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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Oct 17. 2023

청소기 잡은 10년

은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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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이 결승선에 다다랐다. 중간 어디쯤으로 들어왔다. 사업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못 했다. 부상이나 중도 하차가 없다는 데 의의를 둔다. 10년 했다. 한국에선 강산이 변한다는 수식으로, 영미권에선 Decade란 단어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나의 20대 절반과 30대 절반을 함께한 사업이다. 전반부엔 주법을 달리하고 페이스메이커를 찾는 작업에 열중했다. 후반부엔 그냥 뛰었다. 몸이 나를 이끌었다. 관성에 끌려온 후반부다. 새로운 레이스에 나서기 위해 항상 곁에 있던 결승선으로 발을 돌렸다.




지난 십 년의 노동을 돌아보며 쓰는 글이다.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무엇을 얻었고, 나를 어떻게 바꿨는지 이야기하겠다.




내가 얻은 가장 큰 결실은 여가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쪼개서 표현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여러 결실의 지지기반이기도 한 것이 여가다. 먼저 여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여가는 직업 활동, 생계 연명과 무관한 일체의 활동을 뜻한다. 그러니까 돈 벌고 요리하고, 먹고 자는 시간 이외의 총체다. 일반적으로 여가라고 하면, 시간을 지칭하기도 하고, 그 시간을 채우는 방식을 지칭하기도 한다. 풀어쓰자면 쉬는 시간과 취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본업(청소)을 하며 충분한 쉬는 시간을 얻었다. 그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지향은 어디이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몇 가지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다. 그것은 글쓰기, 독서, 사진 촬영이다. 대외적으로 취미라고 소개한다.




충분한 여가는 취미에 충분한 기회를 준다. 그 덕에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적당히 찍었다. 읽고, 쓰고, 찍는 작업은 자신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활동이다. 사진은 설명이 필요하다. 찍은 뒤에 묻는다. 이 나무는 왜 있고, 왜 이 각도로, 이런 빛을 이용했어? 왜 이 사람들을 프레임에 넣었어? 왜 저런 동작을 찍었어? 묻다 보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알게 된다. 일련의 취미활동은 자아실현에 도움을 줬다.




청소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며 초반엔 동년배 친구들에 비해 충분한 수익을 거뒀고, 후반부엔 비슷한 수익을 거뒀다. 나의 수익은 늘 비슷한 반면, 피어 집단의 수익은 꾸준히 올랐다. 초반엔 주 3.5일을 일했다. 한 주 3일, 한 주는 4일이다. 수입은 조금 일해도 괜찮다는 명분을 줬다. 익숙해진 후반엔 안 괜찮지만 뭐 어쩌겠어-라고 생각했다. 여가는 놓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강산 한 번 변할 동안 돈의 무게가 가벼워졌고, 덩달아 주머니도 가벼워졌다.




청소는 메타인지에 도움이 됐다. 일하는 내내 귀엔 이어폰이 꽂혀 있다. 나도 MZ인데 이런다고 일의 능률이 올라가진 않는다. 순전히 재미다. 팟캐스트와 이북을 청취했다. (이북 7, 팟캐스트 3) 결과적으로 많이 읽었다. 작년 한 해 180권을 읽을 수 있던 것도 일하는 방식 덕이었다. 책은 순기능이 많다. 다양한 분야의 앎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모름을 인식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게 커진다. 더닝 크루거가 주제 파악 도식을 만들었는데, 내가 사례다. 능력이 없이 과잉 자신감으로 살았고, 가까스로 주제를 알았다. 책은 올바른 자기평가에 일조했다.




자본 증식에도 영향을 줬다. 잡식성 독서를 지향했다. 그래도 유독 많이 본 장르의 책이 있다. 경제/ 투자 서적이다. 청소인으로 절반을 살았을 무렵, 주식투자에 눈을 떴다. 내게 잘 맞는 투자법(가치 투자)을 찾았고, 역할 모델을 찾았고, 그들의 시행착오를 대리 경험해 빠지기 쉬운 함정을 피했다. 배우면 해보고 싶다. 돈 굴리는 방법을 배웠고, 돈을 굴렸다. 생각보다 잘 굴렀다. 평생 노동으로 모은 돈보다 몇 배 큰돈을 얻었다. 투자 수익이 본업에서 안주하라는 명분을 줬다. 명분도 얻었겠다 안주하며 몇 년을 더 보냈다.




