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상상하기 귀찮으면? 비평

by 띤떵훈

[김선우의 문화 포커스] 상상하기 귀찮으면?

김선우(문화 칼럼니스트)

성인 대상 외국 문화 특강을 하다 받은 질문 하나.
“신문에서 보니까 인도에서는 소를 신성시한대요. 차도에 소가 누워 있으면 소가 비킬 때까지 차가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왜 그런 거예요?” “이유는 둘째 치고요, 다른 나라에서는 소가 길에 누워 있으면 밟고 지나가나요?”
“......!” 천진함을 당혹감으로 바뀌게 해 죄송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인 걸 어쩌나. 언론이 외국의 희한한 풍경이라도 되는 양 내보내는 화면이나 기삿속 사진을 무비판적으로 보고 그냥 넘어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 사고와 판단을 못하게 되는걸.
중국에 자주 여행 간다는 삼국지 마니아 L씨.
“김 선생, 난 중국에 관심이 많아요, 중국은 한국과 오랜 역사적 관계가 있고 가까운 사이잖아요.”
“중국에 대해 많이 아시겠군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몇 나라지요?”
“아니, 그런 건 왜......”
문제는 중국 사람들도 우리에게 각별한 친근감을 느끼느냐이다. 누구든지 개인의 로망이 있기에 자신이 보고 싶은 환상을 타자에게 투영하게 마련이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타자를 공정하고 평등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게 함정.


- 실제 사례를 통해 인간 사고가 얼마나 편협하였는지, 자기중심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대화문으로 재밌는 시작이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쉽고 유쾌하게 썼다. 유머는 글에 활기와 흥미를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한다. 유머감각에 끝까지 재밌고, 흥미로울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모두 15개국, 그 대부분이 중국과 오랜 역사적ㆍ문화적 친연 관계를 갖고 있다. 중국은 그 옛날부터 로마, 인도, 동남아, 심지어는 아프리카와 관계를 맺어오고 있으며 그들 입장에서 한국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중 관계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특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중국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거부한 채 중국만 바라보던 우리의 소중화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바탕에는 사대주의와 배타적 우월감의 자웅동체가 있다. 아울러 중국에게 경제와 정치, 자원과 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15개국은 매우 중요한 동시에 자국의 이해를 위해 희생시킬 수 있는 그런 대상일 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간단한 생각조차 못한다면 지는 거다. 짝사랑도 유분수 아니겠는가.


- 중국이 우리와 특별히 긴밀하다는 착각을 주제에 대한 사례로 사용.


진시황이 서불에게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해서 서불이 제주도와 일본 남부에 도착하여 “徐市過此(나 서불, 여기 지나간다롱~)”라는 글을 바위에 남겼다는 전설 자체가 고대의 한중일 해양교류의 흔적이라면서도, 중일 직접 교류에 대해서는 안 가르치다 보니 우리의 상상력은 한반도 밖을 보지 못한다.


- 서불의 이야기는 이 주제에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교육의 예로써 사용했는데, 적합하지 않다. 한국 교과서가 논리적이지 못 함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주제를 보충하고 강조할 도구로 예를 사용한다. 상대에게 쉽고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장치이다. 하지만 온전히 핵심을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되려 글의 흐름을 망친다. 이처럼.


개구리가 있어야 할 곳이 우물 안만은 아닐 텐데, 그럼에도 그런 배타적 우월감을 길러준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또 어떤가. 일본의 문화는 다 우리가 전해줬다는 식의 국수적 역사관은, 물론 강대국에 기죽지 않고 20세기를 헤쳐나오기 위해 자신감이 필요했다 치더라도, 우리의 세계관 자체를 비뚤게 만들었다. 지난 시대에 모든 학생들이 왕인 박사가 서기 몇 년에 일본에 뭘 전해줬는지를 외워야 했지만, 정작 교과서의 어디에도 일본과 중국이 바다를 통해 직접 문화 교류를 했다는 얘기는 없다.


