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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ug 10. 2018

한 달 동안 쓴 글 모음

지난 한 달 동안 쓴 글을 모아서 포스팅한다. 공부와 메모 용으로 작성한 글이라서 브런치에는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로 보면 올리기 부적합하지만, 덩어리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다. 파티션을 나눠 글을 삽입하겠다. 





카멜 디우드- 뫼르소, 살인 사건

8월 8일



초기 목적을 달성했다. 블로그에 마지막 글을 쓰고 독서에 집중했다. 3 시간에 걸쳐 책 한 권을 읽었다. '뫼르소, 살인 사건'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카뮈의 이방인을 모티프로 한 소설이다. 내용은 다소 어려웠다. 분량이 적고, 대화체로 구성되어 가독성은 좋았으나, 함의를 찾기 위해 다소 많은 시간을 썼다. 감상을 정리한다. 



등장인물- 어머니 미리엄 하룬 조제프 무싸



배경-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의 동생이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름을 잃고 단순한 살인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신의 형 무싸의 존재를 규명하려 한다. 아랍인 주인공 하룬은 형의 복수를 위해 상관없는 프랑스인 조제프를 죽인다. 뫼르소와 같은 방식인 총살. 그 후에 인간 실존을 이야기한다.



카뮈를 비난하기 위함? 


초반엔 부조리에 싸우는 뫼르소를 드러낼 수단으로 아랍인의 존재를 사용한 것에 비판하는 내용이라 봤다. 그러나 후반에 갈수록 화자 하룬 또한 뫼르소와 같은 입장에 처함을 깨닫는다. 카뮈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작품으로 보는 게 옳다. 그러나 그 시대상 식민사회, 인권의 불평등, 폭력성을 고발하는 역할도 맡는다.



뫼르소와 하룬이 마주한 부조리


뫼르소는 살인이 아닌 어머니 죽음에 울지 않은 이유로, 하룬은 알제리 독립 전쟁 이후에 프랑스인을 살해한 이유로 추궁을 받는다. 살인 그 자체가 죄가 아니었다. 뫼르소는 프랑스인으로 알제리 인보다 가치 있다 믿어졌다. 기득권인 사회는 아랍인을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하룬의 경우도 비슷하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인을 죽인다면 칭송받지만, 전쟁 후에 죽였기에 구치소에 갇힌다. 그 사회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지 않은 이들이 느끼는 부조리다. 



이 소설을 왜 썼을까?


저자 카멜 다우드는 알제리인이다. 살해 대상으로서, 핍박받았던 식민 국민으로서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카뮈에 대한 존경과 이야기 확장을 위해 글을 썼다고 봐도 좋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둘은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려 한다. 사회는 그들의 방식에 맞게 행동하고 순탄하게 살길 종용한다. 그들은 거부한다. 죄의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한다. 신을 부정하고, 나를 책임지는 행위가 숭고했다.



나의 실존이 남의 실존을 무시한다


뫼르소는 햇빛이 눈부셔서, 바람에 소금기가 있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죽였다. 그의 실존을 위해 타인을 해친 셈이다. 올바른 행위일까? 라캉은 나를 둘러싼 부조리를 인식하고, 일탈을 통해(그 시스템을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상 일탈이다) 실존을 이뤄야 한다 말했다. 전에도 든 생각이지만, 일탈은 타인에 피해를 준다. 이 경우 을인 비유럽인들이 피해자가 됐다. 같은 내용을 반대 입장에서 쓰며 숭고함 뒤에 있는 실존의 폭력성을 돌아본다.




어머니는 왜 하룬에게 무싸이길 강요했나?


어머니의 강요는 폭력이었고, 하룬의 존재를 파괴했다. 어머니의 적개심을 드러내는 상징, 혹은 형의 대체품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다. 타인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말하고자 했다. 하룬의 어머니는 뫼르소에게 세상이다. 나를 억압하는 가해자이므로.




하룬이 이야기를 하는 펍의 벙어리 노인의 역할은?


유령처럼 주변에 서성이는 노인이 있다.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마지막에 와서 그가 벙어리임을 깨닫는다. 지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는 취미를 지녔다. 그는 왜 등장했을까? 듣고 말하지 않는단 특징은 사회에 저항하는 또 다른 실존적 인물임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문 기사는 누군가가 편집한 사실이다. 그것을 스크랩한다면 적극적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실존을 희망하는 이들을 그린 것이 아닐까? 그 한계까지.






알면 알수록

8월 5일


이번엔 짧게 쓰겠다. 


 철학은 알면 알수록 어렵다. 모든 공부가 그렇지 않을까? 전날 독서 모임에 나갔다. 늦게 온 철학 꿈나무는 철학적인 질문을 쉼 없이 던졌다. 재밌게도 철학사에 유명한 질문들이었고,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 질문들이 이미 유명한 논제였음을 말했다. 보편 논쟁, 물자체, 세계와 나를 나누는 몇 가지 개념- 관념론 유명론 실재론, 일원론과 이원론, 쇼펜하우어의 욕구에 지배받는 이성, 이데아, 소크라테스의 논쟁 등. 이런 대화들이 오갔음을 말했다. 그는 본질과 진리를 열렬히 추종했다.


그를 보며 든 생각이 있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는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다. 그는 그걸 몰라서 찾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진리를 왜 찾냐고 물었고, 그는 궁금해서 찾는다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 진리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질문 패턴과 반응은 매번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납득하지 않고 그냥 듣고 또 다른 질문을 건네는 식이었다. 어느 대답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진리처럼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하고 그처럼 되고 싶다 말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인정하는 자세가 귀감이 됐다 덧붙였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일 뿐이다'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t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문장의 한국식 해석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 뒤의 말을 들으면 대개념들을 제공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그렇기에 모든 서양 철학을 플라톤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철학 치트키로 그 시발점으로 종종 일컬어지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학습한 듯했다. 많은 것을 거르는 만능 필터로써. 

나는 세상을 명쾌하고 단순하게 보려 노력한다. 나쁜 머리로 이해하려면 그런 방법이 필요하다. 철학가들의 사상을 단순하게 정리한 개념들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재밌는 점은, 그 개요를 써가며 반복해서 읽고 이해했다 쳐도, 원서나 주석서를 읽으면 또 다른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큰 물줄기를 보고 그 안에 있는 흐름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안일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최근 라캉 철학에 흥미를 느껴 인터넷 자료 몇 가지를 읽고 정리했다. 대략적인 내용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라캉 평전과 슬라보예 지젝의 주석서를 구매했다. 내가 읽은 그 사람 이야기가 맞나 싶었다. 역시 칸트나 헤겔 등의 근대 철학가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큰 개념만 알지, 그 안에 어떤 사고 체계가 이 사상을 받치고 있는지 모른다. 깊게 보면 우리나라에 온전히 그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그들의 저작 중 번역된 책이 일부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결국 누구도 온전히 철학자를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없다. 저작을 다 보지도 못 한 이들이 전문가를 자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알면 알수록 복잡한 것은 세상사도 마찬가지다. 백 프로, 완벽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수학 공식과 같이 숫자로 딱 떨어지는 곳만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은 졸라 열심히 행동해서 느끼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나는 모르는 게 많다. 읽고 쓰면서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존나 많음을 깨닫는다. 앎과 무지를 앎은 비례한다. 








