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문화 포커스] 보신탕과 문화상대주의김선우(문화 칼럼니스트)
지금처럼 실내 흡연을 금하지 않던 시절, 식당에서는 많은 남성들이 밥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엽기적(?)이었던 것은 종업원에게 재떨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 난 밥그릇에 재를 떨었다는 것이다. 오래 전,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행태려니 하고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겠지만 1950년대 후반에 서울대를 마친 한국의 문화행정가 1세대로 꼽히는 아무개 선생은 10년 전까지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자기가 먹던 밥그릇에 재를 떨구고 꽁초를 비벼 껐다. 그럴 때면 재떨이 깨끗이 씻어서 밥 퍼주면 드실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아니, 이미 그의 밥그릇이 누군가의 재떨이였겠지만!) 끝내 여쭙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 아무개 선생님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글을 시작한다. 서문의 왕도는 특별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우리는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시대에 맞는 에티켓을 학습하고, 공유했다. 특정 행동은 제도에 의해 부정당하고, 대중 매체를 통해 비판을 받으며 시대가 용인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자, 여기서 묻겠다. 밥의 온기가 남아 있는, 그리고 자신이 나간 뒤에 깨끗이 씻겨져 누군가의 밥그릇이 될 그 그릇에 재를 터는 식탁 흡연의 매너를 당신은 문화다양성이라는 이름 하에 너그럽게 포용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OECD 국가들의 국민들은 안 하는 행동이므로 이제는 우리 곁에서도 사라져 다행이라고 할 것인가? 최근 뉴스를 보니 영국에서는 EU 탈퇴 결정으로 사회가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한국의 개고기 반대” 시위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고 한다. 해당 뉴스를 들은 네티즌들은 너도나도 문화다양성을 존중하자며 문화상대주의를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쁘와그라부터 시작해서 온갖 독특한 ‘음식문화’들(정확히는 식재료)을 늘어놓으며 저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으니 간섭하지 말고 용인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목되면 발끈하는 것이 마치 ‘국체(國體)’를 수호하려 했던 천황의 신민들을 연상케 한다.
-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보기에 부적절한 아무개 선생의 행동 역시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넘어가야 할까? 올바른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재고할 것을 제안한다. 다음은 메인인 보신탕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은 문화상대주의의 예로 프아그라를 언급하며, 개고기 식품 문화를 변호했다. 무비판적이며 맹목적으로 천황을 지켰던 일본인들과 모습을 대조했다. 적절한 비유다. 김선우는 한국인들의 개고기 식품화에 대한 옹호를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해석했다. 우리나라를 지키겠다는 어긋난 충성심이 만든 이론을 오남용이다. 사유의 부족과 자문화중심주의의 배타성에 대한 일침이다.
대중언론과 그에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네티즌들의 눈에는 영국인들이나 프랑스인들이 문화상대주의를 몰라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비난하는 것쯤으로 비춰지겠지만, 영국이야말로 근대적 문화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하여 우리에게 타일러 준 E.B. 타일러를, 프랑스는 서구에 의해 미개인으로 규정당한 열대 원주민들의 사고가 실은 서구인의 그것과 차이가 없음을 밝힌 레비-스트로스를 각각 배출했다. 또, 문화상대주의를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이데올로기로서 특유의 위상을 부여한 나라는 미국이다. 그들이 이끌고 있는 유엔의 산하에는 교육과학문화기구, 곧 유네스코가 있다. 유네스코의 홈페이지에는 타일러가 『원시문화 Primitive Culture』(1871)의 첫 문장에 정의해 놓은 문화 개념을 거의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 영국이야 말로 문화의 개념을 정립한 문화론 발원지임을 언급한다. 문화상대주의는 우리만의 방패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상대주의는 낯선 문화를 무조건 너그럽게 관용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잘못 가르치고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개고기 식용에 대해 문화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들이밀며 관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재떨이와 밥그릇을 구분하지 않는 이 놀라운 문화에도 똑같이 관용을 말해야 맞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은 없다. 이것부터가 문화상대주의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준다. 추상적인 “우리”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논리의 일관성이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느낌과 기분만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적 문화상대주의와 실천적 문화상대주의를 구분하자는 이론가들도 있나 보다.
