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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03. 2021

한 달 동안 쓴 메모 모음



1. 난 네가 되고파



책, 이게 뭐라고를 읽었다. 작가 장강명이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느끼고 관찰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다. 제목으로 예상하겠지만, 책을 중심에 둔 에피소드가 많다. 


좋은 글을 쓰려작가의 열정이 느껴졌다. 그는 쓰고픈 글을 언급했다. 시간의 증명을 받은 작품이다. 시간의 증명이란 먼 미래에 받는 인정이다. 한 단어로 말하면 고전이다. 장강명은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을 쓰려 한다. 롤모델도 등장했다. 블랙 달리아와 LA 컨피덴셜을 쓴 제임스 엘로이다. 제임스 엘로이의 작품을 분석하며 배운 노하우를 본인 작품에 녹였단다.


이 지점에 오니 내 의견이 궁금해졌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어떤 글인가? 만일 누군가의 글솜씨를 전승할 수 있다면 누가 되고 싶은가? 이에 대한 답을 하겠다.


우선 문학 비문학으로 장르를 나눌 필요가 있다. 분야에 따라 지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문학에선 발터 벤야민, 문학에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다.


벤야민은 어려운 글을 쓴다. 복잡한 개념을 교차 사용한다. 유통된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활용한다.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을 뽐낸다. 글솜씨도 좋다. 복잡한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다. 옮겨낸 글은 어렵다. 쉽게 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장을 넘길 때 지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책 내용이 주는 만족이 아니다. 어려운 책 읽는 자신이 만족스럽다. 나는 멋지고프다. 벤야민의 글은 어려운 만큼 멋지다.


문학에선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다. 띤떵훈 소설 인생에 롤리타는 다섯 손가락꼽힌다. 재기발랄하고 도발적이고 거친 문체는 팔딱 뛰는 활어를 연상시킨다. 장강명 말을 빌려 쓰자면 야수성 넘친다. 독자에게 기꺼이 불쾌함과 불편을 준다. 미풍양속을 거스른다. 사회 윤리와 예의를 시원하게 무시한다. 불꽃처럼 섹스하다 죽은 사드가 책을 썼다면 이랬을 것같다.


안타깝지만 나는 둘 다 될 수 없다. 벤야민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고. 나보코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세상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두뇌가 12세대 인텔 i9 프로세서면, 내 머리는 93년 출시 펜티엄 1세대다. 벤야민이 팽팽 돌아가는 머리로 사이버펑크 2077 할 때 나는 이집트 왕자 얼차려 시킨다. 타고난 명석함, 배움의 양 어느 하나 비교할 수 없다.


나보코프 또한 될 수 없다. 나는 타인의 욕망을 너무나 욕망한다. 욕받이가 될 생각도 없다. 잔잔하게 살다 갈 인간이다. 자기 검열도 강하다. 에로스 주제에서 입 닫는다. 말하는 자아 글 쓰는 자아 모두 사랑과 섹스 이야기를 기피한다. 그 주제는 내 옷이 아니다. 내가 만든 내가 확실해, 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반면 나보코프의 소설은 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차은우처럼 생기고 싶다고 해도 차은우가 될 수 없다. 타고난 외모는 바꿀 수 없다(나도 잘생김)



요컨대 나는 나로 살 운명이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뇌 총용량 250메가의, 안전지대 밖을 나갈 수 없는 인간이다. 세상 뒤집을 카파가 다. 그들이 될 순 없지만,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그 글도 나쁘지 않다. 적당한 지식과 적당한 도발과 넉넉한 말장난이 섞여 있다. 이 집도 잘한다. 재미가 자신에게만 유효하다는 게 흠이지만.







2. 사생활 노출 금지


최근 큰일이 있어서 블로그에 글 썼다. 중간쯤 적었을 때 와이프한테 전화 왔다. 그녀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사생활 노출하는 게 불편하다. 본인 나오는 것도 싫다. 내 글이 묘사하는 그녀가 악역처럼 보인다. 꼭 쓰려거든 '너무나 사랑하는'이란 수식을 붙여라.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이 떠올랐다. 인칭이 길면 타이핑하기 귀찮다. 당분간 블로그에서 너무나 사랑하는 와이프는 등장하지 않을 예정이다.