최인훈 웃음소리

7월 28일


5일 전에 타개한 최인훈 작가의 대표 단편 중 하나가 웃음소리다. 분량이 짧아 금방 읽었다. 감상평을 정리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조금 전에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되새겼다. 간단한 정리가 끝나고 남의 리뷰를 찾아봤다. 거기서 알게 됐다. 웃음소리는 수능시험 출제 문제로, 이미 많은 참고서나 문제 출제위원이 공유하는 하나의 해석이 존재한 다는 것을. 규정하지 않으면 문제로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수능용 문제가 되기 위한 작업을 거쳤다. 분류, 발단전개상승위기결말 구조, 쓰인 시기 등등. 아주 신물이 났다.


국어 교과서나 문제집에 실린 글들에서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1. 정답 해석이 존재해서


2. 작품을 음미하는 시간을 안 줘서


나는 다르게 받아들였는데, 그게 틀린 게 된다. 다양한 해석을 막고, 하나의 절대적인 해석법이 존재한다는 사고가 싫다. 나는 되도록 많은 상징을 해석하고 그 해석 방법이 권위자들의 것과 얼마나 매치하는지 보는 걸 즐긴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하나의 해석을 하길 바라진 않는다. 왜냐? 재미없으니까. 그럼 예술이 아니니까. 자신의 인문학적 지식에 따라 해석하는 절대량도 다르고, 경험에 따라 느끼는 바도 다르다. 그걸 막고 있단 기분이 든다. 그리고 바로 문제를 풀어야 해서 여운을 즐기는 것은 사치다. 


내가 이해한 웃음소리는 이렇다. 

위치적 변화(스토리)

성을 파는 여인이 서울 생활에 신물남 -> 전남친이랑 놀러 간 적 있는 온천에 자살여행 떠남 -> 시체 보고 돌아옴


여성은 자살하려 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담이 체불하는 것도 자신이 성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남친과 헤어진 것도, 사람들이 자신을 싸구려로 보는 것도, 자신의 열등감까지도. 결국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상실한다. 너무 고된 현실은 굳이 살 필요 있냐며 그녀가 목숨을 끊길 종용 한다. 


많은 이가 말한다. 

[인생은 좆같다. 살아서 뭐 하냐. 너무 부조리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 힘든 세상에 굳이 살아야 하나? 누굴 위해 사는 거지? 내가 이렇게 힘든데 왜 이렇게 아등바등 목숨을 연명하는 거지? 등]


이 책은 그녀의 삶의 이유 찾기 여정이다. 고된 현실이나 우리의 정신 문제 혹은 편향된 학습으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이 허무를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허무는 많은 경우 경제력, 배움 수준, 나라, 나이를 초월한다. 재벌이라고 허무감을 안 느끼는 게 아니다. 연예인,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이 고민과 마주한다. 3가지 중요한 상징이 있다.



여성은 온천(생과 사의 경계)에 도착해 교회를 찾는다. 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길 희망한다. 신이 너는 살아야 해라고 한 마디를 해주면 살아갈 힘을 얻을 것만 같다. 우리는 종종 신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그래 왔다. 우리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 삶이 가치 있음, 살아야 하는 당위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실패했다. 예수는 그 황금의 팔로 나를 감싸 앉지 않았다.

자살한 남성
주인공은 자살하기 딱 좋은 장소를 알고 있다. 온천 근처 산 중턱에 위치한 평지다. 전 남자친구와 왔던 곳이다. 한 쌍의 커플이 누구도 찾기 힘든 그곳에 누워 있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듯하다. 옆에 있는 남자는 얼핏 예수로 보이기도 하고, 꿈이란 환상에선 내가 사랑했던 전남친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자는 삶을 사는 이유를 상징한다. 주인공은 신의 사랑을 받아서, 이성의 사랑을 받아서 곁의 여자가 저렇게 행복하다고 믿는다. 그에게 전남친을 대입시킨다. 전남친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정신승리를 얻으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나는 버림받았음을 깨닫는다. 사실 주인공은 이미 알고 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하지만, 무의식의 공간인 꿈에서 나는 그녀(자신의 분신이자 과거의 나) 곁에 있는 남자가 전남친임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죽은 인물이었다.

 자살한 여성의 웃음소리
주인공은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산 중턱, 자살스팟의 먼발치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가 일주일 전에 죽은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고 난 뒤, 거적때기 밑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창밖으로 그들의 환상을 보는 동시에 웃음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끊임없이 자신을 조롱하는 셈이다. 신에게 삶을 구걸하려 해? 남자(사랑)에게 인생을 구걸하려 해? 너는 한없이 누군가를 통해 살아갈 이유를 찾는구나. 연약한 인간을 조롱하는 그 웃음소리. 그러나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삶의 이유를 가끔 잃어버릴 때가 있다. 주인공은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거다. 인간의 삶이 그런 것이다. 
그래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신도, 사랑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신이 손을 안 내민다고, 사랑이 날 떠났다고 항상 죽는다는 말은 핑계이다. 그냥 살자란 깨달음을 얻었다. 결국 인간 실존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 굴레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라캉, 쇼펜하우어, 니체 등의 굴지의 철학가는 우리가 사회의 톱니바퀴에 부품처럼 쓰이며 우리의 실존을 망각한다 진단한다.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어려움 속에서 나를 찾는 게 인간이다. 


아무개 선생님은 말한다. 주인공은 사랑을 깨닫고 서울로 상경한다(그 사랑을 만나러 혹은 새 사랑을 찾아서). 사랑을 지나치게 집착한다. 신이란 소재도 많이 다루지 않는다. 
예) 그녀의 실연을 비웃듯 들려오는 웃음소리.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자살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이었음을 깨달는다. 환상적 체험을 하고 난 후,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차창밖에 신기루처럼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사보텐 뒤에, 또 다른 연인이 보이고, 웃음소리를 듣는다. 이것을 통해 처음부터 숲 속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서울에 돌아올 때까지 사랑만을 꿈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해석을 강요하는 학교나 시험체계는 아쉽다. 






9분 리뷰 시카리오

7월 27일


시카리오란 영화를 봤다. 초반에 보다 잤다. 자다 깨고 그냥 나오는 부분부터 이어봤다. 결국 중간에 10분가량은 못 봤다. 전기장판 위에서 누워 보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졸음을 참으며 봤다. 9분 동안 리뷰를 할 예정이다. 10분 정도 하고 싶은데 더 임팩트 있게 한 자리 수로 정했다. 짧은 단상을 키워드로 남긴다.

4:18분 시작


멕시코 마약 범죄 소탕.

미국 정부의 탈법 용인 -> 대의를 위해 (정의란 무엇? 법은 유연하게 적용되는 것인가 상황에 따라?)


