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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Oct 20. 2018

달변가는 정의롭다 외 여러 편

띤떵훈 조각모음

오늘도 조각 모음 시간이 돌아왔다. 브런치에는 올리지 않지만, 평소에 꾸준히 글을 쓴다. 그렇게 나온 글들의 면면을 본다. 브런치에 공유하기엔 수준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수준을 덩어리로 모으면 그나마 용서해줄 수 있다. 안 팔린 상품들 모아서 럭키 박스로 파는 기업의 상술 같은 것이다. 파티션을 나눠 쓴 날짜와 제목을 상단에 기재하겠다. 




10월 20일


달변가는 정의롭다.


나는 유튜브 중독이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멍하니 컴퓨터 스크린을 본다. 유튜브가 입맛에 맞게 선정한 비디오를 끊임없이 시청한다. 기가 막히게 취향을 분석한 알고리즘이 지치지도 않고 재미를 준다. 교육 자료를 시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 병신 취급받지 않으려면 영어로도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절름발이 영어를 사용해 최대한 합리적인 문장을 만들고자 한다. 절름발이 치료를 위해 eloquent speaking이란 키워드를 입력했다. 유튜브는 내게 벤 샤피로란 인물을 소개하여줬다.



우리나라에 진보 미친개 진중권이 있다면, 미국엔 더한 놈이 있다. 나는 배움이 적고 몰상식해서 토론에서 매너를 덜 차리는 사람이 좋다. 강경한 어조를 사용해 적극적으로 상대를 조롱하는 인물에 끌릴 수밖에 없다. 물론 전제는 철저히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납득할 수 있다. 진중권이 그렇다.

 상대 병신 만들기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벤 샤피로는 미국의 진중권이다.



진중권과 차이점이라면, 그는 영어를 쓰고 보수주의자이며, 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보니 공통점이 되려 적다. 내겐 논리적이며 냉소적이고, 상대의 주장을 철저히 짓밟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큰 줄기를 관통하는 사실로 진중권과 벤 샤피로를 같은 범주에 포함시켰다. 


우선 벤 샤피로와 내 가치관은 크게 다르다. 나는 진보고 그는 보수다. 낙태나 트랜스젠더, 인종차별을 필두로 한 각종 차별 등을 대하는 태도가 반대다. 예를 들면 산모의 인권을 위해 낙태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나 vs 어떤 이유로든 낙태는 살인이고 해서는 안 된다는 그가 있다. 나는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이 몰락하길 바라는 마음이 없다. 되려 항상 반대 입장이 있어야 사회가 건강할 수 있다는 쪽이다. 과도기를 거쳐야 어떤 결론이던 더 논리적으로 탄탄한 결정 의의를 갖게 된다. 내가 벤 샤피로를 보며 느낀 감정은 세상에 균형감을 위해 적절한(강력한) 상대라는 점과 경외심이다. 



지난 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는 합리성에 집착한다. 논리를 추종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묘한 불쾌감을 갖고 있다. 감정은 불공정함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논리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학이나 수학은 되려 비논리를 공고히 하는, 불합리를 생성하는 원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같은 재료를 사용해서 자기가 편한 대로 해석하고 남을 납득시킬 수 있다. 여기서 부조리가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논리에 적개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상대에 상응하는 주장과 근거로 무장해 공정하게 붙어야 한다. 


벤 샤피로는 달변가다. 어떤 공격을 받아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배우가 대사 치듯 막힘없이 반격한다. 판례와 통계, 과학적 근거를 사용해 상대 주장을 받아친다. 또한 복잡한 사례를 근본적 물음으로 끌고 가서 상대를 자가당착 하게 만든다. 낙태를 찬성하는 상대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가정한다. 


