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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26. 2019

응급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에 응급실을 찾았다. 최근에 중식도를 구매했다. 날카롭고, 묵직한 날은 무엇이든 자를 것 같다. 비유가 아니다. 사각 쇳덩어리는 사용자 손가락도 잘랐다. 




당근 한 팩을 구매했다. 냉동 보관용으로 채썰었다. 단단한 심지를 자르기 위해 손에 힘을 실었다. 쾅쾅 소리가 날 때마다 당근은 토막 났다. 힘에 도취됐다. 기보를 얻은 무림인의 기분이 이랬을까? 힘을 시험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 검초를 선보인다. 우르르 쾅쾅(보통 이런 의성어가 나온다) 산에 있는 모든 나무가 잘린다. 바위도 박살난다. 산짐승이 도망간다. 병기에 모든 내공을 싣고 파괴적이고 무자비한 마지막 초식(대체로 너무 강해서 금단의 초식이라 불리는)을 전개한다. 아이고 오버했네 주인공은 주화입마 행. 나는 등신같이 엄지손가락 절단 행.




절삭력은 만족스러웠다. 칼날이 지나간 곳의 손톱과 살점은 깔끔하게 도려졌다. 손톱은 완전 분리. 살점은 끝부분만 붙어 덜렁거렸다. 와이프가 소리를 질렀다. 귓가에 와이프 비명이 울리고, 눈에 피범벅이 된 손이 보이고, 손 끝에 뜨겁고 힘찬 맥박이 느껴진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땀 샘이 열리며 식은땀이 얼굴을 뒤덮었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바닥 청소는 귀찮으므로 손을 싱크대에 올리고 주저앉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정신 잃으면 일이 귀찮아진다. 엠뷸런스 이용료는 자기부담이다. 정신력, 아니 경제력으로 억지로 일어나서 물 한 컵을 마셨다. 와이프가 손목을 잡고 그녀 남편을 이끌었다. 키친 타올로 환부를 감싼 상태로, 슬리퍼 신고 아파트를 나섰다. 와이프는 정신나간 사람럼 손을 휘둘러 지나치는 택시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기사는 신호를 위반하고 우리 앞으로 왔다. 고마운데 준법정신이 아쉬웠다.




응급실에 도착할 무렵엔 지혈이 됐다. 의사를 만나기 전에 간호사들이 간단한 조치를 취했다. 감염되지 않게 손가락에 깨끗한 거즈를 씌웠다. 이름이 불리기까지 30분이 걸렸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응급실 성수기였다. 치료 순서는 심각한 정도에 비례한다. 호명을 기다리는데 한쌍의 커플이 들어왔다. 휠체어 끄는 남자는 간호사 앞에서 횡설수설하고, 휠체어에 실린(실렸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여자는 반쯤 정신이 나갔다. 와이프와 새치기에 대해 논했다. "저 정도면 먼저 가야지. 인정." 지혈 후엔 집 나간 침착함이 돌아왔다. 




응급실 방문은 처음이었다. 글감으로 쓸 수 있겠다 싶어 응급실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경험하기 전에는 이미지만 존재한다. 내가 가진 이미지와 현실을 대조할 좋은 기회였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응급 환자의 대부분은 응급환자처럼 안 보인다는 점이었다. 가족 친구 문병하러 온 사람처럼 침착하게 접수대로 간다. 그리고 대기 열에 이름을 올린다. 탈골된 어깨뼈를 직접 맞추고 온 여성과 병명을 가늠할 수 없는(완벽히 멀쩡해 보이는) 아저씨 둘과 함께 정적을 공유했다. '응급'이란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은 휠체어 커플 뿐이었다.




루돌프 뿔 머리띠를 쓴 응급실 간호사는 본인들끼리 농담 따먹기를 나눴다. 응급실의 침착함에 동화된 와이프는 다친 손을 번쩍 들고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응급실 방문은 가족 단톡방에 농담 따먹기 소재로 사용됐다. 




의사는 좋은 대화상대였다. 빨간 뿔테와 귀 뒤에 '87'이라고 적힌 타투가 인상적인 의사는 친절했다. 학교생활, 해외여행 등을 소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와 잠시 헤어져 엑스레이를 찍었다. 칼이 뼈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기분 좋은 소식을 들고 의사에게 돌아왔다. 의사는 축하의 말을 건네고, 엄지손가락 뿌리에 마취 주사 2방을 놨다. 덜렁거리는 살점을 소독하고 예쁘게 압박 붕대로 고정했다. 환부에 의료 도구가 닿자 고통이 마취를 뚫고 올라왔다. 짜릿함이 땀샘을 몇 번 자극하자 조치가 끝났다. 뒤이어 산타클로스 모자를 쓴 간호사가 파상풍 주사를 들고 왔다. 간호사에게 말했다. "산타가 주사 놓으러 왔네." 웃음과 다르게 다음날(크리스마스) 저녁까지 골골댔다. 


오래갈 추억, 와이프의 따뜻한 보살핌, 공짜 의료 서비스까지. 이번 크리스마스는 풍요롭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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