- '개구리가 있어야 할 곳은 우물만이 아니다' 란 비유는 인상적이다. 랩으로 치면 펀치라인이다. 속담을 입맛에 맞게 변형해서 사회를 비판한다. 교과서, 한국의 교육은 국수주의자를 만드는 환경임을 지적한다.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학생 1로 동의한다. 학업 성취도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이란 제도가 생기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맹목적인 암기가 필요하다. 창의성을 기르라 주창하지만, 실상 학생들을 위해 차려놓은 밥상은 편식을 부른다. 논리력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주장을 말했다면 필히 충분한 근거가 필요한데, 뒷받침이 부족하다.


미상불, 우리는 교과서 밖의 진실에 대한 상상을 못하게 길러졌다. 그런 상상을 해서 질문이라도 할라치면 시험에 안 나오는 거나 물어보는 ‘수업방해분자’로 찍혔다. 조국‘군대화’의 시기에 하라는 일 안하고 다른 상상을 하면 ‘빨갱이’로 몰렸듯이 말이다. 물론 필자도 60만 대군이 있다면 국민의 동의를 쉽게 끌어내 경제발전 팍팍 할 수 있고, ‘교권’을 부여받는다면 학생들을 모두 S대에 보낼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상상은 지난 세기에 충분히 다 시도해 봤으니 이젠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 미상불: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우리 세대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다양한 어휘 사용은 글을 풍요롭게 하니, 의미가 잘 맞는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용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남용한다면 일일이 국어사전을 찾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조미료 역할의 빈도라면 환영할만하다. 한국 교육을 비판한다. 스승과 제자의 일방적인 가르침, 다양성의 부재, 강제성에 대해 쓴소리.

아무튼 교육 현장이 그러했으니 우리 인식에 바다는 애초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히 일본이 한국보다 “3배 정도 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이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바다는 왜 안 보는 것일까? 지금도 일본이 태평양의 조그만 섬들에 퍼붓는 경제적 지원이나 보유하고 있는 정보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바다가 우리 인식에 없다 보니 해남에 가서도 ‘땅끝’을 보려 한다. 그곳이 왜 땅끝이란 말인가, ‘바다시작마을’일 수도 있는데. 또는 바다가 끝나고 땅이 시작되는 곳임에도, ‘중앙’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곳은 그저 땅끝일 뿐이다. 하긴,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보니 제주도의 말은 길러줄 사람이 없어 모두 야생마라는 이 중앙집권적이고도 기계적인 세계관이야말로 우리 상상력의 빈곤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우리 인식의 가시범위가 짧은 이유를 교육제도에서 찾는다. '땅끝마을', '야생마' 두 단어로 본 우리 상상력의 빈곤함. 사유의 부족함을 보여주기도 하다. 덕분에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거기에서 나온 배타성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결국 화자가 꼬집고자 하는 주제는, 한국인의 상상력과 사유, 비판능력 부족이며, 그 원인을 교육 시스템에서 찾자는 것.



조금만 생각해 봐도 뭔가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을 텐데도 우리는 참 생각하기 싫어한다. 부모 노릇 잘했다는 증표가 되어주는 Y대학의 입학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나비를 공부한 학생이 다른 과목 점수가 좀 모자랐지만 합격을 했더란다. 그랬더니 그 소문 듣고 이집저집 다 나비를 공부시켜서 이듬해에 그 대학에 원서를 넣게 했다나. 뭐 그러니 온나라에 치킨집과 커피집 천지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남하고 다른 생각하면 큰일난다. 남들 뒤통수만 보고 달리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남들을 앞선단 말인가! 될성부른 나무는 미리 잘라야 하고, 아기장수도 일찌감치 죽여야 한다. 이것이 지난 몇 백년간의 우리 문화가 되어온 것은 아닌가 자문한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재기발랄한 상상을 막는다면 우리는 늘 다른 사회를 뒤따를 수밖에 없다.


- 비꼼에서 유머가 나온다. 글 전반에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하며 유머를 사용한다. 재기발랄한 상상을 막는 것이 검증이고, 이 검증은 시험이 될 수도 있고, 주류에 포함되길 강요하는 우리의 태도나 사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 하면 남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선두에 설 수 없다.