상대) 만약에 강간당한 장애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고 칩시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아기를 키울 능력이 없고, 만약 출산을 한다면 학업과 커리어를 쌓는 게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출산은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낙태를 반대합니까? 그녀가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벤 샤피로) 우선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슬픈 시나리오를 상정해주셔서 몹시 감사합니다. 그녀는 장애인이지요? 혹시 그 시나리오에 유방암까지 넣으면 어떨까요? 제 답은 그럼에도 낙태는 안 됩니다. 우선 강간 피의자를 잡아 지독한 형벌을 줘야 합니다. 그러나 낙태가 가진 도덕적 문제는 필요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본질로 끌고 와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태아가 생명인지 아닌 지입니다. 생명으로 나누는 기준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준은 모호합니다. (각종 통계나 리서치를 제시) 이런 이런 의미에서 태아는 생명입니다. (본질적 물음에 답) 물론 우리는 예로든 비참한 여성이 사회적으로 온전히 성장할 수 있게 돕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1. 끔찍한 일의 해결책이 다른 끔찍한 일(태아 살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한계적 상황을 상정해 논쟁에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강간에 따른 낙태의 경우 1%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에 유행처럼 번지는 실제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99%에 대한 이야기를 합시다. 이 99%의 상황에서 낙태가 안 된다는 입장에 동의한다면, 예외적인 1%의 상황에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입장이 아닌 것 같군요. 예외적 경우를 이용해 저를 시험하고 죄책감 갖게 만들어 낙태를 지지하려는 것이죠. 우리는 여성을 동정하는 것처럼 태아도 동정해야 합니다.



낙태를 찬성하지만, 이처럼 확실하게 논리적으로 즉흥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그의 말하는 방식은 경이롭다. 그리고 정의롭다. 감정에 호소하는 게 아니고 철저히 논리적 언어로 공정하게 대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달변가, 즉 정의로운 인물이다. 정의롭고자 한다면 똑똑해야 하고, 그 똑똑한 생각을 논리적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정의롭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의로워야 한다. 내가 책 읽고 쓰는 이유다. 







10월 20일



단어에 가치 판단을 유보해 (매일 20분 게시판)



 1:29


그저께 도서관에서 멋진 신세계를 빌렸다. 이번 주 학원을 전부 빼서 여유가 있었다. 책도 몇 권이나 읽었다. 우선순위에 있는 책을 완독 하고, 오늘 멋진 신세계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신박하다. 


우리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선 현재 존재하는 단어에 포함된 이미지를 가치중립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최근에 어딘가에서 읽었다. 흥미로웠다. 맞다. 대부분의 단어에는 가치가 들어가 있다. 긍정적인 단어- 사랑, 용기, 우정, 신의, 행복, 친구, 노력, 열정, 끈기 같은 직관적인 것부터, 밑동, 환기, 수건, 햇빛 등의 한번 회전해서 오는 것들이 있다. 부정적으로는 방탕, 쾌락, 섹스, 난교, 강간, 소아성애, 불륜, 무열정, 무질서, 가난, 장애 등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 문화에서 살면 오랜 시간이 만들어온 이미지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멋진 신세계는 이런 이미지가 반대되는 세상을 그렸다. 난교와 몰개성, 인간의 도구화, 감정억제, 유전자 통제를 통한 인간의 우열 나누기 등이 긍정적이다. 대량생산의 상징적 인물인 포드는 소설에서 신이다. 도구화 산업화 기계화 몰개성화 등을 만든 그가 신세계가 따르는 가치다. 우리가 일부일처제에 당연함을 느끼고 도덕적이라 판단하듯, 소설에선 난교와 다자 연애, 감정억제, 인간의 도구화 등이 도덕이다. 절대적 권위를 만들고 계급에 수긍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과 정반대의 기준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셈이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모든 단어와 표현에 가치중립이 되어야 한다. 정말 합리적이고 그럴듯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이야기다. 단어의 의미가 반대로 변할 순 있어도 가치중립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물이 존재하는, 여건에 따라 인상이 변하는 사물은 차치하고도 관념이라면 우리는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직관적인 이미지가 있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한다. 믿음은 숭고하다. 헌신은 마땅하다. 불법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두 명의 여인을 사랑해선 안 된다. 관념은 중간이 없다. 


