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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12. 2016

비평을 비평하는 글쓰기를 기록하다

 문화 비평을 비평하다를 쓰려고 하는데, 재밌는 생각이 났다. 쓰는 과정을 온전히 다 담아보면 어떨까?.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담는다면 요상하며 웃긴 글이 될 것 같다. 바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 글의 카테고리는 비평이 아닌, 개인적인 시도이자 기록이 될 것이다. 정제된 문장과 취합된 자료들만이 보이는 결과물에선 느낄 수 없는 재미를 보여줄 것이다. 우선 비평을 비평하다의 콘셉트에 맞춰 다루고 싶은 비평가의 글을 찾았다. 문화비평을 주로 다루는 웹진 문화 다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몇 개인가 글을 넘기다 쓰고 싶은 글을 발견했다. 작가 소개에 김희정- 시인이자 문화 다 편집동인이라는 글이 있다. 이전에 쓴 글이 많이 없는 걸 보니 최근에 문화다의 멤버로 합류한 것 같다. 사진 상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 같다. 30년이란 한정된 시간 자원 속에서 어떤 경험과 배움을 얻었는지 궁금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culture_photo&ps_boid=23            

        [김희정의 문화 레터] 미-래에서 도착한 편지                www.munhwada.net

빠르게 글을 읽었다. 글은 재밌었지만,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사유가 부족하고, 논리적으로 치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군데군데에서 받았다. 물론 비평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구성과 배경지식들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문제는 나도 휙 훑어본 상황에서 뭐가 거슬리는지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정독해서 다시 한번 읽고, 문단 별로 피드백을 남기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됐다. 이제 본문을 블로그로 옮겨와서 그녀와 대담을 나눌까 한다. 






김희정 (시인)


   느닷없는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더구나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데다 남아 있는 단 몇 줌의 식량을 여럿이 나눠 먹으며 목숨을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메즈 카즈오의 『표류교실』은 이렇게 갑자기 돌발한 재난 앞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극단적 공포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그린다.


- 표류교실의 주제를 언급한다. 예상치 못 한 재난에 대처하는 집단의 모습. 인터넷 유머 게시글을 통해 표류교실이라는 작품의 편집된 몇 컷인가를 봤다. 작품을 보지 않고서 이 비평글에 비평할 수 없기 때문에 첫 3권을 읽었다. 전권을 다 읽어야 온전한 비평글이 될 터이지만, 그러기엔 귀찮다. 결과물에선 마치 다 읽은 것처럼 말할 예정이다. 대신 인터넷 리뷰와 서적 정보를 통해 결과와 플롯, 굵직한 사건을 다 학습했다. 나머지 열 권 정도를 안 읽어도 글을 쓰는데 특별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재난만화, 공포만화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쇼가쿠칸의 《주간 소년선데이》에 연재되었고 2002년 같은 출판사에서 3권의 컬렉션 판으로 재출간되었다. 2012년에 국내에서 출간된 한국어판은 후에 3권으로 재편집된 컬렉션 판을 번역한 것이다.  줄거리는 선명하고 단순하다. 갑작스러운 지진과 함께 환경재앙으로 인류가 전멸한 근미래로 타임워프된 초등학생들의 냉혹한 성장기.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하던 주류 담론을 생각해보면 다소 의아한 설정이다. 이 작품이 연재된 1970년대 초반은 거대 기술에 기반을 둔 첨단 미래를 해맑게 낙관하는 아톰의 세계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던 때 아닌가? 그런데 생명체는 물론이고 물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 온통 사막으로 변해버린 미래라니. 

