되면 비참한 정서를 느끼게 되고, 이 비참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는게 아브젝시옹 개념을 이루는 핵심이다.



- 아브젝시옹 개념을 살핌 -> 정상성을 수용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함. / 내면을 억압 하면 수치가 발생하고 반복되면 비참함을 느낌.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에게 복종하게 된다는 게 요지. 잘 모르는 개념이라 좀 알아봤다.

*인용문(51): 아브젝시옹의 문제

프랑스 말로 아브젝시옹은 비참, 혐와, 더러운 것을 뜻한다. 배설하고 싶고 아브젝시옹은 주로 개인의 수치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수치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러한 수치가 나타나면 또한 혐오감을 느낀다. 만일 수치로 인해서 또 다른 수치를 경험할 때 그것은 비참을 탄생시킨다. 그것이 바로 아브젝시옹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권력은 수치와 비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즉, 수치와 비참을 사람들은 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수치나 비참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 의미가 좀 다른데 작가는 혐오를 막아줄 사람, 김병훈 박사는 혐오를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복종한다고 한다. 누구의 정의가 틀린 것일까? 다른 자료 조사를 했다.

1.크리스테바 정신분석 이론의 가장 매력적이고 강력한 개념적 도구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이다. 아브젝시옹은 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즉 안정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질적이고 따라서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버려진 것들, 경계 밖으로 제외된 것들이 ‘아브젝트abject’이다.- 복종의 의미는 없었다.

2. 페미니즘의 개념들 (사회문화이론 연구소 저)- 세계를 위협하는 불쾌한 대상은 곧바로 이성적 질서에 깃들며 평화롭게 복종한다.

몇 가지 정의를 찾아본 바로는 김병훈 박사의 해석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비참함을 느낀 주체가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한 지점에 대해, (위험하지만) 나는 이것을 ‘정상성’ 개념으로의 자발적 편입으로 이해한다. 즉 가시화된 권력 집단뿐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는 통념적인 사회 구조로의 편입을 말한다. 이번엔 좀 더 쉽고 가까운 예를 찾고자 한다. 서점의 가판을 장식하고 있는, ‘나이대별 해야할 목록’ 따위의 책들에선 이러한 증상들이 드러나는데, 취직, 결혼 적령기 와 같이 비교적 느슨한(?) 아웃라인은 암묵적이지만, 분명 실재하고 있는 ‘정상성’ 이다. 취직, 결혼 연령이 늦어지면, 압박이 따르고, 당사자와 주변인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물론 직접적인 압박이 없어도 충분히 수치를 느낄 수 있다.) 수치는 반복되어 비관에 이르고, 결국 히스테리로 발전한다.(조금 순진해보이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안착되길 희망한다. 이런 ‘정상성’의 압박은 사회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 된다.


- 권력에 복종을 정상성 개념으로 이해함. 재밌네. 정상성에 벗어나면 수치를 느낌. 사회 소속원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함. - 가장 흥미로운 분석. 자신이 만든 정상성 개념과 아브젝시옹의 혐오를 줄 수 있는 대상에게 복종한다는 개념을 섞었다. 막아주는 대상이던 비참을 주는 대상이던 간에, 상대를 복종하며 자발적으로 정상성 개념으로 편입하게 된다. 정리- 내게 수치를 반복해 줄 수 있는 아브젝트에게 복종하며 정상성 개념을 자연스럽게 체화. 대중은 오히려 정상성을 위한 분노를 토해냄.



