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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Jul 09. 2023

스껄


어제오늘 내 모습을 보니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스껄.



스껄은 요즘 힙합 추임새다. 타이어가 지면을 마찰할 때 나는 의성어다. 영어로 skrrrr로 적는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레이싱카처럼 누군가의 행동이 쿨하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래퍼들의 영상을 보면 사용처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단체곡에서 참여자가 멋지게 펀치라인을 소화한다. 혹은 뛰어난 랩 실력을 자랑한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앓는 표정을 하며 읊조린다. 스껄.



요컨대 나의 어떤 면이 멋있다는 의미다. 세속적인 면이다. 힙합적으로 해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멋이다. 소비에 나를 위탁하고, 나를 드러내는 대체물이기도 하다. 힙합에서 이런 측면이 한층 더 강화된다. 래퍼들의 대표적 스껄 출처는 소비다. 힙합은 게토에서 어렵게 자란 흑인이 성공하는 등용문 중 하나다. 스포츠 스타가 되거나 랩스타가 되어야 그간의 고난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래퍼는 그 고리를 끊었음을 본인이 타는 차, 차는 시계, 먹는 음식 등을 통해 증명한다. 도끼는 투 체인즈 앤 롤리에서 금목걸이와 롤렉스 시계로 본인의 가치를 언급했다. 나는 래퍼는 아니지만 풀소비로 멋을 뽐냈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 주간 미팅을 한다. 영업 이익을 지분에 따라 나눈다. 어제 미팅에서 최대 규모의 수익이 발생했다. 이런저런 호재가 겹친 덕에 풍족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받은 주급이 내 본업의 월 수익과 같다. 앞으로도 없을 최대의 돈잔치를 즐겼다. 가끔 대기업 직원들이 연말 성과급으로, 명절 떡값으로 월급 이상을 받는단 뉴스를 본다.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영세한 자영업자와는 무관한 뉴스다. 보너스 받는 직장인의 기분에 한 발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돈을 받아 들으니 랩스타가 된 것도 같았다. 돈뭉치를 들고 치아에 그릴을 끼고 반쯤 풀린 눈으로 나의 좋은 점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싶다. 그리고 추임새로 스껄.



예정에 없던 큰돈이 생기니 배포가 두둑해진다. 농사가 풍년을 맞아 곳간이 가득하다. 곳간을 바라보니 없던 인심이 생긴다. 미팅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가위바위보로 골든벨 울릴 대상을 정했다. 주먹 사이에 가위를 낸 내가 벨 보이가 됐다. 나는 껄껄 웃으며 내게 생긴 행운을 잡았다. 친구들을 기쁘게 할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멜번에서 가장 인기 많은 태국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돈 신경 쓰지 말고, 남기는 것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고르라고 말했다. 밥도 일반 라이스 말고 스티끼 라이스로 주문했다. 각각 마음에 드는 개인 메뉴를 고르고 풋팟퐁 커리를 추가했다. 내가 시킨 개인 메뉴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 넉넉히 주문한 덕에 개인 메뉴를 먹지 않아도 배불리 먹었다. 대왕 새우도 있었는데, 까기 귀찮아서 버렸다. 음식을 남겼다. 무장 화웅을 앞에 둔 관우가 됐다. 저 장수가 아무리 강해도 나 관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지.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슬슬 산책 가는 심정으로 나가서 화웅의 모가지 자르고 돌아온다. 나는 100불짜리 가격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결제 버튼 누르고 식당을 나섰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었다. 너사와가 내게 목걸이를 사달란다. 세계 미스테리에 하나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억 소리 나는 연봉 받는 너사와의 통장 잔고다. 본업 기준으로 나보다 많이 버는 그녀인데 매번 돈이 없다. 본인보다 못 버는 남편에게 가벼운 목소리로 목걸이나 귀걸이를 사달라고 한다. 미스테리의 단서는 그녀의 고상한 취향에 있다. 명품이나 다른 사람의 욕망에 관심이 없다. 질 좋고 본인 취향에 맞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개성의 보유자가 배우자라는 데 감격한다. 그녀가 까다로운 취향에 맞는 귀걸이를 발견했다. 나는 통장에 300불 넣었으니 원하는 것을 쟁취하라 말했다. 500불이었으면 못 사줬을 거라는 말은 삼켰다. 아무튼 봤노라, 남편에게 말했노라, 돈 받았노라.