- 단어의 의미를 오독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문화 특수성과 상대성을 필두로 관용을 요구하지만, 그 문화의 배경과 합리성에 따라 사용이 불가할 수도 있다. 밥그릇의 재떨이화가 문화라는 이유로 존중해야 할 것이 아닌 것처럼. 문화상대주의의 맹점이다. 뚜렷한 기준이 없는 상황이기에 쉽게 오남용 될 수 있다. 하지만 재떨이의 경우는 문화의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기 다른 문화라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그릇에, 오물을 버리는 것은 어딜가나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선우가 10년 전에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다. 밥그릇에 담뱃재를 터는 행동은 그에게도 불쾌한 경험이었음을 글 전반의 분위기로 미뤄볼 수 있다. 결국 개고기에 대해 문화 특수성을 말하는 이는 밥그릇의 재떨이화에도 관용을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하다.
반면에 우리는 아직도 문화라고 하면 그것을 뭐라 정의내려야 할지 막연해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프랑스식 시빌리자시옹 개념에 독일의 쿨투어 개념, 전통적인 한자어 개념이 뒤섞인 위에 다시 프랑스의 행정적인 개념이 덧입혀지고 나서야 극히 최근 들어 학문적인 문화 개념이 조금씩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자의적인 동시에 그 실천은 정치적 자기방어의 논리에 국한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낯선 문화는 혐오의 대상이 되며 문화다양성은 레토릭으로 전락하고 말뿐임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다시 한번 문화상대주의의 대한 이해의 부족을 언급. 기준이 명확치 않으므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 방어의 논리로 관용을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된 문화상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식당의 밥그릇에 담뱃재를 터는 행위는 다음에 밥 먹을 사람들에 대한 최악의 행위이며 세계 어딜 가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한국식 식용견의 처우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심히 견권을 위배한다며 시위를 벌이는 것이 차라리 문화상대주의의 본뜻에 가깝다. 문화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관용을 우선하게 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공동의 가치와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의 “밥그릇은 재떨이지만 재떨이는 밥그릇이 아니다” 문화부터 일부 무슬림의 극단적 근본주의나 북한의 폭압적 정치문화까지 다 관용하게 되면 오히려 문화상대주의는 그 가치를 잃게 된다.
- 문화상대주의를 오,남용 했을 떄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언급. 관용을 어디까지 요구해야 하는가? 모든 문화를 다 인정한다면, 분명히 인류의 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와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더 큰 불편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문제는 그 밸런스인데, 균형감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이들이 자국이 욕 먹는 걸 볼 수 없다고 나서는 꼴이다. 이런 모습은 자문화중심주의의 방증이기도 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는 정의롭지 못 하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가치를 갖거나, 자신의 것에서도 똑같은 기준을 둬야 한다.
문화상대주의는 영어로는 cultural relativism이라고 한다. relative는 “관계적(인), 비교적(인), 상대적(인)”이라고 옮길 수 있으며, 끝에 s를 붙이면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친척’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회문화를 연구할 때 가장 기본은 친족 연구였다. 나에게 어머니지만 할머니가 보기에는 며느리이고, 이종사촌이 보면 이모인 것이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가리켜 “아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한 사회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익힌 상태, 즉 철이 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relativism은 대상을 관계 속에서 견줘 봐야 그 의미가 제대로 이해 가능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 단어를 풀어 어원을 추측한다. 이를 근거로 상대의 문화의 구조와 사건의 개연성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야 함을 주장.
또 그것은 일본인들이 영어를 번역하면서 선택한 한자어의 조합일 뿐이기에 우리는 cultural relativism을 문화관계주의라고 번역해도 되고 문화비교주의라고 해도 그만이다. 이 세상에 남자가 정우성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정우성이 잘 생긴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지만, 여러 남자들과 함께 서 있으면 비로소 우리는 정우성이 잘 생겼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문화상대주의라는 것은 끊임없이 비교의 대상을 찾는다. 상대주의가 제일 잘 실천되는 것이 바로 쇼핑의 현장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예컨대 거리와 시간, 발품과 가격, 그리고 종업원의 친절과 사후 처리까지 모든 것을 고려해서 종합 판단하되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내 지갑 상황(맥락)에 따라 그때그때 판단하는 것, 그것이 문화상대주의의 요점인 것이다.