암살자(전 멕시코 검사)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소탕 작전하다가 가족을 잃음 

카르텔에게 복수하기 위해 잠입 (미국 정부, 군 용인 하에)


주인공 여자는 준법정신 강함

자의적 법률 해석과 내로남불식 국가에 현타오는 과정을 그림


악인들은 그 가족들과의 행복한 한 때가 영화에 잡힘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 남편 가장임을 드러냄

마찬가지로 전 검사도 가족 복수로 현장 투입임. 미국인도 아님. 단순히 이용하기 좋으니까 

서로의 이익을 위해 탈법을 용인


폭력의 세상. 마지막에 늑대들의 도시(폭력과 범법으로 가득한 미치광이들의 도시란 의미)에서 나가라고 전 검사가 주인공에게 충고. 여전히 많은 도시는 폭력을 용인함. 왜? 확실한 몇 명의 악을 내 수중에 두면 관리하기 용이하고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


시카리오의 작전은 미국 입맛에 맞춰 놀아나는 카르텔에게 마약 거래 몰빵 시키는 것임.


시카는 칼 이름이고 시카리오는 암살자란 뜻임. 


결국 암살자(미국)은 자신의 입맛에 맞춰 놀아나지 않는 상대를 암살함. 살인이 아니고 암살이라고 표시한 데는 의미가 있음. 암살은 몰래 하는 살인임. 미디어나 대중이 모르는 곳에서 은밀한 방법으로 적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


마지막에 주인공이 전 검사를 쏘지 못 한 이유는 이 시스템에 그녀가 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들의 섭리를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 (가족 참상 후 복수의 당위를 어느 정도 인정)


핵심 주제는 무법지대. 미국의 위선. 인간의 위선을 꼽을 수 있음.


상징은 뭐가 있었지? 딱히 기억이 안 남. 주인공이 대화를 나눌 때 거울로 뒷모습이 비침. 앞과 뒤를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공정함 준법정신을 나타낼 수 있음


재밌었는데 이동진이 만점 준 이유를 찾지는 못 했음. 여러 상징이 없어서. 상징, 미장센이 많아야 좋은 영화라고 믿었는데 내가 못 찾은 건지, 없어도 좋은 영화일 수 있는지 헷갈림. 어쨌든 나는 10점 안 줌. 


인간의 양면성이 중요. 남에게는 범죄자(무자비한 폭력배, 살인자)일지언정 가족에겐 따뜻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


4시27분 끝. 


자 이제 남 리뷰 찾아볼까~





오늘의 배움

7월 24일


오늘 듣고 읽고 생각한 것을 정리한다. 

오늘도 팟캐스트를 들었다. 여러 에피소드를 들었는데, 그중 쇼펜하우어와 헤겔을 비교한 편이 인상 깊었다. 헤겔의 철학과 그의 인생은 최근에 정리했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아니었다. 예전에 쇼펜하우어 평전? 비슷한 책을 읽었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썩 훌륭한 책은 아니었나 보다. 어쩌면 너무 어려워서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것일지도. 복습을 겸해서 쇼펜하우어에 대해 정리하겠다. 자료 조사를 추가한다. 궁금한 개념을 메모해서 마지막에 별도로 찾을 예정이다. 

-쇼펜하우어 여성 혐오자
식당에서 시끄러운 여성에게 경고 줬으나 무시해서 구타함. 20년간 배상금 지불함. 독신으로 삼// 지금 시대였으면 가루 됐다.
이데아 부정. 현상의 실체는 의지 
신, 천국 부정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명저 - 실존철학과 프로이트에 영향// 당연하다. 신이나 이성을 기준으로 인간을 판단하려 했던 기존의 철학과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렇게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그 안에 개별적인 욕구나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요소가 행동을 만든다.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역설. 그런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유하고 실존하는 존재라고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실존 철학은 흥미로운데 항상 아쉽다. 나는 인간만이 특별하다고 믿지 않는다.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우리는 본질로 비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미물까지 실존한다고. 인간은 우월하지 않다는 게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니 그 후에 나온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실존 철학 담론은 부정할 것 같다. 

염세주의자 - 사후세계, 낙관주의 부정 // 엄밀히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인간의 능력을 신봉하길 멈췄다해서 염세는 아니지. 그냥 우리는 모자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 
불교 영향 받음. 일체개고와 비슷. 사실 염세주의 아님 일체개고는 고생 없으면 낙도 없고 낙 없으면 고생이 없다는 뜻. 뭐냐면 판단할 반대 개념 없이 인식이 불가함을 말함. 고통은 무념무상무아를 거부할 때 나옴. 나를 잊어야 고가 없지. 내가 어제 쓴 글에 이런 개념이 나온다. 나 기특해. 나를 버려야 영원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이 얘기다. 

맹목적 의지와 허망함을 끊어내며 고통 해방
의지보다 인식을 강조. 인식해서 초연해져라// 그러니까 욕심 적당히 부리라는 뜻이다. 적은 욕심이 적은 고통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뜻. 
인간을 지배하는 의지를 인식 = 초월 가능// 이게 핵심
헤겔 싫어함. 헤겔에 열등감 엄청났다. 헤겔은 국가적 철학가였는데, 그에게 덤벼서 같은 시간대에 강의함. 물론 탈탈 털림. 물론 헤겔 철학이 국가 통치에 유용한 점도 있었다. 헤겔은 국가가 이성의 끝이라 봤고, 행복한 나날을 보낼 거라 상정했다. 그러나 헤겔은 초천재였다. 그런 이유만으로 뜬 것은 아니다. 헤겔 망신 주려고 강의 몰래 들어가 짓궂은 질문을 했지만 논파당함. 힘내세요 쇼펜하우어!




그의 명저 의지표상세계. 알아보자
칸트의 현상계와 물자체를 표상과 의지로 구분. 결국 칸트를 계승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담음

칸트의 착각 =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내용은 이해와 경험되어야 하는 대상뿐이 아니라 기관에도 의존함. 두뇌 없이 사고 불가, 위 없이 소화 불가. 응? 무슨 말이지. 물자체가 신체의 한계를 인식하고 쓴 개념일 텐데.
이 작가의 구술 문제인지, 나의 이해 문제인지 모르겠군.  밑으로 고민을 끌고 간다.

쇼펜하우어- 인간은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믿는다.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와 물자체는 별개의 두 현실이 아닌 다르게 경험되는 같은 세계다.
어렵군. 
의지와 운동은 같은 사건의 다른 경험. 내부 경험, 외부 관찰. 
사물을 볼 때 의지가 아닌 객관적 표상으로 보게 됨. 그러나 외, 내부 동시 존재.
공간과 시간이 현상계에 속함. 시공간은 우리 마음속 개념
즉, 우주의 의지와 개인 의지는 동일하다. 현상계는 초시간적, 맹목적 의지에 지배된다. // 이게 핵심이었다. 기억해라.
의지는 욕구 뒤에 있음. 끊임없는 좌절 필수적. 


근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헤겔의 낙관주의적 이성을 비난하고 염세적으로 보이는 철학을 주장한 것은 일단 인정.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이라 완벽치 않고 이성이 우리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끄는 게 아님도 인정. 
칸트와 어떻게 다른지 이해가 아직 안 된다. 물자체와 의지는 어떻게 다르지? 
물자체는 별개의 세계, 의지는 같은 세계. 표상은 항상 보이나 의지는 우리가 내적으로 받아야 의미


이데아-물자체-의지
현실-현상-표상 
플라톤 칸트 쇼펜하우어


아하! 이런 건가 보다. 왜 물자체와 현상이 하나의 세계라고 믿는지를 설명해주는 거지. 시공간은 우리 사고의 한계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물자체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냥 그렇게 인식한 것뿐이지. 결국, 물자체란 개념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이지 실존하는 게 아니다. 오 이해했어. 굿잡!!!