3. 업 앤 다운


멘탈 쎈 걸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에스트로겐이 조기 분비됐는지 감정 기복이 생겼다. 휴-. 우울이란 건 예고 없고, 비합리적이다. 타인의 우울에 훈수 둘 수 없는 이유다.


같은 환경이라도 사람마다 해석 다르다. 물이 반밖에 안 남은 것과 반이나 남았네의 차이다. 반이나 남았네 정신으로 살았다. 매사 쉼게 만족하고 쉽게 감사했다. 최근엔 달랐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반밖에 안 남았네 정신이 찾아왔다. 안 행복했다.


그때 장강명의 표백을 읽었다. 집단 자살 선언으로 사회에 의지를 표명하자는 이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다룬다. 자살 선언문을 읽는 캐릭터의 말에 공감이 됐다. '그치 삶은 허무하지. 더 이상의 위대한 일이 있을까? 그냥 죽어도 나쁘지 않겠네'로 생각이 전개됐다.


오늘 은행에 방문해 통장에 현금을 입금했다. 반년 동안 모은 돈인데 예상보다 액수가 컸다. 은행원은 액수가 얼마냐 물었다. 나는 모르지만 대충 00 정도라 대답했다. 기계가 계산한 결과 내가 말한 금액의 두 배였다. 은행원의 취조와 개인 정보 풀개방이란 해프닝이 뒤따랐다. 만면에 미소를 띠며 취조를 받았다. 행복도 80으로 올라왔다. 사소한 기쁨은 반이나 남았네 정신을 고취시켰다. 마음가짐과 무관하게 금액은 동일하다. 기대를 낮추니 기쁨이 찾아온다. 낮은 기대치는 행복의 원천이다.





4. 생각을 멈추지 마


녹즙 배달원 강정민에서 김현진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생각해. 생각하는 걸 멈추지 마-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자유의 형벌은 무겁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만이 우리의 실존을 증명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생각이 필요하다. 점심 뭐 먹지? 같은 생각이 아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환경에 '왜?'라 묻고, 자신만의 '어떻게'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런 삶의 태도를 '생각'이란 단어로 정리했다.


표백을 끝내고 연달아 장강명 에세이를 집었다. 그가 진행했던 팟캐스트와 동명의 에세이다. '책, 이게 뭐라고'를 읽으며 느낀 감상은,

-이 정도까지 생각한다고?-

작가는 참 피곤한 사람이다. 자신만의 원칙과 기준이 많다. 관찰도 잘하는데, 관찰에서 나온 질문을 글로 정리한다. 쓰며 자신의 의견을 확립한다. 이렇게 관이 생긴다.


작가는 세상을 보는 필터가 보통 인간보다 3배 정도 많은 것 같다. 타인의 감정, 사물의 존재 이유, 행동의 근거, 사회의 부조리 등. 누군가의 한 마디가 연쇄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생각 확장의 기술자다. 누군가의 스쳐 지나가는 한마디가 작가의 먹잇감이 된다. 말 한 번 잘못하면 종이 위에서 부관참시 당한다. 주변인 중에 기자 출신 문학도가 있다. 본격적으로 등단을 생각한 적이 있고, 아직 꿈을 버리지 않은 친구다. 내가 아는 가장 작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예전에 말 한 번 잘못했다가 그의 에세이에서 부관참시 당한 적이 있다. 그의 에세이에서 내가 맡은 역은 다른 직업 존중하지 않는 경솔한 인물 1 이었다. 흥미로우면서 불쾌한 기억이다. 만날 때마다 '이 행동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주변인을 힘들게 한다. 판옵티콘 앞에 선 기분이다. 다만 힘들게 할지언정 세상에 이롭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숲과 나무 모두에 필요한 필요악이랄까.