- 문화상대주의라는 이름의 당위성은 없음. 대체어가 있음. 단어로 인해 놓쳤던 부분을 말함. 하지만 문화상대주의는 Cultural relativism 본연의 뜻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문화 속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와 관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해석하라는 것이 그 뜻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체어를 통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문화상대주의적으로 개고기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개고기에도 수많은 “관계”가 있다. 우리가 먹는 동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개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식용하는 동물은 어떻게 길러지며, 어떻게 대우받고 어떻게 도살되는가? 우리 사회에서 다른 동물들과 개는 어떤 점에서 다르게 길러지고 도살되는가? 개와 다른 동물들은 어떤 음식이 되며,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가?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 개가 식용으로 선택되는가? 혹시 개를 먹는 지역끼리 공통점이 있는가? 개를 먹는 다른 지역에서 개는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되는가? 개를 안 먹는 지역에서는 개 대신 무엇을 먹는가? 개는 언제부터 먹혀왔는가? 수많은 질문들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 그리고 개를 먹지 않는 사회와 개를 먹는 사회가 어떤 면에서 다르고 같은지, 왜 각각 그런 선택을 해왔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이 개고기의 문화상대주의인 것이지, 개 먹는 것을 용인하라는 것이 문화상대주의는 아니다.
- 문화상대주의자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 식용개의 특수성, 사육상의 특징, 도축 방법, 개를 먹게 된 배경 등을 통해 가치 판단을 해야 함. 맹목적으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자세.
누군가가 “제 밥그릇에 담뱃재를 터는 행위를 다른 나라에서는 안 하니까 우리도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면, 다른 나라의 식탁 흡연문화와의 비교가 들어가 있기에 이 주장이야말로 오히려 일정하게 문화상대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평소 다른 나라의 낯선 문화를 관용은커녕 호기심 이상으로 대하지 않다가 제 문화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하는 것이 문화상대주의가 아님은 분명하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문화상대주의를 말할 때 자문화의 변명을 위해 쓰지 말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왜냐하면 자문화의 어떤 면을 변호한다는 것 자체가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에 빠져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낯선 것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 과정이 자타를 관계 속에서 비교를 하는 과정일진대 자문화의 변명은 있을 수 없다.
- 문화 상대주의가 오용의 요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알고 있었기에, 자문화의 변명을 위해 쓰지 말라는 합의가 존재함.
보신탕이 구미인의 눈총을 받는데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2차 대전에서 경제가 회복하여 집집마다 TV를 놓고 살게 된 1960년대 후반, 구미의 방송국들은 지금의 우리 방송국이 그러하듯 세계문화 탐방 프로그램이 많았다고 한다. 말이 문화 탐방이지 사실은 선정적인 시청률 경쟁이 뒤에 있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때 그들에게 좋은 방송감으로 떠오른 것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는 글쎄 개를 먹는다네”였다. 우리도 오늘날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가정이 많이 늘고 있듯이 당시 유럽에서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에 더불어 교육과 취업 등의 이유로 1인 가구나 부부만으로 구성된 가구가 많아지고 있었다. 당연히 개나 고양이는 가족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개를 먹는다는 뉴스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나라야? 중국과 한국이래!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을 둘러 서방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재수 없이 걸려든 것이 한국.
- 보신탕이 욕먹게 된 배경. 시청률을 위한 자극적인 요소 부각.
한국에서 보신탕을 먹는다고 해도, 모든 한국 사람이 먹는 것도 아니고 늘 먹는 것도 아니다. 단지 개로 만든 음식이 존재하고 일부가 어쩌다 먹는 것일 뿐. 그럼에도 당시 전쟁과 가난, 군사독재 등등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이었던 한국의 개고기 음식은 그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게다가 더하여 한국의 민간에서는 “고기의 독을 빼고 육질의 식감을 위해” 개를 산 채로 거꾸로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 요리법을 개발하기 보다는 개를 때려죽인다는 것이 수사기법을 개발하기 보다는 피의자 고문을 택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방송을 본 유럽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후 한국은 개에 대한 처우가 극도로 안 좋은 나라로 인식되어 오늘에 이른다.
- 개 먹는 나라, 개 학대하는 나라 이미지가 고착됨. 특수한 모습을 확대 해석.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고, 보신탕집은 생각보다 많다.
당시에는 방송과 대중의 선정적 호기심과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구미인의 문화적 우월주의와 인종주의 등등이 결합하였지만, 반세기가 흐르면서 이제는 그들도 자신들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개고기 반대의 바탕에는 동물들의 권익과 위생, 탐욕으로 빚어진 건강하지 못한 식생활에 저항하는 인류보편적 지향의 한 흐름이 관찰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차별만 기억하며 그에 대항하려는 정치적 수단으로 문화상대주의를 편의적으로 끌어다 쓰고 있다. 누구의 것이든 전통적으로 형성되어 온 식문화를 인종차별의 소재로 쓰는 것이야 당연히 반대해야 하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충고마저도 인종차별로 단정짓고 용어를 곡해하여 사용하는 것에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그들은 변해가지만 우리는 안 변하고 있는 것밖엔 안 되며, 이는 우리가 익히 겪어온 도태를 결과하기 때문이다.