멋진 신세계는 새롭다. 왜냐? 우리는 우리 세상의 관념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보면 다소 판단이 다를 순 있지만, 덩어리로 보면 하나의 합치된 가치판단을 한다. 우리의 기준으로 멋진 신세계의 철저히 통제되는 인간의 감정마저 효율을 따지는 공간이 부조리의 온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유를 멈추고 싶지 않다. 멋진 신세계의 사람에게 우리는 부조리하다. 물론 올더스 헉슬리의 입장은 산업화, 몰개성화하는 시대에 반발하고 자신을 찾자는 함의를 책에 공공연히 넣었다. 나는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 그 위에서 여기와 저기를 조망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현실에 존재하는 관념을 더욱 공고히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의 이미지에 가상의 적을 만들고 일견 공고해 보이는 그들에게 반발하게 만든다. 책장을 넘기며 부조리의 몰락을 지켜보는(아직 끝까지 보지 않았으나 그의 문체는 우리 관념 반대에 매몰차다) 우리는 승리감을 만끽한다. 정의(우리의 입장에서)는 이긴다. 정의는 주관적인 것이다. 우주에 지적 생명체는 무한히 많다. 우린 그 종 중 하나이다. 모두가 다른 정의를 갖고 있다. 정의는 승자의 논리다. 결국 자유와 계급의 철폐, 사회주의 혹은 수정자본주의가 당연히 귀결되어야 하는 하나의 도착점이 아니다. 그런 사회가 와도 변화는 계속되고 가치도 변할 것이다. 완벽한 독재자가 와 우리의 감정마저 통제한다고 가정하다. 멋진 신세계의 세상처럼 조작을 통해 우리는 슬픔을 느낄 수 없고, 행복은 증폭된 상태로 느끼며, 이타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차별하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하며 정신적으로 충만한 상태가 된다. 기술의 진보도 어느 정도에서 멈춰 환경을 보존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우리 기준에 반한다. 뭐? 인간의 감정을 조작한다고? 미친 자식들. 부조리야!!!라고 외치는 우리 DNA에 있는 문명의 관성. 그러나 그것이 정답일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을, 정신적 충만을, 성취감을, 사랑을 느끼려고 산다. 아마 이는 어떤 생명체든 공유하는 가치일 수 있다. 아닐 수도 있고. 최소한 인간과 비슷한 사고체계를 가진 종에겐 통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예로든 조작된 세계는 행복의 극단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글마저, 세상에서 내 기준을 가져라. 비판적으로 사고해라. 항상 권위가 반기를 들어라.라는 지적 명령을 학습한 결과일 수 있다. 학습은 통념을 더욱 공고히 할 수도, 벗어나기에 더 좋은 소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뭐가 됐든 문명의 노예고 완벽히 독립된 가치판단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내가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쪽에,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이, 라캉으로 말하자면 쾌락의 법을 추구하는 것이 죄악일 수 있다는 의견에 힘을 싣고자 한다. 



1:54







10월 14일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감상



 어제오늘, 친구들과 일박 이일로 시골에 머물렀다. 방금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정신없는 틈에 책을 읽었다. 아침을 먹고, 다과를 즐기는 동안 따로 행동한 셈이다. 지문으로 보니 사회성 몹시 떨어지는 아웃사이더 같다. 그러나 나 없이도 즐거이 대화를 하는 분위기여서 굳이 책을 덮을 필요를 못 느꼈다. 어쨌든 책은 재밌었고, 우리는 서로 알차게 시간을 보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우선, 한마디 평을 하겠다. 깊이가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두 마리 토끼 다 잡은 책이었다. 초반엔 다소 과한 표현으로 개연성을 의심했다. 자기 글에 도취한 느낌으로, 나와 다른 감정선을 잡은 채 저 멀리서 달리는 느낌이었다. 요조라는 캐릭터의 쓸데없는 타인과의 거리두기는 흥미로웠다. 쓸데없는이란 수식은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고, 이런 문제를 가진 이들의 고민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의 상황에 몰입하면 합리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것이다. 고로 초반의 거리감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그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거리감을 다시 좁혔다. 진행됨에 따라 납득하게 됐다.