나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과 타인에 관심이 없다. 선택을 요구하는 상황에 기본적으로 수동적이다. 최상급 포장지 씌우면 유연한 사람이고, 일반 포장지 씌우면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설정한 이상향이 나를 지도한다. 생각해. 생각 안 하면 등신이야. 어쩔 수 없이 생각을 짜낸다. 왜 그래야 하는데?란 말을 간신히 뱉는다. 그제야 의견이 생긴다. 그 의견이 평소에 내놓은 의견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나는 합리제일교(혹은 논리제일교) 광신도다. 일단 생각하기 시작하면 교리에 맞춰 합리성을 검증한다. 나의 생각하지 않는 본성은 생각하라는 원칙에 도움을 받는다.



고백하자면 생각하라는 원칙은 당위가 아니다. 나의 실존이고 자시고 관심 없다. 지적 허영이 요구하는 삶의 태도다. 나는 멋지고프다. 멋진 척을 하려면 주관이 있어야 한다. 주관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멋진 사람이란 관념을 좇아 생각이란 것을 한다.






5. 오락기


나의 마지막 오락기는 닌텐도 3D다. 십수 년 전에 일본어 사전용으로 구매했다. 기술이 지금만큼 발전하지 않았을 때다. 핸드폰에 스캔 기능이 있을 리가 없다. 모르는 한자를 확인하기 위해 닌텐도 화면에 한자를 써서 뜻을 확인했다. 그때 겸사겸사 닌텐도 게임을 즐겼다.



순전히 게임 목적으로 산 마지막 게임기는 닌텐도 게임보이다. 초등학교 3~5학년 시절 열심히 사용했다. 건전지 교체 방식이었다. 동네 마트에서 800원짜리 에너자이저 한 쌍을 구매해 며칠에 한 번씩 교체했다. 당시 갖고 있던 게임팩은 용량 적은 아케이드 게임 100선 팩뿐이었다. 정확한 게임 수는 기억나지 않으나 체감 백 편이었다. 하는 게임은 킹 오브 파이터 97 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PC로 환승했다. 창세기전, 붉은 매, 파랜드 택틱스, 악튜러스 등. PC 게임의 퀄리티는 게임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며 온라인 게임의 세계로 넘어갔다. 게임기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PC 환경이 친숙하기에 플레이하는 게임은 오로지 PC 인식된 것뿐이었다. 콘솔은 게임보이를 떠난 사이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 플스, 엑스박스, 닌텐도 위 등의 TV 연결 콘솔부터, PSP, PS-Vita, 닌텐도 DS 등의 휴대용 콘솔까지 말이다. 온라인 매체의 극찬에도 콘솔엔 놀라울만치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콘솔 대표작은 1인칭 3D 게임인 경우가 많다. 나는 1인칭 3D 게임을 30분 하면 속이 매스껍다. 모바일 게임의 시대에서 휴대용 콘솔의 존재 이유를 납득하지 않았다.



한 달 전에 닌텐도 스위치를 구매했다.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너무나 사랑하는 와이프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작년에 동물의 숲을 플레이하고 싶다 말했다. 그 말이 기억났다. 동물의 숲 팩과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를 사서 대령했다. 이후에 하고 싶은 게임이 생기면 본인이 직접 구매하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팩 선정은 성공적이었다. 초반엔 시큰둥했으나 날이 갈수록 동물의 숲에 흥미를 느꼈다. 종래엔 출퇴근 길에 닌텐도를 챙길 정도가 됐다.



문제는 내가 더 빠졌다는 데 있다. 그녀가 다른 일을 할 때 닌텐도는 내 손에 쥐어진다. 매장에서 팩을 사지 않아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기기에서 와이파이를 통해 닌텐도 e 숍에 접속이 가능하다. 카드를 한 번만 등록하면 후엔 원 클릭 구매가 가능하다. 게다가 매번 스페셜 할인 이벤트가 있어 저렴하게 게임을 구매할 수도 있다. 한 달 동안 벌써 게임 4개를 구매했다.



게임기의 존재 이유를 납득한다. 버튼은 불필요하게 많은 게 아니었다. 모두 쾌적한 플레이에 도움을 준다. 넓은 화면과 조이스틱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가능케한다.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기기다. 약은 약사에게, 용돈은 엄마에게, 게임은 게임기에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고, 늦게 배운 콘솔 게임은 재밌다.