- 출판 배경과 만화의 줄거리를 설명한다. 초등학교가 한순간에 미래로 날아간다. 한 초등학생이 전날 학교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렸기 때문이다. 그 폭발로 시공간에 균열이 생기고 다음날 미래로 타임슬립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 '공동체 의식과 가치전도'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기 위해 작품의 개연성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지 않았다. 3권의 작품을 읽고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치킨에 개연성 밥 말아먹은 작품에 사용했던 개념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기가 막히게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갑작스러운 스토리 전개가 복선도 없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터무니없는 상황의 연장으로 캐릭터들의 뜬금포 행동과 감정선역시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을 사는 독자로서는 오히려 이런 당대와의 어긋남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학기술 낙관론이 공고했던 20세기를 가로질러 21세기의 ‘지금-여기’로 도착한 이 ‘때맞지 않는’ 경고음이야말로 최근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임박한 재난에 대한 공포를 선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일본 사회 안에서 집중적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 다시 말하자면 작품이 쓰인 시기는 1970년대다. 과학에 낙관하던 당시의 시대상에 반기를 들기 위해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맹목적인 찬양을 지양하고 과학의 진보에 맞춰 시민의식도 키우자는 계몽적 요소가 있다. 문화지체의 끝에 이런 파국이 있다는 경고였다. 작품은 미래가 핵전쟁, 혹은 인류의 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인공 쇼와 친구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월요일 아침, 느닷없이 발생한 지진으로 갑자기 인류가 절멸한 근미래로 오게 된다. 대안을 제시해줘야 할 선생님들은 극도의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 죽고 죽이다 결국 전멸해버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른인 급식 아저씨는 그동안 친절한 얼굴 뒤에 숨겨왔던 야수성을 드러내며 폭주한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 안에 남아 있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온통 모래사막뿐인 폐허 한가운데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메즈 카즈오는 여기서 ‘우정’이라는 정동에 판돈을 건다. 공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위계 없는 우애의 공동체, 이것이 바로 쇼와 친구들이 ‘함께 살아남기’라는 공통의 목표를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조우하게 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이다.


- 이 글에서 개연성 얘기를 계속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시 본 글로 넘어온다. 김희정이 본 위기 극복의 핵심 전제는 우정이다. 함께 살아남기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느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김희정의 비평글에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공통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조우하게 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그녀가 재난에 맞춰 변하는 학우들의 모습을 새롭다고 말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목적성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학교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모임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희정은 현실을 기준으로 이들이 전혀 새로운 가치를 가진, 기존 공동체의 모습과 다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식하는 듯하다. 이는 의미부여와 글을 진행시키기 위한 비약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핵심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미래 없는 미래의 이런 폐허 위에서 각자도생을 외치며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떠밀리다 결국 전부 사멸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옆의 친구와 손잡고 순간순간의 위협에 맞서 함께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단단해지는 길을 택할 것인가? 한계에 다다른 현재의 인과율로부터  벗어나 다른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둘 중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더 나은가? 

- 각자도생이냐 모두를 위한 희생과 협력이냐란 물음을 핵심으로 봤다. 김희정에게 실망스러운 점이 다시 등장한다. 사유의 부족을 여실히 느낀다. 그녀는 공동체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작화 속 극적이고 단순화된 상황에 적합할지언정, 현실에선 이미 무수히 많은 담론이 오간 주제이다. 공동체주의가 마치 정답인 양 무수한 고비를 넘길 수 있는 만능 대안인 것처럼 떠드는 게 못마땅했다. 공동체주의는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으로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의 보통 이념을 강조하고 개인에게 권리 대신 책임을 부여한다. 만화에서야 극단적인 악인이 된 이기적인 이들을 보여주며 공동체주의로의 진입을 설득하지만, 실질적으로 쉽게 말할 수만은 없다. 


   쇼와 친구들이 위기를 해결해가는 과정은 ‘함께 살아남는’ 과정인 동시에 그들이 지금까지 배워온 기성의 룰을 해체하고 재구축하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질서와 도덕관념을 창안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래의 이 죽은 세계는 마지막 인류인 쇼와 친구들이 기존의 지배 담론에서 벗어나 윤리, 정의, 정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구성하고 실천해볼 수 있는 실험장이기도 한 것이다.