일요일 업무를 마치고 일본식 카페인 히카리에 왔다. 평소엔 절대 사지 않을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유즈 치즈케익이 눈에 들어왔다. 여유 있는 30대 남성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캔 아이 겟 에이 콜드브루 앤드 유즈 치즈케이크 플리즈? 나는 바로 어제 보너스를 받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여유 있는 성인이다. 코딱지만 한 유즈 치즈케이크에 기꺼이 8불, 주말 10% 차지를 더해 8.8불을 쓸 수 있다. 마치 9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말투로 주문했다. 메타 인지가 말한다. 와 너 폼 미쳐따이. 내가 봤어. 9불짜리 치즈케익 아무렇지 않게 주문하는 모습. 목소리 하나도 안 떨렸고 자연스러웠어. 한화로 거의 9천 원인데, 너는 9천 원짜리 케익을 배고프지도 않은데 먹을 수 있는 어른이야. 호우.. 스껄스껄.



스껄 스껄 하며 자신의 소비에 도취된 모습을 보다 이상함을 감지한다. 내가 어른 됐다며, 돈 많은 개인사업가 흉내 내며 하는 소비가 실은 대학도 졸업 안 한 워킹홀리데이 비자 홀더의 소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가능한 것이지. 내가 이상한 것인가 그들이 이상한 것일까? 시급 23불 받아 풀타임으로 일했을 때 그들이 받는 돈은 920불이다. 여기서 세금 138불을 제외한 실수령액은 782불이다. 멜번 기준 하우스쉐어 독방 주거비는 400불 정도다. 집세를 제외하면 382불이 손에 들어온다. 여기서 통신비, 교통비를 제한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조각 케익을 시키고 풋팟퐁 커리를 시킨다. 내가 이만큼 벌어서 할 수 있는 소비를 저만큼 벌어서 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돈을 쓴다. 소비와 지출 비율이 기묘하다. 100을 벌고 100을 쓴다.



작년 한국 방문이 떠오른다. 친구들의 환대를 받았다. 친구들은 어른이 됐다. 친구들이 밥값과 1차 술집을 계산했고, 다음으로 내가 하이볼을 쏘기로 했다. 한 친구는 나와 너사와를 데리고 아가씨 30명 대기 중인 술집으로 이끌었다. 최초 20명 대기 중 술집으로 가자는 것을 1시간 가량 반대했다. 더 이상 친구들 데리고 밤거리를 활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친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며 1시간을 권유했고, 우리는 속는 셈 치고 10명이 추가된 30명 대기 중 술집에 갔다. 그런 곳이었다. 정장 입은 남성이 스위치를 누르자 슬라이딩 도어가 열렸다. 맞은편에 TV에서 보던 장면이 펼쳐졌다. 화려한 드레스 입은 아가씨가 얼음통과 각종 비싸 보이는 주류 조제 용품을 테이블 위로 나열했다. 메뉴판을 펼치자 턱 떨어진다. 메비턱락이다. 물론 여기엔 인과가 분명하다. 메뉴판에 나온 금액이 턱을 다물지 못 하게 만들었다. 가장 저렴한 음료가 50만 원부터였다. 친구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자기가 쏘겠다며 술 고르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화려한 드레스의 아가씨와 정장 형님들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알기로 친구들이 버는 돈은 한국 평균 정도다. 3,400만 원 정도 벌어 배우자와 자녀의 생계를 책임진다. 미녀 30명 대기 중인 술집에서 본 메뉴판은 충격이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버는 내가 일생 본 적 없는 가격표였다. 타국에서 온 친구를 위한 마음의 강렬함을 절감하면서도 기형적인 지출 비율에 의아했다.



너사와 선물 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배포 있는 남편을 연기하며 300불짜리 귀걸이를 사라고 말했다. 배포 있는 친구를 연기하며 100불짜리 점심 식사를 샀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30대를 연기하며 COS 코듀로이 재킷을 입는다. 190불짜리 반값 행사할 때 95불에 샀다. 다른 코듀로이 재킷은 13년 전에 최종할인 받아 19,000원 주고 유니클로에서 샀다. 올해 들어 최고액 소비는 파라부트의 뮬인데 할인받아 250불 정도 줬다. 죄책감에 시달리다 너사와에게 고해성사했다. 그러다 막 20대에 접어든 시급 24불 받는 우리 직원들이 떠올랐다. 생로랑, 디올, 고야드,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출근한다. 고용주이자 사회 선배이자, 그들보다 몇 배 많은 수익을 올리는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가방이다. 최고로 비싼 가방은 중고로 200불 전후 값을 준 프라이탁 가방이다. 나보다 배 이상 버는 동업자는 여자친구가 사준 백 불짜리 코스 가방을 들고 다닌다.



스껄-하게 만드는 소비가 모두의 소비임을 눈치챈다. 소득은 불평등한데 소비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스껄 뒤에 물음표가 붙는다. 스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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