기브 하니까 테이크하네.





6. 장강명


장강명 작가에 호감이 있다. 나는 헤테로 섹슈얼이다. 작가에게 보내는 것은 인간적 호감이다. 그의 팟캐스트를 꽤 자주 들었고, 에세이, 단편집을 읽었다.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에서 보여주는 허당미는 친근함을 불러일으켰다.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에서 보여주는 결혼관은 경외를 불러일으켰고, 단편집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은 망각을 불러일으켰다(읽었는지 잊어버렸다. 저서 목록보다 좀 전에 발견했다). 모두 긍정적(망각은 일상에 필수이므로)인 영향을 줬다.


오늘 그의 데뷔작인 표백을 읽었다. 굉장히 잘 읽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개성 있는 캐릭터가 만드는 몰입감이 좋았다. 사회, 역사, 문화 다방면에 뻗친 지식은 세계의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 물론 작가의 유머감각도 잘 녹아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의 지적 능력이 내게 주는 좌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가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 똑똑함의 기준을 말할 필요를 느낀다. 크게 2가지 기준이 있다. 시스템 기준의 똑똑함, 그러니까 학교 성적이 보여주는 똑똑함이 첫 번째다. 개인 기준의 똑똑함, 그러니까 순수한 지적 욕망의 추구에서 오는 똑똑함이 두 번째다. 그는 두 가지 기준 모두 충족한다.


첫 번째 똑똑함은 사회적 기호- 출신 대학과 직장-로 입증된다. 표백에서 주인공 '나'는 서울 10위권 대학에 다닌다.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성균관대나 서강대보다는 조금 낮고, 한양대와 비슷한 정도?'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학벌 콤플렉스 가진 이들의 모임으로 묘사한다. 더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자위하는 곳, 과외 구할 때 지방에서야 간신히 먹어주는 타이틀 등. 연세대 졸업 후 동아일보 언론 고시를 통과한 작가에겐 한양대는 콤플렉스를 불러오는 아쉬운 곳이다. 시스템 기준 똑똑함을 통과했다. 이는 중요하다. 다만 두 번째 항목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 똑똑함은 말과 글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알고 있기로 그가 사회학 비문학 도서를 쓴 적은 없다. 직접적으로 그의 지식을 풀어낸 곳은 없다. 다만 팟캐스트에서 말로, 에세이와 소설에서 행간으로 깊이를 측정할 뿐이다. 내가 보는 장강명 작가는 지식인이다. 유머감각도 있고, 겸손하며(위 문단 보면 아닐 수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할 용기도 있다. 흔히 지식인 계급으로 알려진 직업군이 본인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아우라가 밥그릇 지켜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레퍼런스도 많은데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그는 레퍼런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한다. 종종 책이나 블로그, 칼럼 등에서 잘 이해하지 못 한 개념을 가져다 쓰는 파렴치한(글방)을 보는 일이 있다. 배우는데 시간은 쓰고 싶지 않은데 아는 척은 하고 싶은 부류다. 장강명은 아는 것만 말한다.


글 쓰는데 인문학 지식과 철학적 사유가 필수가 아니다. 다만 있으면 좋다. 독자의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독자가 아는 사실에 부합하는 경우 몰입감을 더할 수단이 된다. 나는 소설가가 될 생각도 자질도 없다. 뜬금없이 50년 후에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어질 수 있다. 블랙 스완을 염두 해 0%라고는 하지 않겠다. 만약 쓰게 된다면 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작가가 되고 싶다. 인문학적 지식을 차곡히 쌓고, 제대로 소화시켜 이런저런 물음에 자신만의 답을 가진 사람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철학하는 작가일 수 있겠다. 철학함은 배우고 소화시키는데 시간을 쏟는 행위다. 본인 철학 없이 쓰는 이야기는 금세 휘발한다.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다.


장강명 같은 잡학 다식하고 생활에서 질문(철학함)을 멈추지 않았다는 게 보이는 작가를 보면 내가 소설을 쓰지 말하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김성모 화백의 단어로 말하면 나는 풋사과다.