이런 식의 제한된 상상력은 전 세계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소모적인 찬반논쟁에 열중하게 한다. 외국에서 동성결혼을 한 사람들이 한국에 이민 오게 되면 그들의 법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를 논해야 하는 시기조차 지나간 이때, 우리는 초등학생들도 다 할 수 있는 찬반호오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 앞서 언급한 모든 문제점 탓에 우리 사회의 문제제기 능력마저 뒤쳐짐. 동성결혼 찬반을 예로 사용. 흠, 글쎄. 동성결혼 찬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소모적인 논쟁인 것일까?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편협한 사고의 사례일까? 아니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예로, 경고 2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표지판에 ‘Asian Highway’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길이 이어지면 부산에서 출발하여 포르투갈 리스본과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차로 달릴 수 있게 된다. 서해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여 중국과 직접 교통하는 계획까지 세워진 모양이니 교류의 확대라는 인류의 이상에 북한은 큰 장애가 아닌 모양이다. 아예 통일이 되어 몇 백년 만에 처음으로 걸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우리가 상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국경이라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 지도상의 관념임을 경험하는 것이 휘몰아치는 신고립주의 시대를 극복할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기획일진대, 그 바탕은 ‘상상’이다.


- 아시안 고속도로로 찾아낸 시대 문제를 극복하는 답, 상상력. 국경을 자유롭게 넘는 상상 = 실체 없는 관념을 인식하고 통찰하는 예. 흠... 상상력이 우리의 배타적인 사고와 사유의 부재를 극복할 결론으로 나옴. 아시안 하이웨이를 타고, 북한을 지나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화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상상이다. 삼진 아웃이다. 문제제기나 유쾌한 문체는 좋지만, 예를 드는 것과 사례를 가져오는 능력이 부족함을 느낀다. 겨우 고속도로 타고 해외여행하는 것이 화자가 할 수 있는 상상의 끝이라는 사실이 화자 김선우에 대한 연민으로 바뀐다. 한국의 빈약하고 철저히 배타적인 교육의 상상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여러분!이라고 의도한 문단일까? 그렇다면 소름 끼치는 문장력이겠지만, 앞서 실패한 사례들로 하여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상상하지 못하도록 길러진 사람들은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광복절이 다 똑같이 8월 15일이라는 사실 자체를 떠올리지 못한다. 일본이 한국만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절반을 집어삼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 너머로 생각이 뻗치지 못하고 그저 광복절은 우리만 있는 줄 안다. 생각의 크기가 작으니,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와 역사교과서 문제들에 있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연대를 할 생각조차 못한다.
“모든 일본인은 하나의 일본인”이라는 식의 이해 방식은 천황제와 과거사 왜곡, 성노예 문제를 반성하고 영토 분쟁이나 군국화에 반대하는 활동을 실제로 벌이는 일본의 풀뿌리 시민단체가 교토 부근에만 5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한다. 위의 문제에 반대하는 한국의 시민단체 전체가 명목상으로도 500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혁신의 시대, 누구나 혁신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비판력과 상상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을 하려고 하면 반사회분자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사사건건 어깃장이나 놓는 “좌파”요, “빨갱이”로 몰린다. 남들이 안 하는 상상을 하면 공상에 빠진 철없는 푼수 취급이나 한다. 그러면서 왜 정책이 이 모양이냐고 하고, 제품에 혁신이 없다고 투덜댄다. 상상 금지의 사회에서는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로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의 액수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이제 혁신은 IT 산업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서비스도, 정책도, 정치도 혁신해야 하는 시대, 기존의 발상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난다.


- 혁신의 사회에서 혁신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 주제를 정리했고, 다시 통념과 어긋나는 사실을 사례로 사용. 다행히 마지막 사례는 의도에 부합했다. 하지만 상상력이 없음을 계속해서 꼬집으면서도 구체적인 대응방안, 개선방안을 하나도 내놓지 못 했다. 결국 김선우의 문화 비평글을 정리하면,

'한국 교육 병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저런 편협한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자 상상력을 키우세요.'인데 가장 중요한 어떻게가 빠져있다. 사례 선정도 아쉬웠고, 결말도 뒤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하다. 초사이언3 손오공이 원기옥 모아서 태양권 쓴 것 마냥 맥이 빠지는 마무리다. 자 내가 문제제기했으니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봐라는 식의 무책임한 비평글이었다. 상투적인 교육 체계, 성적 매기는 방식의 개혁이라는 답안이라도 냈다면 이리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적당주의를 버리지 못한다면 김선우의 평론가 인생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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