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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Oct 27. 2018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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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실격의 오바 요조는 인간이길 포기한다(인간을, 세상을 단념한다는 뜻이다). 소설의 영제 (No Longer Human)는 그 주제를 뚜렷이 보여준다. 인터넷에 있는 리뷰나 책을 주제로 한 팟캐스트 에피소드는 일정 수준 이상을 다루지 못한다. 자신의 과거와 책을 매치시키는 것,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 아쿠타가와 상에 관련한 썰을 푸는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책 아래의 어떤 것을 찾고자 한다. 요조의 심리 상태를 구체적으로 들여 볼 예정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고, 타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고통받았다. 

가족, 특히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아버지= 세상이다. 또한 문맥으로 볼 때 아버지는 일본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근대에 세상은 변한다. 일본은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온 나라가 변한다. 나라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그 과도기에선 요조는 근대 일본의 고민을 상징한 것일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로 시작하는 책은, 그렇다면 무엇이 부끄러움의 원흉일까를 묻게 만든다. 무엇이 그를 부끄럼쟁이로 만들었을까? 우선 거절하지 못하는 그의 성향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회에 쓸려 살며 자신을 잃고 고통받는다. 원치 않은 방향의 삶은 부끄럼이란 부스러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그가 느낀 괴로움은 실용적 괴로움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부끄럼이란 토픽에 마르크스를 끌어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자이 오사무 본인이나, 요조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심취한다. 공산주의는 재산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 형성 기반은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행동과 혁명이다. 이를 통해 자본가나 권력자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려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요조는 출신부터가 반공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본가이며 권력자이다. 혁명의 대상이란 뜻이다. 혁명을 쫓는 것은 자신의 가족을 무너뜨리겠다는 의지로 보일 수 있다. 자신이 몸담음 혁명 집단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순을 만든다. 결국 어디도 정착할 수 없는 사회 유목민 신분을 드러낸다. 



익살은 인간에 대한 요조의 최후의 구애다.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익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짓을 상징한다. 거짓으로 만든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익살로 자신을 드러냈던 어린 요조를 미뤄보아 그의 파멸은 예견됐다. 가족이 무엇을 생각하고,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어색함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익살을, 생존을 위한 익살을 떤다. 그 익살은 세상으로 확장된다. 


꾸중과 거절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본인의 진리를 거스른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사는 게 진리를 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을 텅 빈 존재, 바람이라고 표현하는 데서 그는 본질적으로 그 진리에 맞춰 살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존경에 대해 재밌는 구절이 있다. 그는 존경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에겐 완벽하게 사람을 속이다 간파당해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는 것이 존경이기 때문이다. 존경을 피하기 위해 장난꾸러기라는 가면을 쓴다. 익살의 변주다. 


인간 불신. 그는 자신이 받은 부조리를 고발할 수 없다. 처세술에 능한 누군가가 정의가 되는 사회라고 믿은 탓이다. 인간은 신용할 수 없는, 그의 표현으로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는' 존재다. 인간을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느끼는 한계다. 그가 중학시절 신세 진 하숙집 누나에게 책을 빌려준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 책의 의미를 볼 필요가 있다. 고양이는 사회에 섞이지 않으며 근대 일본을 주변인으로 지켜볼 뿐이다. 인간의 손에 길러져도 그들 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가져간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주변인으로서 자신을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주변인인 창녀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심지어 마리아의 후광을 본다. 동류에게 느끼는 안정감이다.


요조는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초중고를 다니며 애교심을 느끼지 못했고, 교가도 외우려 하지 않았다. 실은 자신이 동화되길 거부했던 것은 아닌가. 그는 이 세상의 합법을 두려워했다. 비합법의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자 했다. 그 자신을 음지의 사람으로 규정했다.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놓고 자신은 굳이 이해하려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신에게 냉철한 의지를, 인간의 본질을 보는 능력을, 거절하고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고뇌하는 입체적 인간이다. 


시게코를 떠난 이유를 보자. 그는 시즈코와 그녀의 딸 시게코에게서 안정을, 행복을 느낀다. 시게코는 자신을 아빠라 부르고 진짜 아빠가 되어줄 것을 원한다. 그는 남이 자신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두려워지고 멀어져야 하는 기벽을 갖고 있다. 평생 온전한 관계를, 행복을 느낄 수 없단 의미다. 자신의 존재 근거가 거짓인데 진실된 관계를 가질 수 없단 나름의 정의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 완벽한 신뢰를 찾고 정착하려 한다. 요시코는 완벽한 신뢰의 상징이다. 그러나 신뢰가 더럽혀지며(강간당하며) 그는 좌절한다. 신뢰도, 불신도 택할 수 없는 난처함이 그를 알콜 중독, 정신병원 수감으로 이끈다. 


중반을 넘으면 그는 다소 세상의 특성을 깨닫는다.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세상은 자의적이고, 이기적이며, 언제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고 다소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확장된 생각이 죄와 벌을 두고 한 담론이다. 죄와 벌이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란 질문이 따랐다.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멋대로 만든 도덕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결국 해탈한다. 어떤 것도 택할 수 없는 상황(신뢰냐 불신이냐)과 저항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상황을 지난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 세계의 유일한 진리가 그것이다. 


소설의 구조는 작은 희망 뒤에 큰 절망이 따르는 패턴의 반복이다. 인간을 신뢰할 수 없고, 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요조는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기대와 사회에 속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소극적이며 느리다. 자신이 수용 가능한 범위에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간략히 순서를 정리하면,


 어린 요조는 자신 같은 인간은 세상에 속할 수 없다고 믿었다. 세상을 불신하는 그지만 최후의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익살을 통해 세상과의 마지막 끈을 잡고 있다. 그런 와중 세상을 바꾸자, 우리가 더는 주변인이 아닌 곳으로! 를 슬로건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한다. (희망)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인지한다. 가족에 적의를 드러내는 행위를 포기한다(절망) 나를 품어주는 행복한 곳, 챙겨줄 사람이 있는 곳을 찾는다. 시즈코, 시게코 모녀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희망)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의 인간, 그 속의 존재 근거가 거짓이기에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떠난다. 행복하면 떠나야 하는 기벽으로 드러난다.(절망) 그 뒤 알콜 중동자가 된 그를 챙겨주는 것이 요시코다. 인간 세상에 불신으로 가득 찬 요조는 처음으로 사람에게 신뢰를 하게 된다. 요시코로 대변되는 절대적 신뢰를 수용하고자 그녀와 결혼한다. 또한 세상이 인간과 닮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절대적 규율이나 진리가 없는 곳으로 자신이 속할 수 있는 곳이란 믿음이 싹튼다. (큰 희망) 그러나 요시코는 강간당하고, 세상은 절대적 신뢰마저 부서질 수 있는 곳임을 깨닫는다. (절망) 그는 모르핀 중독이 된다. 그런 그를 돕기 위해 넙치와 친구 호리키가 찾아온다. 그들의 선의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나 그들이 향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짧은 희망과 절망) 신뢰는 죄입니까? 무저항은 죄입니까? 라며 그는 신에게 묻는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란 뜻이고, 인간일 수 있는 자격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기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 인간과 세상을 단념한다. 


인간실격은 인간이길 포기한 한 남자의 일대기다. 정확히 말하면 파멸하는 과정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오바 요조의 입을 빌려, 왜 인간이길 포기해야 했는지 나름대로 항변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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