7. 죽고... 농담

제목이 너무 길어 외울 수가 없네.


작가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책을 다 읽고 어젯밤 그녀의 신간 소설을 구매했다. 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고 어느새 끝이 보인다. 소설도 에세이만큼이나 좋다.


그녀가 에세이와 소설에서 말했듯 나도 약자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인기 작가 타이틀이 주는 권위의식이 없다. 스스로 약자라 규정하고 실제 약자의 삶을 살아왔다. 세상의 등급 매기기에 고통받으면서도 가해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작가가 고수하는 이 태도가 인간적으로 끌리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내가 받은 아픔을 누군가에게 갚아주겠단 독기가 없는 사람이 좋다.  왜냐면 그 복수는 대체로 대상을 잘못 선정한 경우가 많고, 복수는 또 나를 향해 돌아온다. 자진해서 분노의 카르마를 끊어내 분노의 재생산을 멈춘다.


남을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고 사회를 미워하는 상황을 잊기 위해 작가가 택한 방식은 유머다. 작가의 표현으론 농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게 아니라면 유머는 대체로 옳다. 유머의 힘과 유머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작가처럼 삶의 마지막에 짜내는 유머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유머는 말로 하는 예술이고 승화다.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평화적이고 따뜻한 방식이 아닐까. 힘든 사람에게 농담했다가 뺨 맞을 수도 있다. 농담의 대상이 자신이고, 그 목적이 삶을 이어가기 위함이라면 누구도 뺨 때릴 수 없다. 소설에서 옆 건물 청소부 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살고자 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뻐- 이 말은 작가 자신에게, 독자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웃음 없이는 삶이 얼마나 고된가. 농담(유머)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작가는 약하면서 강하다. 얇은 초에도 심지가 있다. 작가 등용문이자 엘리트 코스인 대학에 진학했다. 나름대로 괜찮은 회사에 입사했고, 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고민의 시간이 있었으나 부당함에 거부했다. 안정된 환경과 감투를 뒤로 했다. 소설 주인공처럼 녹즙을 팔거나, 목장에서 똥 치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등급 나누기 좋아하는 사회의 은근한 무시와 싸워야 한다. 그 고난의 행군에서 농담으로 버틴다.


에세이를 읽고 감동받고 공감하고 웃었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8. 죽음의 수용소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고전이다. 고전이란 단어의 무게는 상당하다. 종종 대중에 퍼진 고전의 아우라와 실제 독서 경험에서 무게 차이를 느낀다. 가슴에 묵직하게 울리는 감동이 부재할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사회의 고전이 항상 개인의 고전이 될 순 없구나. 이 책은 아니다.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묵직한 울림을 전해왔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어 일으킨 뒤, 삶의 목적이란 화두를 놓고 간다.


그의 문체는 담담하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BGM 없는 다큐멘터리처럼 사실 그 자체를 서술한다. 드라마틱한 연출을 제외하니 여백이 생긴다. 여백에 저마다의 생각과 감상, 상상을 채울 수 있다. 많은 이가 책을 대체로 일방향 커뮤니케이션 툴로 인식한다. 빅터 프랭클의 책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한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상황을 그릴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아니다. 저자가 문자란 기표 뒤의 숨긴 기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단 뜻이다. 그렇기에 그 인생의 마지막으로 몰린 감정을 맛볼 순 없다. 감히 그들의 심정을 공감한다 말할 수 없다.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의 그물에서 뭉퉁그려 상상할 따름이다.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인간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의 글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고, 그 과정에서 자기기만을 인지한다. 그는 나무를 보여준다. 수용소 안의 일상을 지켜보는 중간중간 몰입이 이뤄진다. 실제와는 다르겠지만 내 상상의 한계를 넘어선 공간이 창조된다. 나의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력한 인간이 보인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자유, 인간다움, 가족, 직업 등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다. 그간 편집한 나의 모습에서 하나 둘 이름표가 사라진다. 거주지, 차, 국적, 출신 학교, 직장, 연봉, 가족, 취미, 모임. 그 끝에 나은 무엇이 되는가? 여러 지표에 자아를 의탁한 자가 버틸 수 없는 환경이다. 철저히 나를 다시 써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생의 마지막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로고는 의미란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정신 치료 방법이다. 저마다가 갖는 삶의 의미가 다르기에 처방도 저마다 다르다. 그는 모든 환자를 관통하는 처방의 기저에 책임감을 든다. 내가 책임져야 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간 수용소에서 나는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나 자신이다. 존엄하게 살아야 한다는 자신을 향한 책임감. 그것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다. 다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나는 그 모든 제약을 뚫고 나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 그렇기에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틴 생존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3가지 방법을 언급한다. 1. 창조 2. 사랑 3. 결정. 만일 그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창작이 불가능하며, 기약 없이 수용소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수용소에서 존엄하게 살겠다는 결정이, 끝까지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결정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 문제는 존엄과 생존이 배치되는 경우다. 나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희생을 묵인해야 한다. 어떤 선택도 고통이다. 결국 순간순간의 의미를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거위의 수면 안 발길질처럼 말이다. 의미 찾기를 포기하면 끝이다.


