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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22. 2023

마땅한 빈곤


커뮤니티에서 자극적인 제목을 봤다. '만삭 임산부인데 친구가 에어컨을 빌려달라고 해요' 온라인 공개 처형을 시작한다. 친구는 십중팔구 썅년, 썅놈이다. 글쓴이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 같이 욕해주세요-라는 행간이 있다. 마녀 사냥에 참여하진 않지만 그 흥분과 자극이 나를 불렀다.



내용은 전,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는 예상과 같았다. 친구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글쓴이를 당황케 했고, 독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만삭의 글쓴이는 새벽에 친구로부터 황당한 전화를 받는다. 너무 더우니 에어컨을 빌려달라. 2022년 8월에 작성된 글로, 무더위의 한가운데 있다. 만삭 임산부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보호가 필요한 사람에게서 안락한 환경을 뺏어가려는 악당이 등장한다. 악행이 이뤄지는 형태도 공분을 샀다. 새벽에 전화벨을 울려서 요구한다. 너무 더우니 에어컨을 한 달만 빌려 쓰자- 글쓴이는 황당함에 친구와 손절을 다짐하고 모든 연락처를 차단한다. 분이 풀리지 않아 온라인에 글을 쓴다. 이것이 전반부.



후반부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후반부는 후기 형식으로 새로운 게시글로 올라왔다. 이미 대중의 분노가 휩쓸고 간 이후다. 글쓴이는 단순히 마녀사냥의 주동자이길 거부했다. 분을 삭이고 한 걸음 나아갔다. 파격의 주인공은 아이 둘을 데리고 복숭아 한 봉지를 챙겨 사과하러 왔다. 글쓴이는 일단 상대의 말을 듣기로 했다. 분노를 유예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야기를 듣고, 상대의 집으로 찾아가 현실을 두 눈에 담았다.



에스트로겐 분비가 시작된 30대 남성은 비애 속으로 빠졌다. 글쓴이는 친구의 환경을 알게 됐다. 친구는 혼자서 애 둘을 키우는 싱글맘이었다. 주방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생활인데, 팔을 다치게 됐다. 팔에 깁스를 하게 되고 일을 몇 주간 쉬게 됐다. 수익이 끊겼다. 생활비가 없으니 지출을 최대로 줄여야 했다. 10평 남짓한 곰팡이로 가득한 집에서 아픈 팔을 움직이며 아이 둘을 돌봤다. 설상가상 에어컨이 고장 났다. 아이는 울고, 돈은 없고, 몸은 불편하고, 집은 찜통처럼 덥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한다. 새벽에 친구에게 전화 걸어 에어컨을 빌려달라 말한다.



글은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어딘가에 분명 있을 법한 일이다. 세상은 넓고, 삶의 양태는 다양하다. 우리 시선은 주위에 머문다. 바운더리 밖으로 나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 글이 거짓일지언정, 저 또한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다.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을 떠올린다. 마음이 무겁다. 숨이 막힌다. 빈곤은 절대적이다.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한번 고리가 걸리면 줄줄이 소시지처럼 여생을 빈곤에 허덕인다. 빈곤의 고리 앞에서 방황했던 나다. 남일이 아니다. 깊게 공감한다.



24살의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전문대를 졸업한 직후다. 일본어를 전공했으나 일본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사업을 하겠다.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전역 후에 학업과 병행해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했다. 지금 생각하면 허술한 시스템이다. 마땅한 수익을 낼 수 없었다. 불필요한 절차가 많았고, 사업 아이템도 수익을 내기 어려웠다. 단지 어린 사장이라는 감투에 만족할 뿐이었다. 수익보다 지출이 더 컸다. 오래 버티지 못 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나는 학벌 없고, 기술 없고, 나이만 24살 먹은 잉여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최저시급을 제시했다. 그 이상을 받으려면 몸을 갈아 넣어야 했다. 한국에 머물렀다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 30대 중반이 됐을 것이다. 반 도피식으로 일본으로, 호주로 떠났다. 다중우주에 떠난다는 결정을 하지 않은 내가 있다. 그는 빈곤의 고리에 걸렸다.