본격적인 분석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단지 읽었을 때 느낀 단상을 화면에 옮기는데 만족하고 싶다. 누군가의 생각 없이 온전한 나의 감상을 다루고 싶지만, 이미 책 후미에 역자가 출판된 배경을 말해줬기 때문에 그 정보가 판단에 다소 반영됐다. 그렇지만 그 이외의 비평은 보지 않은 상태다. 남의 생각을 내 것처럼 말하는 것은 멋지지 않다. 나는 멋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책을 소화하겠다. 소화된 결과물을 독서모임에 가져가서 다른 이와 나눠야지. 키워드로 글을 진행하겠다.


요조

요조는 타인과 진실로 엮이고 싶지 않아 한다. 이유는 너무 무거워서. 그 깊이, 혹은 진의를 이해할 수 없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실망시키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건들로 인해 평생 부채감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적당히 호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채득 한다. 1. 타인이 원하는 나를 연출하고, 2. 익살을 떤다. 그 예로 어린 나는, 막내로서 엉뚱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당위를 갖고 있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출장 오는 길에 선물을 주려할 때, 그는 갖고 싶지 않은 장난감 탈을 달라고 한다. 그가 실망할까 두려워 완벽에 가까운 막내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장난감 탈을 받아 들고는 온갖 재롱을 떤다. 

 어쩔 수 없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리게 됐다. 이는 너무나 완벽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의 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타자 a(여기선 아버지)의 이상을 완벽히 안다는 착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가 생각하는 완벽한 막내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문명화 시대를 사는 우리의 숙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요조는 그 정도가 심하다. 모두에게 강박처럼 맞추고 완벽한 상대가 되려 한다. 그러나 후엔 그가 꼭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정반대의 남을 파멸로 이끄는 삶을 산다. 남의 욕망을 오독한 자의 최후로 봐도 무방하다. 

그는 삶을 사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실제 예처럼 상대만 죽고 자신은 살아남는다. 알콜 중독, 몰핀 중독에 빠져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처음 남에게 모든 걸 맞추는 나의 모습과는 반대로, 실존주의 작가들이 다루는 인물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떠나려 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친구의 역할도, 정부의 역할도, 직업인의 역할도, 애인의 역할도, 아버지의 역할도, 남편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단지 그 무게를 탓하며 도망칠 뿐이다. 요조란 인물을 실존으로 읽으려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은 실존의 본질과 정반대인 수동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실존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조는 실존적 인물이 아니다. 자살도 혼자 못 하는, 무능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는, 비겁하고 죄 많은 인물이다. 첫 번째 수기 첫 문장처럼 부끄럼 많은 인생을 산 장본인이다. 

그런데 왜 그에게 끌리는 것인가. 현실에게 도망치기만 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합리화하는 나약한 겁쟁이를. 그것은 인간의 어떤 점과 닮아서이다. 가끔 자신에 부여된, 타인의 기대가 벅차다. 피하고 싶고, 모른 척하고 싶다. 또한 인간관계의 부질없음이나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느끼게 될 때도 있다. 그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이어서 더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다. 20세기 초, 일본은 열강이 되고자 서구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전통적 이상적 인간상을 신 세기의 것과 적당히 섞어야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인간은 그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도구인지, 작가는 계속 고민하고 좌절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에 내재된 전통의 가치가 새로운 세대의 가치에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본질을 혐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르크스

나(요조)는 별생각 없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는 중요한 직책에 올라, 위험도가 높은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나중엔 가족의 이해관계, 자신의 위험을 이유로 밀고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한다. 포기할 때 그 이념과 정반대의 행동을 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정당화를 했던 것일 수 있다. 소설을 수기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 말인즉슨,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이다. 수기의 모든 것이 진실이라 볼 수 없다. 후에 편집한 내용, 담고 싶은 내용만 담는 것이다. 그가 정말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일인 듯 관망하듯 했을까? 실제 사회주의 이념을 깊게 이해하고 행동했다면, 배신했을 때 느꼈을 좌절과 자기혐오는 상당했으리라. 또한 부르주아로서, 자신의 신분이 이념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혁명을 통해 체제를 전복해야 하는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전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순된 삶을 상징한다.



