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부하게 시작하지 말자. 너는 감성적인 글을 좋아하지 않으니 담백하게 쓸게. 코흘리개 시절이 엊그제 갖은데,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구나. 시간의 흐름이 가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경험의 부산물인 권태가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걸까? 우리는 경험한 것에 둔감하잖아.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 찬 어린 너의 하루가 점차 익숙하고 흥미롭지 않게 되는 거지. 롯데리아에서 처음 햄버거 먹은 날 기억나? 초등학교 2학년 때였지. 같은 반 친구 생일파티를 거기서 했잖아. 충격적인 맛.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존재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돈 없을 때 요기할 요량으로 사는 음식이 됐지. 너의 하루도 빠르지만 고요해졌어.
우리 철학적인 얘기 해볼까? 너 좋아하잖아. 어릴 때 ‘소명’이란 단어를 몰랐지만,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너의 낮은 지식과 경험으로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기 어려웠겠지. 세상의 주인공으로 태어났고,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 커 가면서 너 자신의 주인공일지언정 모두의 주인공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어. 현실에 수긍하며 소명이라든지, 존재 이유라든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게 됐지. 대신 외모를 꾸미는데 온 힘을 쏟았잖아. 늦게라도 이 질문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축하해. 지적 성장을 위함이 아닌, 평생 심심하지 않게 해줄 수수께끼를 얻었단 사실 말이야. 순간순간 정답이라 생각하지만, 그 답은 변해가겠지.
유아론을 알고 놀란 모습이 기억나. 시간 때우기용으로 장난스럽게 건낸 질문을 누군가 체계화 했다는 것이 신기했겠지. 그 헛소리가 철학이었고, 세상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였단 걸 누가 알았겠어. 아, 너 빼고 다들 알고 있었지. 철학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글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잖아. 물론 너는 여전히 애송이야. 어디서 선생질하면 단단히 혼내 줄 거야.
네 성격도 말해보자. 너무 평가하는 글이 되나? 오해하지 말아줘. 옆에서 지켜봤던 걸 말하는 것뿐이야. 맘에 안 들면 무시해도 괜찮아. 너는 자존감이 강하고 자만해. 하룻강아지인 네가 세상을 얕보고 있기 때문이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배움이 깊고 도량이 넓은 사람은 겸손하다고 해. 너는 만들어낸 겸손은 있지만, 태생적으로 네가 최고인 아이야. 아, 서른 살한테 아이라고 말하면 기분 나쁘려나? 난 그게 나쁘지 않다고 봐. 우월감은 한편으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에 흥미를 갖고 지속할 힘을 주거든. 그게 글쓰기가 될 수도 있고, 너의 사업이 될 수 있고, 학업이 될 수 있겠지. 현명하게 사용하고, 오버하지는 말았으면 해. 부끄러움은 네 몫이 될테니까.
글쓰기, 너의 오랜 취미지.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걸로 알고 있어. 읽는 것도 쓰기를 위한 것이라면, 여가의 절반은 쓰잖아. 전에는 쓰다 멈추거나, 글을 지웠었지. 네가 완결된 글을 쓸 수 있게 돼서 기뻐. 생각의 여정이 일정한 형식을 갖게 돼서 비교하기 쉽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내용을 보면, 고개를 젓게 돼. 너의 글엔 깊이가 없어. 특히 주제가 확실한 상태가 아닐 때, 엉성한 글을 많이 쓰지. 난 네 패턴도 알아. 주제에 대한 파편들을 휙 던져놓고 마지막에 수습하는 방식 말이야. 구성을 고민하지 않아도, 평타는 친다고 생각하지. 투자하는 노력을 돈으로 가정할 때, 가성비가 좋은 글이야. 하지만 그런 방식을 남용할 때, 남는 것은 별로 없을 거야. 어떤 것이든 투자가 많아야 얻는 것도 많잖아.
너는 돈은 좋아해. 명예욕도 강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해. 돈을 벌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지. 추진력이 강한 편이 아님에도, 돈이 오가는 일에서는 가진 것 이상의 배짱을 보이지.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 과할 때가 많아. 그것이 너를 속물처럼 보이게 해. 약한 사람이란 증거이겠지. 세상이 만든 기준에 맞추려는 모습을 보면, 깨는 부분이 있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자신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너의 좌우명과 정반대의 현실이야. 탈세속화를 꿈꾸며, 누구보다 세속화된 나의 친구. '걔 연봉은 얼마야? 차는 뭐 끌어? 부모님은 부자니? 그 회사는 얼마나 준대? 미래는 보장됐니?' 입에 달고 사는 질문이지. 너의 수입이 자신감이 된다는 것도 알아. 학벌, 외모 등의 물질적인 것과 너 자신을 동일시하지. 그중에서 돈이 가장 큰 부분이고.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두니까 말이야. 네가 만든 기준일까 아니면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기준일까? 너는 타인에게 지배받는 것을 못 참고, 강자의 논리에 종속되는 것을 싫어해. 설사 틀렸다고 해도, 반박하고 투쟁하길 희망하지.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싶어 해. 그러면서도 굵직한 것들, 너의 사상 기저에 깔린 메커니즘은 나약하고 세상에 깊게 종속돼 있어. 모순을 싫어하는 모순덩어리야. 생산적으로 너를 살아가고 있니, 아니면 누군가의 이념에 맞춰 살고 있니? 보편적 이념이 내면화된 것을 너의 주체로 착각하는 것일지 몰라. 욕망의 주인이 되길 바라. 이념이 아닌 욕망을 실행하고, 타인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닌 너의 말을 표현하는 사람 말이야. 침해하는 것에 도전하는 네가 됐으면 해.
나는 네가 좋아. 긴 시간 함께하며 생긴 호감일지 몰라. 내가 목격한 것이 궁금하니?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너의 초라함과 비굴함을 보았고, 성취와 따뜻함도 봤어.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태도, 어려운 이들에 대한 배려, 타인을 향한 정중한 말투. 특히 좋아하는 너의 모습이야. 뭐, 깨는 순간도, 실망할 때도 많아. 하지만 앞으로 네가 저세상을 가는 날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할 생각이야. 좋든 싫든 나는 너니까. 아끼고 지원할 수밖에 없거든. 물론 이렇게 된 마당에 정신 승리하자란 뜻은 아니야. 진심으로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