욕구는 프로이트와 칼 융의 정신분석학에 영향


의지는 감정과 욕구를 포괄한 개념임. 이성과 다름. 물자체의 세계와 다름. 
뿌리가 비이성적임. 그래서 우울해. 인간은 완벽치 않아. 세상은 고통이야. // 완전 불교철학이다. 


쇼펜하우어를 통해 본 행복전도사의 자살 과정
소망이 성취돼도 지속적 만족 불가. 모든 재산과 행복도 우연의 산물
통제 불가한 외부 세계는 행복 좌우
행복이 목표면 자살을 피하기 어려움. 욕망은 무한, 자원은 한정. 통제 불가한 재해
완벽한 평정, 행복, 만족은 본성과 정면으로 배치. 불가능한 가치
행복 추구가 아닌 고통 없음을 만족하고 살아라 - 쇼펜하우어 핵심


슈뢰딩거
물리학자. 20세기 활동. 양자 역할 체계 공헌
20대에 쇼펜하우어 심취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학 설명하기 위한 실험임
고양이와 50퍼센트 확률로 청산가리 살포 가능한 실험 장소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상태 삶 and 죽음
삶 or 죽음 아님

결론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팟캐스트 듣고 글 읽고 정리하는데 5시간이다. 책 2 권 볼 시간이다. 어쨌든 내가 이해한 걸 요약하겠다.
의지와 표상의 세계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의 핵심은,
물자체의 세계는 따로 없다. 우리의 사고체계, 인간이 가진 한계(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음)이 만들어낸 이해일뿐이다. 그를 이유로 세계가 둘로 나눠졌다 말할 수 없다. 그냥 하나의 세계에서 우리는 한계를 통해 표상을 의지로 받아들일 뿐이다. 고통이 싫다면 행복하길 포기해.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와 비슷하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상이 존재한다 믿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은 물질 안에 있다 믿었다. 이원론과 일원론의 대립이다. 플라톤은 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성과 우리 현실을 살피는데 집중했다. 쇼펜하우어는 한계를 인정하고, 나아가서 불교적인 깨달음을 전파했다. 끝.





버닝 짧은 리뷰

7월 20일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봤다. 4번에 나눠봤다. 피곤해서, 바빠서, 일이 생겨서란 이유로 중단했었다. 결국 다 봤다. 빨리 감기를 했다. 


핵심 키워드

존재 있다, 없다

대조  빈 부, 벤 종수, 강남 파주


혜미는 존재를 끊임없이 물음

우물의 존재

고양이의 존재

판토마임


종수는 해미를 사랑한다고 함. 몇 번 안 되는 만남, 그 속에 가득한 진실하지 못 한 부분들.


종수는 왜 집착해? 나라는 존재를 찾는 유일한 존재여서

후에 어머니도 찾지만 목적이 있음

혜미는 목적 없이 종수를 찾음. 반갑고 삶의 은인이어서

그러나 종수가 그녀를 구한지는 알 수 없음. 기억하지 못 함. 


종수 엄마와 혜미만 우물이 있다고 말함.

그를 찾는 두 여인만 우물(생과 사의 경계, 나와 혜미의 인연의 출발, 그들의 시작점)을 인정

생사는 모호함, 그녀와의 관계처럼. 우물은 또한 생명을 상징. 종수 엄마와 혜미만 생사의 경계를 인지함. 종수 엄마와 혜미는 관계에 집착이 없음. 모녀, 이성관계. 


종수의 삶의 이유는? 

포크너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긍정적 인생관을 유추


벗어나고픈 세계와 이상향

치열한 서민의 삶, 벤의 호화로운 삶

개츠비를 언급 -> 개츠비가 가진 삶의 가치나 이상향은 차치하고 그 출처 모를 부와 여유만 상징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움 -> 그들이 원한다 주장 -> 그들에게 구원을 내림


벤은 전지전능감에 심취.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을 먹음(태움)으로 끝을 내줌 

소거나 소화는 그들의 죽음 소멸을 뜻함. 죽음은 벤에게 구원일 수 있음. 

또한 만약 벤이 여성들을 죽였다면 그녀들에게 구원을 내림

벤이 죽인 인물들은 사회에 동떨어지거나 생명에 큰 무게를 안 두는 인물들


영혼의 배고픔은 삶의 이유를 갈구하는 인간 본성. 그러나 그 본성을 찾은 이가 많지 않음

혜미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 없는 것을 잊는 것이 삶 아닐까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잊으려 노력함


혜미는 거짓으로 도배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임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음)

우물, 남산타워에 비치는 빛(복제품), 가족에게 빚짐, 판토마임, 종수와의 관계, 고양이

두 개의 삶의 경계에 살고 있음. 현실과 이상. 경계인에게 현실은 지옥임. 

영혼의 갈구-> 삶의 의미와 진정한 삶이 무엇일지 궁금해함.


벤은 그녀에게 구원을 내림 -> 살인 방화(를 예측)


현실에서도 전능감을 맛 봄. 


종수는 전능한 그에게 또 다른 심판을 내림. 가장 아래 있는 자가 가장 위의 사람을 죽임. 도치. 역설

종수는 현실, 벤은 환상을 의미할 수도 있음. 

종수가 남산 타워를 보고 하는 자위 -> 전능감과 힘을 원함. 탑은 권력과 신을 상징


현실이 환상을 죽이며 이 세계에서의 긍정을 의미. 혹은 이 세계의 긍정이 불가능함을 의미

정 반대의 의미






내가 니 선생이다 논리학 3부작 후기

7월 17일





논리학 자료를 모으고 학습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을 활용해서 학습하고자 했다. 청각 자료인 팟캐스트에서 논리학을 검색했다.'내가 니 선생이다'라는 팟캐스트를 발견했다. 3인의 대표 철학가를 중심으로 한 6 편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다운 받는 것은 공짜다. 밑질 것 없어 즉시 들었다. 그들의 활동 연대순으로 업로드했다.  1. 아리스토텔레스 2. 프랜시스 베이컨 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들은 내용 + 추가 조사를 해서 정리하겠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소피스트의 수사학으로 혼란한 시대 배경 
수사학: A = not A  
미래를 이야기한다. 법안 찬성을 요구할 때 근거로 미래에 나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핵심을 흐리고 감성의 영역에서 설득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종교에 차용. 현실을 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배제. 그러나 14세기 아퀴나스가 신학에 논리를 접목할 생각을 함. 그로 인해 만학의 아버지로 불림. 
배경: 그를 제외하고 논리학 논할 수 없었음. 
플라톤- 현실과 이데아 세계를 나눈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 - 정신은 내 안에. 일원론 

삼단논법
사람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 소크라테스 죽는다 
A=B  B=C  A=C라는 간단한 논리
정언적 삼단논법= A는 B다. B는 C다. A는 C다
선언적 삼단논법= A거나 B다. B가 아니다. 그럼 A다.
가언적 삼단논법= A이면 B다. B면 C다. A면 C다.
양도논법= A거나 B다. A면 C다. B면 D다. 그러므로 C나 D다.

문제점
거의, 대부분이란 전제가 붙으면 오류가 생길 수 있다.
A가 진리란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증거의 출처가 없다.