이런(독서하는) 업무 방식은 여가에 영향을 끼쳤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 머리에 들어온 것을 꺼내고 싶다. 소화를 시키고 싶다. 현실에 적용하고 싶다. 이 욕구를 모니터 위로 꺼내 놓는다. 퇴근 후에 랩톱을 챙겨서 카페로 향했다. 커피 홀짝이며 복습했다. 책에서 필터를 줍는다. 내 일상과 과거를 필터를 통해 들여다본다. 과거는 매번 갱신된다. 같은 사건은 다르게 해석됐다. 과거의 나는 입체적 인물로 거듭났다. 일하는 내내 책을 읽을(들을) 수 있다는 것은 혜택이다. 큰 변화는 대체로 사소한 습관에서 나온다. 반복 작업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심심풀이 독서가 10년 쌓이니 사람이 변한다. 세상과 타인을 향하던 가시가 빠졌다. 다정해졌다. 틈새라면에서 진라면 순한 맛으로 거듭났다. 부족함이 많아 타인을 비난하고 조롱했다. 그들의 열등함이 나의 우등함의 근거가 됐다. 주제 파악은 좋게 말하면 자기 수용이다. 괜찮은 점, 부족한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만족을 얻는데 재물이 필요 없다.




업무엔 몰입하지 않았다. 일의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고, 지향할 목표가 없었다. 위 글이 말해준다. 청소 그 자체 대신 부가가치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미지근한 태도로 임했다. 나는 언제고 대체될 수 있다 믿었고, 고객들이 원하는 서비스 딱 그 정도를 주고자 했다. 업무인으로서 내 지향은 중간만 하자였다. 노동윤리를 고쳐 쓰면, '돈값 하자'. 받은 만큼 줬다. 자본 소득이 생기면서 안주했다. 투자가 미래를, 노동이 하루하루를 담당했다.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 없었기에 현상 유지에 힘썼다. 현상 유지를 위해 할 일은 똑같이 일하기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도 없고, 더 별로인 서비스를 제공해서도 안 됐다. 노동의 질은 몇 년 전과 똑같다. 주방과 욕실을 청소하고,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그 과정에서 문명의 이기를 도입했다. 전동 스퀴지, 전동 브러쉬, 스팀 머신 등. 기계 사용으로 시간이 절약됐다. 남은 시간은 추가 서비스 대신 빠른 퇴근에 쓰였다.




고객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많은 고객을 만났다. 한 번 보고 마는 이사 청소 고객도 있고, 매주 9년 동안 보는 고정 고객도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게 된다. 몹시 무례한 사람과 몹시 정중한 사람, 쉽게 쉽게 가는 사람과 까다롭게 구는 사람. 돈을 안 주는 사람 제때 주는 사람. 이 모든 도표를 참고해 선호와 비선호를 나눴다. 핵심은 내가 당당할수록 선호하는 고객을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내가 주는 서비스를 잘 알지 못 하고, 언어 탓에 주눅 들어 있을 때 선호하지 않는 고객을 만난다. 사람은 상대적이다. 같은 사람도 대하는 방식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 전문성이 부족할 때 고객은 실망하고 종종 실망스러움을 무례로 표현한다. 일적으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며 배운 점은 이렇다. 판매하는 서비스/재화에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고객과 기싸움은 피할 것,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 위를 지키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 덕에 인종/문화의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을 받았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의 사람을 고객으로 만난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먹고 자고 일하는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여기에 약간의 변주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민의 역사가 한국보단 길고, 좀 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이 많은 호주 같은 곳에선 그 변주의 폭마저도 크지 않다. 인간마저도 로컬라이즈 된다. 다 같은 사람임을 깨달으니 한결 다가가기 쉽다.




역지사지를 안 할 수가 없다.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선호하는 고객이 있다. 어떤 고객은 돈과 무관하게 정이 간다. 그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서비스 제공자를 존중한다. 다정하다. 합리적이다. 일단 존중이 베이스에, 표현 방식이 상냥하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조율한다. 마지막은 설명이 필요하다. 무작정 맞춰주는, 그러니까 항상 양보하는 사람은 마음의 짐을 준다. 내가 A란 옵션을 원하고 상대가 B란 옵션을 원한다. 나는 고객이 A를 택하면 감사하지만 마음에 부채가 생긴다. 완벽하진 않지만 A와 B가 일정 부분 반영된 옵션 C를 택할 때가 최선이다. 깔끔하다. 부채도 없고, 사소한 타협에 이르렀다는 만족감도 준다. 다르게 말하면 자기 존중이 되는 고객이다. 요컨대 나와 상대를 존중하고, 다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최고의 고객이다. 일터를 벗어나면 나도 고객의 입장에 선다. 매튜(혹은 마테) 씨가 말했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그 말처럼 나와 너를 존중하면서 다정하고자 한다. 고객 덕이다.




청소기 잡을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뒤엔 운전대 잡고 고객 집으로 향할 예정이다. 하던 대로 책 읽(들)으며 노동을 관성에 위탁할 예정이다. 의식해서 복기하지 않으면 사라질 시간이다. 그러니 이런 자리를 빌려 감사와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10년 잘 보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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