나는 왜 극단적으로 사람을 무서워하는가?

나의 진심을 알아버리는 이가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익살 뒤에 있는 원래 얼굴을 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추론했을 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원죄 때문일 수 있고, 서양과 일본의 가치가 충동하는 지점에서 어느 하나 취할 수 없었던 막연함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왕 태어났기에 나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 나는 있어선 안 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진심은 존재의 죄를 드러낼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갈 숙명이었다. 



여기까지? 일단 남의 글 봐야지.







10월 5일



혼술 혼잣말




날이 좋아 혼술 하러 단골 술집에 왔다. 책 읽으면서 홀짝홀짝 잔을 비웠다. 취기가 오르니 옛날 생각도 나고 누군가 붙잡고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나는 '혼술' 중이라 말을 해도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다. 그래도 블로그는 듣기 천재라 내가 말하는 걸 온전히 들어준다. 



술 먹고 한 생각은 여러 가지다. 옛 연인 생각을 해봤다. 그때 느끼는 행복감은 높았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미성숙한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과장된 감정이 있다. 물론 내가 성숙하단 뜻은 아니다. 다만 지금 내가 그때 겪은 일을 그대로 겪으면 그만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단 확신이 있다. 나는 전에 비해 무던한 인간이 됐다. 감정의 진폭도 좁고 소비가 주는 행복도 체화했다. 더 이상 5천 원짜리 오모리 찌개에 감사할 수 없다. 일주일에 한두 번 여자 친구와 기분 내려 외식했다. 이제 한 끼에 더 많은 돈을 쓰지만 기분은 나지 않는다. 외식은 일상이다. 



지금도 3만 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한다. 반주 곁들인 점심값으로. 그러나 부담스럽지 않다. 왜? 매일 이렇게 먹으니까. 돈 적당히 버니까. 몇 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다. 4시간 일하고 30만 원 버는 삶을. 그래도 인생은 즐겁다. 기준이 늘어 즐겁기 위해 필요한 리소스가 는 것 빼고는.



알콜 덕에 책을 더 음미하게 된다. 몹시 느린 속도로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멈춰 생각한다. 허지웅쓰 내 관념의 친구 지웅찡이 내 나이 무렵이었을 때 쓴 글을 읽었다. 이명박 정권에 맞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 당시 나는 이명박 정권의 방패로 시위대와 대치했다. 과거를 돌아보니 졸라게 권력자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심취했었다. 시위자 개객끼들. 전문 선동꾼들이 나의 잠을 방해한다고 믿었다. 몇 시간 못 잔 이유가 그들이었다. 나는 사유할 수 없었다. 왜? 무식해서 왜? 사유하면 버틸 수 없어서 왜? 귀찮아서 왜? 이 한 몸 건사하기 어려워서. 군대는 정말 잣 같은 공간이다. 글자 좀 읽어야만 잣 같은 진짜 이유를 깨닫는다. 나는 부품 1이었다. 



나는 누굴까 물으면 붕 뜨게 된다. 나라는 존재의 가벼움과 완벽하지 못한 신분 탓이다. 물론 호주인과 결혼해 시민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누군가에 의존한 생존 가능성은 나의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그녀와 헤어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되려 내 힘으로 호주 시민증을 따야 됐을까? 아니. 그렇다 해도 내 영혼의 안식은 없다. 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도입부처럼 세상을 떠도는 한 유령일 뿐이다. 어떤 공간도 나의 존재를 규정하고 영혼의 안식을 제공할 수 없다. 나는 무식하지만 자의식 넘치는 주변인이다. 나를 국가로 규정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세상에 떠도는 아무개로, 죽어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간다. 우리 아버지와 와이프가 몇 달 슬프겠지만 그 정도.