그의 논리학은 오르가논(장기란 뜻의 영어 오간에서 차용)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전후, 토피카, 궤변론으로 구성
범주론- 사물과 언어를 범주로 나눠 구분한다  / 개별<>일반적  실체<>실체없음 4가지 분류/ 10가지 범주로 나눔. 1. 실체. 2. 양. 3. 질. 4. 관계. 5. 장소. 6. 시간. 7 위치. 8. 소유. 9. 능동. 10, 수동
범주로 걸러진 내용만 참이며 지식으로 받을 수 있다. 
명제론- 판단과 명제를 논함 / 문장, 명제로 분류되는 구조를 구분하고 술부를 명확하게 함.
궤변론- 오류를 알아야 한다. 일전에 올린 자료(모든 오류)를 학습하는 것/ 오류 가능성 차단
분석론- 삼단논법 / 논리학적 사유 구조 학습
토피카- 통념에 의한 변증적 추론 

이 위의 논리학(오르가논)을 학습해야 철학 공부가 가능하다 주장. 시민의 기본 소양을 기르기 위한 학문이다. 수사학에 속지 않을 수 있다. 


2. 프랜시스 베이컨의 논리학
아는 것이 힘이다. 똑똑하며 정치욕이 많았다. 뇌물 받아 유배.
경험주의 철학의 시초. 
아리스토텔레스- 연역법 이라면 베이컨은 귀납법을 주장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된 하나의 진리가 아닌, 다양한 시도와 경험을 통한 새로운 진리를 찾자가 주제
노범오르가논 <>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반박
실제로 실험하고 관찰할 것이란 의지 표명
우리가 극복해야 할 4개의 우상이 있다.
종족의 우상 -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사유 한계. 인간 중심의 사고 탈피 요구
동굴의 우상 - 개인이 가지는 오해와 경험의 한계. 걸러듣는 경향 지적
극장의 우상 - 학문의 권위에 비판을 잃음. 각 분야의 거두의 말에 무조건적 복종하는 경향
시장의 우상 - 사람이 모이면 아니 뗀 굴둑에 연기 난다. 대중의 논리에 휩쓸리는 경향

극복을 위해 할 일
발견 목록 작성 - 예) 열이 발생하는 상황
제거 목록 작성 - 열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
가설 
검증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 제시로 의미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맹목적이었다. 신은 논리로 따질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 그러나 그의 귀납법과 데카르트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기독교의 세상에 균열을 일으킴

3.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
그의 논리학에 대해선 제대로 많이 다루지 않았다. 생애와 업적을 주로 말했다.
논리철학논거
명제는 논리적 그림이다. 
나뭇잎 떨어진다 (명제) - 실제 일어나는 사태
공통적 논리구조 있음.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이해 
언어와 세계의 동형론(같다는 주장) 주장
명제는 의미를 갖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그릴 뿐이다.
이름은 대상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방식이지 대상 자체가 아님. 지칭일 뿐.

사고의 한계를 긋기 위한 작업. 말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구분하고 없다면 침묵해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까지 상상 가능하다.
명제: 문장. 옳고 그름 구분 가능한 것
예) 베토벤은 천재이다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천재라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서.







책 속의 7개의 주요 명제는 복사 붙여넣기.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일어나는 것, 즉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이다.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요소 명제는 자기 자신의 진리 함수이다.)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이것이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수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천재성이 여러 분야에 퍼졌고, 그를 종합해 철학 이론을 정리했다. 덕분에 그 배경이 된 분야에 조예가 없다면 이해가 어렵다.


신, 창조, 정의는 보여져야 하지 말하는 게 아니다.

과학적 물음이 대답 되도, 삶의 문제가 여전히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느낀다.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논리구조의 넌센스를 말했다. 

논리학 철학의 기초 - 미학 윤리 아름다움 슬픔 공감 위로 등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은 행동해라. 

행동하고 공감하고 소통해라! 라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감상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 논리학 관련 자료를 찾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베이컨의 경우 써먹을 수 있는 방식을 제시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다. 깨달은 점은,

아리스토텔레스: 명제를 간단히 정리하고, 존재하는 오류들을 학습해서 분별하고, 여러 범주를 통해 걸러 지식으로 받아 들여라. 

문장 명확하게 써라. 명제가 되게.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을 때 핵심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라. 습관이 나다. 

베이컨: 요약본 말고, 직접 책 읽고 과학적 절차를 거쳐 사고해라. 

비트겐슈타인: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천재다. 나는 아니다. 내 수준에서 열심히 살아라. 


여러모로 유익했고 재밌었다. 





논리학을 알아봅시다.

7월 14일




이 글에서 할 일은
1. 논리학의 발달 과정을 알아본다
2. 과정 속에서 주된 이론을 정리한다
3.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정리한다
4. 의문이 생기면 코멘트를 단다 (추후 리서치를 하거나 다시 생각한다)


발달 과정과 이론


논리학


타당한 추론을 탐구 
고대 중국,인도,그리스에서 발전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유명. -과학 수학에 응용


중세 기독교 시절 4~14세기에 정점. 14~19까지 논리학 쇠퇴.
19세기 중반 이후 기호, 수리 논리학 발전 -> 인류 중대사


분석 철학, 철학적 논리학, 사상 논리, 의무 논리 등에 영향
그래 철학을 하려면 논리가 뒷받침 되어야지? 


플라톤 (철학적)논리학
적절히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타당한 논증의 전제와 결론의 관계의 성질은?
정의의 성질은?
정의는 인간 이해의 궁극이며 타당한 추론의 기초다. 정의,진리,선 = 이데아 개념과 연결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삼단논법. 오르가논 집필 (최초의 형식적 논리학) 그 전에는 없었단 거지 논리학이라는 규정이?
범주론 - 트피카(궤변 논박론 수록) - 명제론(기호 분석) - 본석론 전서(삼단논법) - 분석록 뒷말 
체계적임. 모순율과 배중원리 취급. 의존 관계 찾고 타당성 전제 분석. 변항 사용. 
살짝 어려운데, 학문적으로 본격적인 논리학을 처음으로 취급한 사람 아닐까? 논리 툴(삼단논법)도 만듬
언어와 기호도 사용. 


스토아 논리학
스토아 학파임 (금욕, 자연이 최고임 주장, 논리도 신경 씀) 
가능태와 현실태 구별 안 함. 의미는 지금 안 되면 나중에도 안 됨. 가능 = 지금이나 미래에 존재함 
조건문 사용. 근데 이해가 안 됨.  나중에 다시 알아볼게
3개 구분. 잡음(폰)/ 발음은 명확하나 무의미(렉시스)/ 의미까지 있는 담화(로고스) 
왜 구분함? 이게 명제를 의미해서. 근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 의미하고, 되는 것, 대상 이렇게 3개가 결합이라고 함. 음?


이해를 위해 메모하는데 사실 이해가 안 된다 위에 물음표 쓴 3군데. 다른 논리학 책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굳이 이해가 필요 없을까 논리를 위해. 이해 안 되면 넘어가기로 한다. 실용성이 더 중요하니까. 


