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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Apr 10. 2023

미식가의 자격



 나는 미식가가 아니다. 식당 앞에서 15분 넘게 기다리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미식 임계치다. 내겐 웬만한 요리는 미식(좋은/맛있는 음식)에 속한다. MSG 추출, 정제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MSG는 손쉽게 요리의 맛을 정돈한다. 사방팔방 튀는 맛을 한데 모아 통합을 이룩한다. MSG는 나를 만족시킨다. 좀처럼 하이앤드 식당에 가지 않는다. 뭘 먹어도 맛있다. 돈 쓸 필요 없다. 먼 길 떠날 필요 없다. 기다릴 필요 없다. 노력하지 않는 먹보는 미식가가 아니다.





식객 투어를 떠났다. 너사와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베트남 타운으로 알려진 스프링베일로 향했다. 그곳에는 동남아 전문 식료품점과 식당이 즐비했다.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갔다. 가장 큰 이유는 한 쌀국수 식당이다. 그곳의 쌀국수를 먹으면 다른 쌀국수를 먹지 못 한다는 친구의 전언. 쌀국수 맛의 극한이 경쟁자들이 경쟁력을 앗아간다. 마법의 쌀국수를 먹기 위해 쌀국수 원정대가 꾸려졌다. 전열을 가다듬고 왕복 한 시간 넘는 여정을 떠났다.





마법의 쌀국수집은 붐볐다. 이른 점심에 향했다. 대기열이 있었다. 우리 앞으로 5팀 정도가 줄을 섰다. 기대감을 키웠다. 빨리 먹기 위해 실외 테이블에 앉았다.식욕이 날씨를 이겼다. 베트남 요리사가 만들고, 베트남 직원이 나르는 쌀국수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비프 콤비네이션을 주문했다. 다양한 부위의 소고기가 그릇을 채웠다. 위로 베트남식 깻잎과 숙주를 한가득 올리고 레몬을 꾹 눌러 즙을 뿌렸다. 레몬 있던 종지에 호이신소스와 스리라차 소스, 칠리 오일을 섞어 찍어 먹는 양념장을 만들었다. 준비는 끝났다. 파괴적 쌀국수를 먹을 준비가. 다른 쌀국수를 먹지 못 한다 해도 기꺼이 젓가락을 움직이겠다.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다른집 쌀국수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마법의 쌀국수는 맛있다. 다만 경쟁자를 트랙 밖으로 밀어버릴 정도로 강력하진 않다. 여전히 경쟁자는 비슷하게 달린다. 너사와와 친구가 맛을 예찬했다. 다른 곳에 없는 맛이다, 이 맛은 여기밖에 못 낸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곳에도 있는 맛이다. 그들의 극찬을 호들갑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마법은 예민한 미각을 지닌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친구는 이 맛은 주기적으로 느껴야 한다, 이사를 하겠다고 호들갑 떨었다. 이 맛을 위해 이동에 한 시간 넘게 쓰고 싶지 않고, 도로에 기름 뿌리고 싶지 않다. 활동 범위 안에 있는 쌀국수 식당도 맛있다. 돈 안 쓰고 안 기다리고 먹을 수 있는 대체재가 있다. 주기적으로 이 맛을 느낄 필요도, 먼 길 떠날 이유도 찾지 못 했다.





아 나의 혀는 왜 이리도 무던한 것인가. 날카로운 미각, 호불호가 강한 미각을 갖고 싶다. 어떤 분야든 진심인 이들이 있다. 아무튼 시리즈의 저자처럼. 한 분야에 정통하고 싶다. 그들은 멋지다. 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음미한다. 신은 내게 날카로운 미각 옵션을 제외했다. 그것은 플래그십 힙스터에게 주는 옵션이다. 염가제품인 너에겐 얼렁뚱땅 입맛을 주겠다. 아이폰 프로 맥스 512기가를 살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200만 원 넘는다. 한 달 용돈 모아도 못 산다. 부티 1이 추가된다. 대신 아이폰 SE 64기가를 1/5 가격에 구매한다. 모두에게 열려 있다. 맛에 너그러운 나는 SE인간이다.





사소한 맛의 차이를 위해 몇 시간을 도로에서, 긴 대기줄에서 버티는 사람을 미식가라 부른다. 본인만의 맛 플레이 리스트를 가졌다. 쌀국수에 진심인 사람은 멜버른 쌀국수 맛집 리스트를 보유한다. 마치 로파이 이모힙합에 진심인 사람이 본인만의 이모힙합 명곡 리스트를 지닌 것처럼. 나는 멜론 TOP100과 라떼 뮤직을 듣는다. 쌀국수 원정에 참석한 친구는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에 매니악한 음악을 꽉꽉 채워 본인만의 감성을 자랑하는 힙스터다. 나는 일반인이다. 힙스터 되고 싶지만 효율이 허락하지 않는다.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사람, 감수할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멋의 은총이 내린다. 나는 아니다.