어제 유명인이 되어 생기는 장단점에 관해 영작을 했다. 아이엘츠 쓰기 파트 토픽이었다. 나는 유명해지면 돈도 졸라 쉽게 벌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인생을 긍정해주면서 후에 더 크게 부정했다. 나의 자유가 없기에. 더 먼 곳으로 가서 더 비싼 음식을 먹고 더 많은 이들에게 예쁨 받아도 도망칠 곳이 없다는 비극을 말했다. 나는 공공연히 아이돌이 될 수 있다면 되겠다 말했다. 그러나 전제는 결국 정체를 숨기고 외국에 잠적하겠단 믿음이었다. 내가 유명인이었다면 지금껏 수백 번 까이고 매장당했을 것이다. 내가 블로그에 쓴 논란 가득한 글을 통해. 나는 정제된 몇 가지 발언만 할 수 있다. 연예인 할 수 없어. 



이제 곧 학원 타임이다. 30분 내로 출발해야 한다. 밥 먹고 싶으니 일식집 들려야지. 그러려면 남은 맥주를 15분 안에 끝내야 한다. 마시고 가자. 아 좋다.







10월 3일


허지웅 에세이 (매일 20분 게시판)



2:42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The following items will be due soon이니까 Renew 하거나, return 하세요. 나는 빌린 책 2권을 떠올렸다. 쓰기의 말들과 허지웅 에세이. 읽을 책이 많다며 우선순위를 뒤로 한 허지웅 에세이가 이제야 생각났다. 반납을 위해 책을 찾았다. 와이프가 읽다만 그 책을 침대 한편에서 발견했다. 안 자도 안 읽고 반납하기 죄스러워 몇 장 읽기로 했다. 초반 몇 편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 예정을 바꿔 반납일을 갱신하고 책을 챙겨 카페에 왔다.


허지웅이 아버지 관련해 쓴 에세이는 인터넷에서 유명하다. TV에서 주야장천 나와 연애 얘기하던 연예인이 낯선 어투로 극단의 사생활을 능숙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허지웅에게 글 좀 쓰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생겼다. 구글에 허지웅 아버지 에세이를 치면 볼 수 있다.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찾아보길 바란다. 한편 그의 글 실력을 의심한 적도 있다. 그는 한때 SNS 활동을 열심히 했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생각을 나눴다. 유명인이 된 시점이라 유명세를 낭낭히 치러야 했으나,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패기는 인정하나, 돈 받지 않고 쓴 글이라 그런지 정돈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가 직업인으로서 쓴 글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글을 잘 썼다. 글을 평가할 때 가치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내 기준에서 그는 괜찮은 작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솔직함이다. 나도 철판 깔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려 노력한다. 솔직한 글 쓰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질문. 그의 진실성을 어떻게 단언하냐? 글 좋아하는 사람이 느끼는 어떤 기준점이 있다는 논리적이지 않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나한텐 그는 솔직했다. 적당한 유머와 숨길 수 없는 허세스러움도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허세란 단어가 주는 아이러니가 있다. 허세는 실제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양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솔직함과 허세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냐? 그의 허세로운 행동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했기에 가능했다. 말장난 같지만 허세를 허세로 표현하지 않고, 허세를 진실로 표현했다. 


몇 편을 읽으면서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쓸 수 있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 에세이를 안 썼네. 여기 이 문장은 괜찮네. 상투적이지 않게 핵심을 잘 묘사했네. 나도 가능한데... 아 그래 글을 써야겠다. 대충 이런 식의 흐름이었다. 1/3 지점에 가름 끈을 꽂고 책을 덮었다. 자 그동안 내 안에서 쉬고 있었던 솔직함과 충동들이여 마음껏 뛰놀거라. 매일 20분 게시판에 그들을 방생한다. 허지웅 에세이를 향해서 글을 몰아간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는 게 좋은 글 아닌가? 허지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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