인도논리학
전제-근거-사례-응용-결론  5단계 구조 사용. 조금 현대적이군. 요즘에도 쓰는 방식이다. 
밥 먹을 때 물 마시면 해롭다 - 소화에 방해 - 물 먹다 탈난 적이 있다 - 물을 안 먹어봤는데 괜찮았다 - 식사 중 물 금지
이건 확실히 이해 된다. 이것과 4단계 주장한 사람도 있음. 
긍정/부정/긍정 한편 부정/ 긍정도 부정도 아님   
식사 물 마시면 소화 잘 되는듯/ 아니야 위산 없애서 방해돼/ 위산은 영향을 받으나 감각적으로 시원함/ 식사 중에 물을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됨.  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이것보다 위에 방식이 더 명확하다 주장하려는 바가. 아래는 다른 의견을 이해하기에 도움된다. 


이슬람 논리학
귀납 논리/ 양심화된 삼단논법/ 인텐티오(물건에 대응하는 마음속 상징) - 이 인텐티오가 신박하다. 이건 라캉이 말한 상상계와 일치한다. 상징계에 물건이 존재하고 상상계에서 이미지를 입힘. 같은 맥락 아닌가? 오 


삼단 논법 <-> 귀납 추론 은 상충됨. 외냐? 연역법과 귀납법이니까. 이성과 경험의 관계


범주론은 범주를 나눠 판단 근거를 찾고/ 명제론은 명제를 사용해 판단 근거를 찾는 게 아닐까? 굳이 어렵게 생각하고 안 찾아도 괜찮을듯. 그냥 시시비비 가리는 방법을 즉각적으로 상상해보면 이런 방법이 나올듯. 
내가 친구랑 말싸움함. 친구는 잘못됨. 왜냐? 범죄의 범주에 속한 행동을 해서 (범주론)
나에게 욕을 해서 (욕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명제)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죠.


그런데 논리적 분석에 어떻게 신학을 적용하지? 찾기 전에 내 스스로 사유하는 게 좋겠다. 사유하는 연습은 논리력을 키우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신과 논리는 일견 안 맞아 보이는데? 음... 
신학에선 신이 있음을 증명해야 함  - 논리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있음 - 논리학 발전 / 이런 배경은 있겠지
신의 말은 진리(명제) -> 성경에 나와 있는 말 (진리=논리) - 성경과 맥이 다름 (비논리) 
일 수 있겠군. 성경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가린다면 이거야 말로 비논리인데? 왜냐 성경이 항상 옳다는 전제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은 효력이 없다. 나 논리적?


대시이론 -  범주를 어디까지 할지에 대해 취급.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 (명제) 
질문- 인간이란 말의 범위는 어떻지? 현재 존재하는 인간만인가? 과거와 미래의 인간까지 포함인가?


공의어 - 단독으로 의미하는 게 없음. ~와/ 없다/ 모든/ 만약 


추단- 조건 명제 두 개가 만약~라면 형태로 연결.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날 수 있다'




우리 헤겔 형 논리학
대논리학 씀.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논리학 필요하다고 언급. 변증법을 논리 툴로 이해해도 되지 않나?


논리학과 심리학 - 논리학은 사고 범위 내에서만 존속함. 


역시 기호와 수리 논리학의 발전은 2000년 논리학 역사 중 가장 혁명적. 가까운 예로 나도 글을 쓸 때 기호와 숫자를 이용 in order to 이해하다 쉽게. // 기호의 의미보다 형식이 중요함. 수학 결과에 논쟁이 없는 게 근거.


이제 숫자와 대수로 사용
시저 = 인간/ 모든 인간 = 죽음/ 모든 시저 = 인간/ 
(x)Ax-Bx


모든 주민은 우럽계나 아시아계의 어느쪽이다
(x) [I(x)- (E(x) V A(x))]
모든 주민이 유럽계거나 모든 주민이 아시아계의 어느 쪽이다.
(x) (I(x) - E(x)) V (x) (I(x) - A(x))


대충 알겠는데 모르겠다. 기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위의 두 말은 같은 말로 보인다. 기호를 사용하면 식이 달라진다. 기호 없이는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호가 어려워서 추가 이해는 포기.


우선 논리학의 발달 과정과 주된 이론을 알아봤다.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법은 크게 없었다. 논리학 관련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사용해 말을 잇겠다. 


6가지 논리적 오류
1. 흑백 논리의 오류 - A가 아니면 B라는 전제
남: 나 소녀시대 싫어
녀: 뭐? 원더걸스가 왜 좋은데

2. 의도 확대의 오류 - 과장함
녀: 이번에 시험 공부 안 했다
남: 왜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3.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
남: 네 말이 맞으면 내가 10만원 준다
녀: (말이 맞음 확인) 이제 돈 줘
남: (모노폴리 돈 10만원 주며) 실제 돈이라고는 안 했다

4. 원천 봉쇄의 오류
녀: 너는 내게 100만원 줘야 해
남: 왜?
녀: 네가 100만원을 줘야 내가 생활비를 쓸 수 있어. 네가 돈을 안 준다면 너는 타인의 괴로움을 방관하는 거야. 인정이 없음이 분명해

5. 애매문의 오류
남: 나랑 수지는 어제 영화 보러 갔다.
녀: 너랑 수지랑 같이 영화 봤다고?
남: 아니 따로따로. 나도 영화 보러 갔고, 수지도 영화 보러 갔다고

6. 애매어의 오류
녀: 와 너 수지도 아는구나. 정말 발이 넓다
남: 나 발 좁아. 

이런 오류를 알고 있다면, 상대가 잘못된 전제나 해석을 할 때 잘못을 규정할 수 있다. 규정하기 전에 상대의 말을 한 문장으로 줄이거나 쉬운 표현으로 다시 쓰면 이해하기 쉽다.

아 화가 난다. 논리학 입문 서적을 구매하고 싶은데, 이북이 없다. 아무래도 구매는 어려울 것 같다. 목차를 보고 어떤 내용이 이어지는지 추론하는 수 밖에. 헤겔의 논리학 주석서는 pdf로 얻었다. 이걸 먼저 읽어야겠다. 

제1부 비형식논리 
제1장 논리학 
제2장 전통적인 비형식적 오류들(1) 
제3장 전통적인 비형식적 오류들(2) 
제4장 단어와 의미 

제2부 형식논리 
제5장 연역적 타당성과 논리적 형식 
제6장 진리함수적 결합사 
제7장 진리표 
제8장 기초 수리 
제9장 전통적 삼단논법논리 
제10장 술어논리 
제11장 공리 

목차를 근거로 리서치를 해서 책을 읽지 않았으나 핵심의 맛을 상상하는 작업을 하겠다. 우선 비형식논리는 정리된 것이 많다. 

1. 순환논법
- 결과로 원인을 만들고, 원인으로 결과를 만듬. 
예) 모든 인간은 못생겼다. 왜냐면 모든 인간은 못생겼기 때문이다. 
너는 인기 없어 =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않아// 동일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돌려막기
A:너 인기 없다. 왜냐고? 너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지 않아. 왜 호감을 안 주냐고? 네가 인기가 없어서지. 

A:내가 더 많이 가질 거야. 내가 두목이니까. 내가 더 많이 가질 거니까 두목이야. 
A: 공부를 잘하고 싶어? 공부가 쉬워지게 만들어. 공부가 쉽고 싶어? 공부를 잘하면 돼.
A: 나는 B보다 2살 많아. (B는 몇 살이야?) B는 나보다 2살 어려. 

