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띤떵훈 Nov 19. 2021

이것은 리뷰의 법칙이다

천명관 고래



 천명관 작가의 고래는 대단한 작품이다. 나는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다. 읽은 얼마 안 되는 책을 기준으로 삼는다. 낮은 표본을 근거로 감히 말한다. 고래는 한국 현대문학 최고 수작이다. 과장하기 좋아하는 내 성격을 감안하길 바란다. 이것은 과장의 법칙이다.

4세대가 한국근현대를 비춘다. 기술과 문화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사 부조리를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물질의 변화가 변하지 않는 인간 본질을 강조한다. 작가의 문장력은 시대와 성별과 계층을 아우른다. 글빨로 시대상을 생생히 드러낸다. 20세기 한국을 고증한다. 비판적 독자의 손을 잡아 장면으로 이끈다.

소설엔 생생한 현실감과 반대로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다. 고증은 소설이 현실이라 오도하지만, 초현실적 내러티브가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짓는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현지화다. 국산 마르께스는 풍자를 사용해 소설은 현실이 아니라 소리친다. 강한 역설이다. 이것은 소설입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신비한 상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니 현실로 오해 마세요. 마법은 현실 밖으로 향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한다. 튕겨 나온 말은 강하게 현실에 부딪친다. 천명관 말대로 이야기는 부조리한 삶을 탐구하는 도구이다. 그의 이야기는 부조리한 삶을 톺는다.

경계 짓기 도구는 내러티브만이 아니다. 작가의 개입도 경계를 강조한다. 20세기에 뜬금없이 21세기가 나온다. 작가의 말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를테면,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오는 게 무슨 상관이냐 하는 반론이 나오자, 저 새끼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야 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고졸도 보기 힘든 전후 개깡촌에서 나눈 대화라 볼 수 없다. 세기를 오가는 지문은 현실의 단면을 발가벗긴다. 터무니없는 21세기의 등장은 웃음과 인간 고찰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현실에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나)은 글 몇 줄로 세상을 정의한다. 왜? 인과관계는 인간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인과는 생각의 고통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된단 허가증을 준다. 이런 세태를 비판하고자 천명관 작가는 책 내내 법칙 운운한다. 이것은 00의 법칙이다. 이 세상엔 말이 너무 많다. 말은 인과를 설명하고 규정하려 한다. 그의 불필요한 규정은 사회를 향한 조롱으로 보인다. 달변의 금복과 무언의 춘희는 대조된다. 금복은 세속의 상징으로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이다. 언어는 욕망의 덩어리인 셈이다. 후설은 멋대로 재단하지 말 것을, 판단은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것이 에포케다. 소설의 기구한 운명의 굴레, 주술, 저주, 신비체험 등은 에포케를 요구한다. 춘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고 감각한다. 언어란 쉬운 도구를 포기하고 세상을 직접 감각한다. 에포케를 체화한 인물이다. 춘희처럼 충실히 살고 싶지만, 독후감 쓰는 인간으로서 에포케를 무시하기로 하자. 이것은 독후감의 법칙이다.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제목의 고래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한다. 팔루스, 대타자, 실현 불가능한 욕망 등으로 읽힌다. 쉽게 쓰면 꼬추다. 참고로 고래 사냥은 포경이다. 상징계의 욕망은 완전한 소유가 불가능하다. 여성의 꼬추를 향한 본질적 욕망(소유하고자 하는)과 본질적 결여를 의미한다. 도둑맞은 페니스(꼬추 다른 말)를 찾고자 하는 영원한 욕망이 고래에 담겼다. 엄마 금복이 평생 쫓지만 평생 가질 수 없던 완성된 욕망이다.

금복과 노처녀(후반엔 노파로 명명)는 닿을 수 없는 곳에 닿기 위해 손을 휘젓는다. 그들의 움직임은 격렬해진다. 욕망의 상징으로 부를 축적한다. 결국 그 부는 쓰이지 못 하거나, 한순간에 소각된다. 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욕망의 완성을 가리킨다.

비극은 대물림된다. 다만 피를 타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서 욕망으로 대물림된다. 노파의 비극은 금복에게 이어지고, 춘희는 이 대물림의 사슬을 끊는다. 금복과 춘희는 대조된다. 금복은 자신 밖으로 에너지를 분출한다. 유물론자인 그녀는 물질을 탐한다. 실체가 없는 욕망(영화, 남성성, 죽음 없는 삶 등)을 쉼 없이 쫓는다. 결국 그녀의 욕망은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고래(팔루스)를 형상화한 극장을 만든다. 그녀의 욕망은 극장이란 존재로 비유된다. 영화는 이미지일 뿐, 실체를 가지지 못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도 마찬가지다. 금복은 무수히 많은 말로 인생을 채운다. 반면 춘희는 자신 안으로 에너지를 분출한다. 관념의 세상에서 부유한다. 세속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세상에 틀어박힌다. 벽돌을 쌓듯 관념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한다. 그녀는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채운다.

천명관 작가는 춘희처럼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구축했다.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글 위를 천방지축 뛰논다.

소설은 재미와 의미를 다 취한다. 고래는 재밌다. 긴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다. 책이 끝나지 않길 바란다. 흥미로운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저자의 말도 재밌다. 하지만 단순히 재밌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 저자의 뜬금없는 개입과 헛소리는 포스트모던적이다. 직접 드러내는 대신 메시지로 가는 길을 열어 둔다. 춘희의 죽음 이후 세상은 춘희의 삶을 멋대로의 추측하고 고쳐 쓴다. 말 많은 세상을 향한 조롱이다. 독자는 빗나간 고쳐쓰기를 반면교사 삼는다. 읽는 이가 규정하는 대신, 감각하길 바란다.

언젠가 한국과 한국말을 잘 아는 번역가를 만난다면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마지막에 다시 나온 과장의 법칙이다.

작가의 이전글 NC소프트에 돈을 건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