그(다중우주의 나, 한국에 남은 나)는 지금 나보다 더 많은 노동을, 노력을, 부당함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더 어렵고 험난한 환경에 처했을 것이다. 이 우주의 나는 환경의 도움을 받아 여유로운 삶을 영위한다. 최저 시급이 높은 나라에서, 덜 치열하게 일하고 더 많은 대가를 얻었다. 짧은 노동으로 생계가 유지됐다. 여가 시간이 많다.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기본 소양이 생긴다. 괜찮은 여자를 만난다. 대화가 통한다. 결혼한다. 투자 지식이 생긴다. 투자한다. 돈을 불린다. 친구를 사귄다. 동업 제안을 받는다. 불린 돈을 사용한다. 불로 소득이 생긴다. NCT가 말한다. 내가 나를 이끄는 보스. 나는 보스 정반대 존재다. 세상이 나를 이끌었고, 나는 나의 능력이라 착각하며 이런저런 수혜를 입었다. 돌아보니 내가 누리는 환경에서 온전한 내 능력이 작용한 부분은 극히 일부임을 깨닫는다. 사람의 다양한 양태는 하나의 큰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운.



곰팡이 핀 10평 집에서 애 둘 보는 팔 다친 30대 여성의 이야기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풋이 모자란 나는 혼자서 생각하기 어렵다. 사회의 오더를 손쉽게 수긍한다. 30대라면 ~정도는 벌어야 해. ~정도를 벌려면 내가 할 일은 양심을 타협하거나,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을 하거나다.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30대가 응당 받아야 하는 돈을 벌기 위해 빠르게 신체를 소모한다. 그러다 몸이 다친다. 수익이 끊긴다. 몸을 안 쓰는 일을 해야 한다. 중간중간 일을 빠지는 이를 고용할 순 없다. 편의점 알바 자리 구하기도 어렵다. 사장은 다루기 쉬운 20대를 쓰려한다. 몸 상태에 따라 일용직을 전전한다. 상상 가능한, 아니 가장 상상과 가까운 모습이다. 하루하루 최선의 노력을 하겠지만 이 굴레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 세계의 나는 무슨 잘못을 한 걸까? 빈곤이 온전한 내 책임일까? 지금 내가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 온전한 내 능력이 아닌 것처럼, 그 세계의 내가 받는 빈곤도 온전한 내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저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 나는 반능력주의자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에 마음이 이끌리고, 현실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시스템과 기본소득에 지지를 표한다. 내게 온 행운에 감사하고, 누군가의 빈곤에 마음 아프다. 행동경제학과 지정학, 구조주의 등의 주장에 동의한다. 환경의 힘은 절대적이다.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 나눴다. 최근 본 글을 화제로 올렸다.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가슴이 아팠다. 내 여유가 송구스럽다- 친구는 단칼에 슬픔을 잘랐다. 그건 그 사람이 게을러서예요. 노력했다면 그런 상황이 안 왔겠죠. 형도 너무 마음 불편하게 갖지 마세요. 형의 재산이나 수익은 형의 능력이에요. 당당하게 누려요. 형이 훨씬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보다 많이 벌고 여유롭게 사는 거죠. 노력한 만큼 받는 게 정당한 거죠. 친구는 좋은 사람이다. 남을 위할 줄 알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쓰며 남을 돕는다. 남을 배려하고, 훌륭히 공감한다. 그의 이런 반응은 나의 슬픔을, 불편을 덜기 위한 배려다. 그러나 내게 불합리한 언사다. 친구는 한마디로 선의의 가해자다. 불합리한 시스템을 옹호하고, 피해자에 책임을 보낸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구나- 한 마디로 대화 주제를 바꿨다.



나의 물질적 생활의 근간을 본다. 쟁취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투자 지식은 호주 사회란 시스템이 여가를 제공한 덕이다. 호주 사회에 머물 권한은 호주 시민권자와의 결혼 덕이다. 증권계좌의 개설은 해외 거주자가 한국 통장을 만들 수 없는 환경 덕이다. 사업 소득(불로소득)은 수완 좋은 동업자를 친구로 둔 덕이다. 사업의 지분 확보는 투자 수익 덕이다. 나는 잘 짜인 식탁에 숟가락 올리는 것으로 이득을 취했다. 내가 남보다 노력을 많이 했다거나, 능력이 특출 난 게 아니다. 어쩌다 생긴 여유를 근거로 타인의 불행에 손가락질할 수 없다.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어. 당신의 빈곤과 어려움은 당신이 불러들인 것. 받아들여.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 그러게 노력하지 그랬어-라고 말할 수 없다.



요컨대 커뮤니티 글 속 마녀사냥 대상이 될 뻔한 여성이 상징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비난해선 안 된다. 그 절박함이 무지의 장막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빈곤은 누구에게도 마땅하지 않다. 마땅하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 잘 어울린단 의미다. 세상 어디에도 빈곤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미천한 내 능력이 사회 시스템을 갈아엎을 순 없다. 내 돈을 타인에 나눠줄 정도로 훌륭한 사람도 못 된다. 최소한 타인의 절박함에 마땅함을 논하고 싶지 않다.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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