2. 논점일탈 오류
뜬금없는 이야기하기. 하려던 말 까먹고 딴 길로 샘. 


생각해보니 이렇게 다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논리적 오류 총 모음집 링크를 첨부한다.
https://namu.wiki/w/%EB%85%BC%EB%A6%AC%EC%A0%81%20%EC%98%A4%EB%A5%98/%EB%B9%84%ED%98%95%EC%8B%9D%EC%A0%81%20%EC%98%A4%EB%A5%98?from=%EC%9D%B8%EC%8B%A0%EA%B3%B5%EA%B2%A9%EC%9D%98%20%EC%98%A4%EB%A5%98#s-4.6


이걸로 1~3장을 예상하고 학습했다. 삼단논법과 공리, 술어논리를 추가로 정리할까 한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자료 조사 없이 리뷰

7월 9일


변신은 다음 독서모임의 선정 도서다. 중단편 분량으로, 독서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량과 감상 후 드는 생각의 길이는 비례하지 않는다. 소화에 다른 장편보다 많은 시간을 요한다. 글로 정리하기 위해 생각을 정지해놨다. 이번에도 다른 리뷰나 독후감을 읽지 않고 내 생각을 먼저 정리해볼까 한다. 남의 글을 먼저 읽으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타인의 주장을 내 것처럼 포장할 가능성도 있다. 다 쓴 후에 다른 비평과 비교할 예정이다. 


줄거리

그레고르는 노쇠한 부모님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맡고 있다. 어느 날 잠이 깼을 때, 그는 벌레였다. 출근하지 않은 그를 보러 온 지배인과 가족들은 그에게 생긴 변화를 알게 된다. 벌레가 된 그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 변화, 가족 역할의 변화, 그레고르의 심리 변화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변신은 그가 죽고 난 후 새 출발하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며 끝난다. 



구성원

보수적, 가부장적인 그의 아버지, 음악에 꿈이 있는 누이동생,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어머니. 아버지는 그레고르의 수익이 가족을 부양하기 충분해 일찍 은퇴했다. 아직 어린 동생은 집에서 입지가 좁다. 경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집에서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정이 많아 가족들, 특히 오빠 그레고르를 잘 챙긴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사려 깊다. 자식에 의존한다. 



가족 태도 변화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첫날 아침을 제외하곤 말을 할 수 없다. 언젠가 그가 원래 몸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과 가족의 당위를 근거로 가족은 벌레인 그와 동거한다. 동생은 그가 머무는 방에 식사를 제공하거나 청소를 한다. 부모님은 그의 변화를 인정하기 싫지만, 동생의 행동을 묵인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나 벌레로 변한 그를 볼 자신이 없다. 아버지의 태도는 분노로 축약할 수 있다. 다른 가족들을 힘들게 만든 그의 자식이 밉다.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경제 활동도 못 하고, 집 공간만 축내며, 가족들 귀찮게 만드는 짐이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생각이 강해진다. 반면 그레고르의 정신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다. 사고는 그대로 하지만, 행동엔 제약이 따른다. 벌레가 된 후에도 자신의 생각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요구한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큰 부상을 입고도 가족을 증오하거나 해치지 않는다. 그들의 무관심과 분노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마지막엔 그의 존재를 거의 잊는다. 그가 머무는 방은 창고가 된다. 그레고르는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방에서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세 들어 살게 된 3명의 청년들은 그레고르 동생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한다.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연주에 흥미를 잃고 딴짓을 한다. 동생의 열정과 예술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한 그들이 못마땅한 그레고르는 병든 몸을 이끌고 거실로 향한다. '자신은 응원한다. 너를 알아봐 주는 내 앞에서 연주해.'라는 말을 그녀 뒤에 서는 걸로 대신한다. 벌레의 존재를 몰랐던 청년들은 소란을 떨고 집을 나간다. 가족은 수입원을 망친 그레고르에게 분노한다. 무관심 속에 그레고르는 숨을 거둔다. 가족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기차를 타고 집을 나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난다. 




실존주의

 인간은 실존하는 존재다. 목적이 뚜렷한 사물과 차별되는 점이다. 그러면 인간의 범위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영혼과 육체를 구분 짓는다. 그레고르는 육체를 잃었지만, 영혼을 갖고 있다. 그레고르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보면 처음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중간이었다. 그 후엔 쓸모없는 인간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존엄을 끝까지 존중한다. 그에게 그는 껍데기가 벌레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중할 실존하는 존재다. 


가족의 의미

3세기 전, 산업화가 시작되며 자식은 생산 수단의 위치를 벗어났다. 그전까지 아동이란 개념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가족의 역할이나 모성애도 학습되어 변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모두 문화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게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모성애나 가족애 따위는 나라가 대중을 통제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미래의 산업 역군이 문제없이 자라려면 그들의 부모의 지원이 필요하다. 문학, 예술, 정치란 채널을 통해 대중을 세뇌시킨다. 조선시대만 해도 서자, 혹은 노비와 사이에서 놓은 자식은 노예로 취급받았다. 순혈주의가 중요한 시절엔 노비나 양민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은 가치가 없었다. 결국 근대 가족 개념은 교육을 통해 주입당한 것이다. 모두 경제적인 방식으로 커온 셈이다. 가족 구성원이 경제적으로 메리트가 없다면 버려도 되는 세상이었다.(고려장, 장애 자식 유기) 육체가 없어진 것을 방패로 쓸모가 없는 그레고르가 자신들의 가족임을 부정한다. 그레고르의 흉측한 외형은 관습을 무시할 수단이 된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이기심의 발현이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의 지탄을 피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기심을 드러낸다. 



그레고르가 보여준 것

 그레고르는 유일한 인물(혹은 존재)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존중하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았기에 타인의 존엄을 챙길 수 있다. 동생의 자아실현, 꿈을 위해 다소 무리를 해서 그녀를 음악 학교에 보내려 했다.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족으로, (정신적) 인간으로서 그녀를 아끼고 응원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부조리에 저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항한 것이다. 그레고르는 육체의 장애를 뛰어넘어 그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실천한다. 사과 박히고 마른 몸을 이끌고 먼지를 질질 끌며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벌레는 존엄을 향한 인간의 발걸음이 아닐까



벌레로 변한 이유

책 어디에서 벌레로 변한 이유가 서술되어 있지 않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 삶을 생각했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왜 많은 고민과 노동, 배움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더 이유가 필요한가? 이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그레고르는 그날 아침, 그냥 벌레가 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어쩌면 그것과 상관없이 존엄을 지키기 위해 단지 살아갈 뿐이다. 이유가 없다는 게 이유다. 