친구는 밥을 먹고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랍스터기름과 프론 솔트, 각종 매니악한 동남아 식재료를 담았다. 힙스터는 도전에 열려 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선호의 분포도가 구체적이다. 우리 집 주방엔 맛소금, 소고기 다시다, 조개 다시다가 자리한다. 지금까지 먹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먹을 범용성 좋은 MSG다. 효율 따지는 사람은 식도락가 탈락이다.





너사와와 맥도날드를 찾는다. 빅맥세트 두 개를 시킨다. 너사와는 분하고 나는 기분 업한다. 이런 쓰레기 음식을 먹는 자신이 싫어진다는 그녀와 어느새 어른이 돼서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먹고 싶을 때 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한 내가 한자리에 앉는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한 끼를 때우는 너사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섬유질이 골고루 포함된 영양만점 햄버거를 음미하는 나.





미식가 탈락자의 자기 위로다. 열에 아홉이 미식이다. 후한 입맛 덕에 멋은 없고 맛은 있다.








후일담

힙합에 펀치라인이 있다. 요컨대 한방 날려주는 가사다. 글에도 펀치 라인이 있다. 펀치 라인은 주관적이다. 듣는 사람(읽는 사람)이 한방 먹어야 펀치라인이 된다. 펀치라인을 썼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쇼미 더 머니 래퍼 빙의했다. 리액션을 했다. "호우- 유 갓 미 유 갓 미" 한껏 찡그린 얼굴로,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무대를 뒤집어놨어라는 뉘앙스다.



"미식가 탈락자의 자기 위로다. 열에 아홉이 미식이다. 후한 입맛 덕에 멋은 없고 맛은 있다."



어제 미식가의 자격이란 글을 썼다. 시간에 쫓겨 글을 썼다. 동행과 카페에 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6시에 카페를 나서기로 했다. 중간중간 일이 생겼다. 글쓰기가 끊겼다. 글을 휘뚜루마뚜루 매듭지었다. 급하게 쓴 것치곤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 시간은 현자 타임을 제공한다. 눈 붙이고 일어났다. 마지막 문단이 눈에 밟힌다. 원래 쓴 글은 이렇다.



"미식가 탈락자의 자기 위로다. 열에 아홉이 미식이다. 멋은 없을지언정 행복 총량은 높다."



너무 직접적이다. 글맛이 떨어졌다. 보통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 펀치라인을 배치한다. 글의 정수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서 리듬감이나 유머가 곁든 문장을 찾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대조하고자 했다. 애초에 멋은 없지만 행복하다고 썼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고상하지 않다. 가끔 직접적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올 때가 있지만 여기선 아니다. 행복하다는 표현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행복 총량이 높다고 고쳐 썼다. 그나마 낫다. 자고 일어나니 이 또한 고상하지 않다.



매스를 꺼내 든다. 브런치에 전날 쓴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는다. 블로그에 쓴 글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다. 발행 버튼을 누르려는 손을 마지막 문장이 막는다. 바꾸자. 주관을 빼고 객관을 넣자. 말의 맛을 살리자. 멋없어도 여러 음식 맛있게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일단 군더더기를 먼저 제거하자. 원형 상태에서 늘려가자. '멋없지만 행복하다' 리듬감을 주기 위해 없다 뒤로 있다가 오면 좋겠다. '멋 없고 행복 있다' 낫다. 행복이라는 직접적 단어를 빼자. 행복 대신 들어갈 단어가 뭐가 있을까? 멋과 상응하게 1음절이면 더할 나위 없다. 유레카! '맛'이다. 음절뿐만 아니고 어감도 비슷하다. '멋은 없고 맛은 있다' 펀치 라인이 완성됐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대론 뜬금없다. '세련되지 않은 취향 덕에 멋은 없고 맛은 있다' 붙는 말이 길어지니 말의 맛이 떨어진다. 세련되지 않은 취향을 짧게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좀 더 일상적인 말이어야 한다. 무게 잡은 펀치 라인은 쿨하지 않다. 아, 후한 입맛! '후한 입맛 덕에 멋은 없고 맛은 있다'



시행착오를 거쳤다. 말맛 좋은 문장이 탄생했다. 마지막 문장은 쇠고기 다시다다. 그래, 이 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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