- 보신탕 반대하는 측의 주장은 납득할만 하다. 이유- 동물권, 위생, 건강, 대체 식품 등장 등. 시위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는 한편, 우리는 여전히 미숙한 문화상대주의를 들먹이며 옹호.
이미 시중에도 음식문화에 대한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나와 있으니 육식과 관련된 구미인들의 다양한 인식과 소비 방식들, 그리고 감춰진 논쟁들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개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비교해 보고, 우리가 개선할 것이 있으면 개선하고 알릴 것이 있으면 알리는 것이 문화상대주의에 조금 더 부합되는 것이다. 외국의 개고기 반대 시위의 기원, 감춰진 동기, 각종 담론의 변화, 자기 정당화의 과정, 시위 참여의 방식과 실제 참여자들의 이야기 등등을 차분히 알아보기 보다는 공격과 방어의 익숙한 이분법으로 상황을 치환하는 것이야말로 프로토타입을 재생산하는 언론의 정치적 기능에 충실히 이용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상대주의를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의 언론과 대중이 문화상대주의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셈이다.
- 김선우가 제시하는 우리의 자세: 타 문화권 사람들의 인식, 논점을 학습, 비교한 후 개선이나 그 위의 입장표명. 문화상대주의라는 우물 안에서 나올 줄 모르는 한국인의 태도 비판. 상황을 거시적으로 보고, 국뽕을 끊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길 요구. 언론은 시사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함. 어려운 쟁점에 대해 요약, 정리를 해서 대중의 이해와 협의를 도출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음식문화라고 하면 음식의 유래, 식재료와 요리법, 그리고 몇몇 뒷이야기들을 막연히 아울러 지칭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 음식이 가진 사회문화적, 정치적 의미 탐색을 해내는 세계의 흐름에서 동떨어져 온국민이 먹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나라 안의 한 지역에 할랄푸드 단지 건립을 검토 중이라는 뉴스만으로도 맹렬한 저항에 처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동시에 우리보다 문화다양성을 훨씬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본바닥 사람들에게 문화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논점을 성찰해 내는 것이 바로 음식의 문화상대주의인 것이다.
- 결론은 올바른 잣대로 나와 남을 동일하게 평가하자는 것이다. 신경 쓰이는 부분은 음식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탐색하지 못 한다는 문장이다. 정치적 의미의 탐색은 음식이 아닌 정치가 주가 됐을 때 찾으면 된다. 부엌에서의 미시정치 개념같은 실천 철학과 정치의 중요성을 굳이 음식 문화 논문이나, 먹방에서 역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문화상대주의라는 철옹성의 탈을 쓴 초가집에서 나와야 한다. 상대가 어떤 주장을 했으며,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가, 반대로 우리의 주장이 논리적인가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주모에게도 쉴 시간을 줘야 한다. 국뽕이 과하면 앞가림이 어려워진다.
김선우의 저번 글(한국 교육 비평-상상하기 귀찮으면?)과 마찬가지로 플롯이 탄탄했고 재미 있는 글이었다. 다만 그 글에 실린 예시가 많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크게 걸리는 부분 없이 읽혔다. 보편적인 윤리에 어긋나는 지인의 몰상식한 행동을 시작으로 우리가 잘못 사용하는 문화상대주의의 모습을 언급했고,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지 다뤘다. 보신탕 사례에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서 유익했다. 다양한 관점에서 주제를 다뤘고 보충 자료도 적절했다.
나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계기가 됐다. 맹목적인 국수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 각각의 사회가 서로 다른 도덕률을 갖고 있다고 해도 객관적인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기서 특정 문화 관습의 배경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도덕률이 다르다 해도 인권과 합리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시행하는 할례라는 관습은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합리적이지 못 하다. 합리라는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범위가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이다. 더군다나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문화의 경계가 사라지고 문화의 지역성을 잃게 되는 현상을 보이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문화제국주의를 주의할 필요는 있되, 다각도로 사건을 조망해야 한다. 다양성 존중이라는 미명으로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하거나,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들이 악습들이 사람들을 괴롭혀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