쓸모
사람은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다. 그레고르의 동생이 특히 그렇다. 가족에서 특별히 맡은 게 없다. 경제 활동을 하지도 않고, 집안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적으로 나서서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녀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일이 존재하길 바란다. 그런 역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가치를 발견하려 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에게 밥을 주고, 그의 방을 청소할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다. 그레고르 전담 노동을 통해 쓸모 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믿는다. 가정은 작은 사회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중엔 경제 활동을 통해 가정에 보탬을 준다. 그러면서 그레고르 전담 노동에서 손을 뗀다. 그것 외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쓸모는 꼭 타인을 통해 규정 받는 것인가? 쓸모라는 단어는 대상화를 드러낸다. 그 자체로 귀한 인간이고 싶다면, 쓸모의 유무를 구분 짓는 부조리를 깨닫고 저항해야 한다. 아버지가 집에서도 제복을 입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은 아직 쓸모 있다며 소리 없이 외치는 것이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자신의 쓸모에서 벗어났다. 벌레가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엔 정체 모를 타의로 벌레가 됐다.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났기에 주제 의식이 강해졌다.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을 키워드를 통해 풀었다. 이 글은 순수하게 나의 이성만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글을 쓰기 전에도 카프카의 생애와 이 책이 실존주의 문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책을 읽으며 한 가지 물음에 사로잡혔다. 


최고의 작가란 칭호가 뿜는 아우라가 없었다면 이렇게 깊이 생각했을까? 



나는 카프카가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명이며, 실존주의 문학의 거두고, 변신이 그의 저작 중 대표임을 알았다. 만약 그런 사실을 배제하고 이 책을 읽었다면 같은 해석이 나왔을까? 그렇지 않다. 후광에 영향을 받는다. 어쩌면 후광이 더한 작품이 그 시대의 작품인지 모른다. 후광까지 인식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는 의견. 그렇다면 없는 후광을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역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역사는 역사가가 중요하게 여겨야만 후대에 전해진다. 역사가가 만드는 것이다. 문학 역시 비평가의 간택을 받아야만 후대로 전해진다. 나는 죽어가는 무수한 책들 사이에 누군가가 선별한 수 천, 수만 분의 1을 제공받는다. 선별할 능력이 없다는 게 아쉽다. 언젠가 발굴하는 입장이 되길 바란다. 


결국 나는 실존주의에 근거해 중심 내용을 해석했다. 이제 내 해석과 주류 해석을 비교해 볼 시간이다. 나의 해석과 정리가 선행되어야 권위자의 생각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내가 놓친 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할 것이다. 뭔가 아쉬우니 조금 더 분석을 해볼까? 


셋방살이 3인방

집의 왕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객인 그들은 주인처럼 군다. 돈에 쪼들리는 그레고르 가족에게 돈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은 그레고르의 존재를 철저히 숨긴다. 벌레와 동거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그 사실이 발각된다. 그들은 가족의 전기를 나타내는 소재다. 그들을 내쫓으며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회복한다. 가족의 결속력을 더하고, 진취적으로 살 것을 천명하는 계기다. 새로운 희망 (그들이 그레고르 없이도 생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레고르의 가족 누구가 아닌 그들 자신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쓸모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타 지역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레고르의 그늘을 벗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제 객체-> 주체가 되는 변화를 나타냄.


이 정도가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분석이다. 최선을 다했다고는 못 하지만, 책을 다시 읽고 더 생각한다 해도 결과물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책을 이해하는 것엔 옳고 그름이 없다. 내가 이렇게 느꼈다면 맞는 것이다.-라는 말은 차치한다. 나는 문학의 주류 상징체계와 해석 방식에 가까이 가고 싶다. 그 간극이 좁으면 좁을수록 만족감을 더할 것이다. 이 글은 얼마나 주류 해석과 나의 해석이 맞닿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다는 말도 통한다. 내게 독후감의 의미는 작품이라는 숨은 그림 찾기에서 얼마나 많은 숨은 그림을 찾느냐에 달렸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나, 내 이해가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이들의 것과 비슷하길 바란다. 그게 현재의 독서 지향점이다. 언젠가 그들을 뛰어넘는 분석을 원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프란츠 카프카 - 변신/ 남의 리뷰

7월 9일


중편 소설


가족의 전말
1912집필 1910 게재, 출판
그레고르
그레테
잠자/ 잠자 부인


3장 구성
1- 변신과 가족이 변신을 알게 됨
2- 방 구조 변경과 그레고르 상처입음
3- 가족 일구함. 그레고르 사망. 가족 새출발


카프카 대표 소설로 가장 먼저 읽길 추천
심판, 소송과 묶어 아들들이란 제목으로 출판하려 했으나 출판사 거절


변신 이유-  그를 고통받게 하려 / 혐오- 고립


아버지 - 그를 파멸 시킴. 책임 회피. 
동생- 주변인의 변심을 극적으로 묘사


사르트르의 실존 - 주인공과 사회가 서로 거부
카프카의 실존- 사회가 주인공을 거부 / 인간 실존을 벌레로 비유


카프카는 실존주의 개념이 태어나기 전의 사람. 때문에 실존주의 소설이 아닌 자본주의 비판, 현대인 소외를 그렸단 해석도 존재. 


벌레로 변한 것은 실제가 아닌 강박과 정신이상을 표현한 해석도 있음


위는 위키의 대략적 책 소개--




사회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 -> 벌레로 변신


돈 주는 기계가 됨. 최악에서도 가족 걱정


자본에 휘둘리는 가족관계 -> 경제력 잃고 소외


부조리-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 / 
그레고르의 존재 부정 -> 그레고르가 죽는 날
실존적 불안으로 평생 고독하지만, 존재성을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 -> 변신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폭압적 현실 -> 변신 원인
변신은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


특이한 사건을 예사로운 일처럼 묘사 -> 실존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임
절망적 세계 속 소시민 생활 상징


우화적, 가족공동체 해체, 현대인 소외, 소통 불가의 논제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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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 

베티스알파, 공기관 문학 칼럼, 언론 리뷰 등을 읽고 정리했다. 실존으로 해석하는 이도,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이도,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이도 있었다. 고전은 고전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과 내 글을 비교했다. 몇 가지 하고 싶은 말


분량

나는 중단편이라고 했고, 위의 글쓴이는 중편이라 했다. 중편이다. 원고지 몇 매 분량이 중편과 단편의 기준인지 모른다. 이 정도면 그 사이라고 생각했으나, 완벽한 중편 카테고리인가 보다.



부조리

나를 허무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세상이라 해석했고, 실제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있다. 그러나 내가 쓴 부조리는 조금 다른 시각이다. 

나는 쓸모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개인이 느끼는 비인격적 불합리함(자본주의 국가/ 산업화된 세상)을 부조리로 사용했다. 큰 맥락에선 비슷하지만, 가까이 보면 다르다. 


벌레가 된 이유

나는 인간의 실존을 느끼게 만드려고, 인간의 선천적 실존을 깨닫게 만드는 수단 =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사회의 폭압에 견디다 못한 주인공의 도피로 봤다. 그럴 수 있겠다. 둘 중에 내 해석이 조금 더 신박한 것 같다. 


존재 부정

자신이 끝까지 믿었던 동생이 자신을 부정하자 그레고르는 죽는다. 

'오빠라면 저렇게 집에 버티고 있지 않았을 거야. 저 벌레는 오빠가 아니야.' 그렇다면 타인에게 자유롭고 본인의 존엄이 중요한 그레고르라는 나의 해석에 무게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동생의 믿음과 사랑이 나를 나로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근거였다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1. 공교롭게 시간이 맞았다. 혹은 2. 새출발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레고르의 사망을 기점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로 받아들인다면 나의 해석을 밀고 나갈 수 있다. 


판단 근거

내가 주목한 판단 근거들을 그들도 사용했다. 나의 해석 툴은 주류의 툴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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