이 논의의 연장에서, 일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도 짧게나마 시도해볼 만하다. 일베 회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놀이로써 자신들을 벌레라 부르는데, 이들의 발언에선 (정상성의 억압에 의한)자기-혐오가 느껴진다. 실제로 일베는 청년 세대 위기 담론이 형성될 즈음 형성된 집단이었다. (또 다시 거친 가정이겠지만 계속해서 밀어부쳐본다.) 일베는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정상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수치와 비참을 경험한 그들이 자기-혐오의 넘치는 부정을 해소할 창구로 찾은 것이 바로 ‘정상성’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식이면, 그들의 (정상에 비춰)‘비-정상적인’ 행위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기존 가부장적-군사독재 정권의 권력으로 숨어들어 간 것 역시, 자신들의 비참함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넷net이라는 가상 공간이 주 활동 무대라는 점, 1-30대 젊은 남성이 주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일베만의 히스테리를 구성했다 손 치더라도, 결국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의 주된 동기를 ‘정상성의 억압’ 에서 찾는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 조금 삐딱한 시선을 더하면, 일베는 기실 ‘정상성’이 낳은 괴물이며, 일베는 어디에도 있다라는 식의 주장은 이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 비정상이 정상에 대한 공격 = 일베 현상. 정상성이 낳은 괴물로 해석. / 여기서는 해석이 약간 꼬인다. 일베는 정상성 기준에 부합하지 못 하는 이들인가, 아니면 군사독재라는 정상성에 복종한 것인가? 그들의 정상성이 대중의 정상성과 상충된다면 이는 비정상성인데, 이에 따르면 모든 대중이 공유하는 정상성이 다르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해석 오류인지, 작가의 오류인가? 정리한다.

정리 일베 유저가 나이대에 맞는 정상성(아브젝트)에 부합 못 함. - 아브젝트(군사독재, 기득권)에 순응 - 자신들의 정상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상정한 비정상성의 대상에게 분노와 혐오의 표출.

아무래도 내 해석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정상성의 개념은 우리 사회에 하나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문맥상 작가가 중복된 정상성을 언급할 리 없으므로 이 문단은 분석 오류이거나 글의 주제에 부합하지 않음.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일베가 정말 '정상성' 에 대한 실재적 위협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들의 '정상성'에 대한 공격은 히스테리로 봄이 옳다. 이들 자체를 IS와 같은 유사-근본주의로 바라보는 것은 과한 해석이다. 다만, 이들이 정치 권력에 의해 이용될 때에 이들은 얼마든지 유사-근본주의로 돌변할 수 있다. 이 지점을 유의한다면, 일베 현상은 우리 사회의 거울로 삼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를 것이다. 그들을 수치스럽게 한 우리의 '정상성'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그 '정상성'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행동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정상성'은 진정 진리인가? 모순은 없는가? 또 우리에겐 저들을 억압할 근거가 충분한가, 그리고 저들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것이 분쟁의 해결이 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상성' 은 얼마나 보편적인가? 보편적이란 말은 진정 유효한가?


- 정상성에 대한 질문. 일단 정상성의 개념이 모호해진 시점이므로 일베의 정상성에 대해 나의 의견을 말한다면, 군사 정권, 기득세력, 가부장적 가족상이 그들의 정상성이 된 시점에서 정상성은 진리가 될 수 없음 수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정상성도 완벽한 진리에 다다를 수 없으므로 억압과 제거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


(이에 조심스럽게 구체적인 의문을 형성하자면, 몇년 전 학교 청소 노동자 사건에 침묵했던 것과 이번 일베 조형물 설치 논란 중, 어느 쪽이 더 불명예한 것인지 좀 더 따져보기로 했다. 이를 추궁해 가다보면, 소위 ‘명예’ 라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정상성’ 의 너저분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성의 폭력성과 모순 발견


위 질문을 받아, 나는 조금 위험한 발언으로 '#1 가설 제기' 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일베를 공격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현재의 '정상성'을 유지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상성의 억압으로 태어난)새로운 일베를 기다리는 꼴이 될 것이다. 드러난 폭력보다, 더 위험한 것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행사하는 폭력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두려워하는(혐오하는) 이유가 진정 '저것'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일 것이다. 끝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끝내기까지, 많은 생각의 정리가 있었으며, 나름의 해결 모델을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라 생각한다. 다음 소고, <#2. 모델 탐색> 에서는 간디와 함석헌 선생과 같은 비폭력주의자들의 논의를 참고할 예정이다. 이들은 사실상, 겉으로는 비폭력주의자들이었지만, 체제를 전복하려했다는 점에선 가장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져야만 한다.


- 앞서 말한 것과 다른 의미의 정상성(반일베세력이 가진)의 유지하려는 행위로 일베를 공격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짧은 핵심을 생소한 아브젝시옹이란 개념과 사례를 통해 길게 기술했다. 어느 정도 깊이도 있었고, 재밌는 시도였다. 나의 독해력 문제, 혹은 그의 서술상의 문제로 인해 가독력이 높은 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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