저자는 험난한 길을 뚫고 생존했다. 본인 삶의 의미를 찾고, 책임감을 갖는다. 그의 의미는 사회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문제를 던지는 것, 타인을 돕는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은 근거가 있다. 근거를 잃었을 때 나의 생존을 이어갈 의미를 찾길 바란다.


문답을 가능케 한 빅터 프랭클에 감사







9. 메모에 충실한 글


내가 제목으로 다는 '메모'와 대중 일반이 사용하는 '메모'의 컨셉이 다르다. 따라서 실사용도 다르다. 시니피앙은 '앙 똑같지'인데, 시니피에가 '에? 다르잖아'인 경우다.


목적이 다르다. 나는 낮은 부담으로 많은 볼륨을 채우기 위해 모든 글에 메모란 제목을 단다. 메모하는 기분으로 글 쓰겠단 의지 표명이다. 메모는 형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문장도 필요치 않다. 메모함의 이데아는 급하게 찾은 포스트잇에 상대 전화번호 받아 적는 모습이다. 카페에 앉아서 랩탑을 펴고 주제와 문단을 정리하고 쓰는 글이 아니다. 포스트잇에 갈겨쓰는 기분으로 글을 쓰자며 자신을 세뇌시킨다.





10. 브레인 워싱


위에 세뇌란 단어가 나와서 하는 말이다. 전날 읽은 책에서 세뇌를 다뤘다. 브레인워싱은 한자어 세뇌의 직역이다. 오리지널이 중국이란 뜻. 중국은 단어의 기원인 것처럼 세뇌도 잘한다. 50년대 한국전쟁에서 많은 미군이 성공적으로 중공군에 세뇌당했다. 그 세뇌의 비결은 단순하다.


종이에 공산당의 좋은 점을 쓰게 하고, 쓴 사람에게 담배나 초코렛 등의 사소한 포상을 주는 것이다.


핵심은 사소한 포상이다. 포상은 내 목숨이나 동료의 목숨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뇌의 인과 선호 덕이다.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밝히려는 뇌의 자연스러운 활동. 거창한 포상이 달렸을 때 미군의 뇌는 말한다. '이것은 생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반역행위' 목숨이 담보니 어쩔 수 없다는 명분. 담배나 쪼꼬렛또를 받았을 때 그들은 명분을 잃는다. 명분으로 삼기에 너무 사소하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난다. 인과를 맞추기 위해 미군의 뇌는 공산당의 좋은 점을 실제로 믿기 시작한다.


공산주의는 적이란 신조 vs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메모 사이의 부조화다. 부조화 해소하기 위해 어느 한쪽을 변경해야 한다. 후자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는 적이란 신조다. 결국 공산주의에 좋은 점이 있다고 수정하며 부조화 강도를 낮춘다.


이것이 바로 세뇌다. 사소한 대가가 만드는 강력한 브레인 워싱. 세뇌의 교훈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은 여러모로 쓸모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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