- 지금까지 배워온 기성의 룰을 해체한다는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기존의 지배 담론을 벗어나 새로운 담론을 구성한다고 했지만, 앞서 말한 공동체의 모습은 숱한 담론이 있어왔고, 시행착오가 있었던 내용이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왜 기존의 지배 담론에서 벗어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주류였던 A 담론에서 또 다른 주류인 B 담론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화에서 뭔가 전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극복했다는 듯한 뉘앙스가 거슬릴 뿐이다. 


   물론 우정은 툭하면 어긋나고 깨지기 일쑤다.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의심도 맹목적인 적대와 광기, 가공할 폭력성에 불을 댕길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 쇼는 자신이 집단 광기의 공공연한 표적이 되는 극한의 상황에 몰려서도,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혹하게 배신당하고 비난받고 추방당하면서도 말이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쇼를 타자들과 대질시키는 이 내면의 당위는 사실상 ‘지엄한 도덕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어떠한 순간에도 무조건 ‘해라’라고 명령하는 외설적인 정의의 목소리, 이것이 바로 그의 윤리적 행동을 추동하는 내적 준거의 정체인 것이다.


- 여기서 김희정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편집해서 유리한 방향으로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정언명령이란 대가나 결과를 차치하고 해야만 하는 당위성의 목소리이다.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를 정언명령으로 봤다면 칸트의 이론을 잘못 해석했다. 살아남기 위해 배신이나 추방, 비난을 참아야 한다. 는 가언 명령이다. 주인공의 행동의 기저에 조건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같이 살아남기 위해'가 그것이다. 정언명령은 감성적 경험적 내용이 배제되어 형식만 남아야 한다. 물론 주인공의 행동에 정언명령은 부합한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하였고, 자신의 이익을 남보다 앞세우지 않은 자세가 그렇다. 다만 김희정의 해석하는 방식이 바르게 물리지 않는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가 현실적 정의의 외연을 넓혀가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다수’의 범주에 포함되지 어떠한 소수자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쇼의 모습은 더 이상 다시 손잡을 수 없을 듯 보였던 친구들을 다시 손잡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거듭될수록 우애를 바탕으로 한 연대 또한 점점 더 굳건해진다. 쇼 일행의 희생과 실천은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아 보였던 죽음의 땅도 조금씩 변화시킨다. 이들이 피운 연기에 비구름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폐허의 한복판으로 세찬 비가 쏟아져내린다. 이 물을 머금고 사막이 되어버린 바다는 다시 진흙 벌이 되고 어디에선가는 강줄기가 새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현재로부터 옮겨진 씨앗들이 죽은 친구들의 시체를 거름 삼아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


- 주인공의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와 모두를 생각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협력을 말한다. 그들의 조화와 함께 뜬금없이 피어오르는 새싹과 내리는 생명의 비. 결론 역시 개연성 죽이고 장례식에서 육개장에 밥 2 공기 말아먹는 식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공동체주의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희망의 전조이다. 이 모든 상황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조망하고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들이 미래에 뿌려진 씨앗이었음을 인식하는 순간에서야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소명을 발견하고(혹은 발명하고) 이제 이곳이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할 자신들의 세계라는 진실을 가까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타임워프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쇼를 찾아 학교에 놀러 왔다 우연히 표류교실에 탑승하게 된, 아직 3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유를 부모가 있는 현재로 보내주기 위해 쇼와 친구들이 인위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유가 현재로 돌아가 작든 크든 어떠한 변화라도 일으켜주길 염원하며 아이들은 마지막 자원과 남아있던 기운을 전부 끌어 모아 어쩌면 이들 생애 최후의 것이 될지도 모를 타임워프를 일으킨다.


- 사제 다이나마이트를 구해 터트리고, 맹장수술을 집도하는 초등학생들의 파격의 끝엔 시간여행이 존재했다. 나사도 못 하는 일을 어린 친구들이 해낸다. 과거에서 보낸 희망의 씨앗이 싹터 새로운 씨를 과거로 보낸다는 감동 서사의 대미. 


   미래의 죽은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야마토 초등학교 학생들의 기록은 이렇게 해서 ‘지금-여기’로 전달된다. 쇼가 유의 손에 들려 보낸 편지들은 그의 엄마에게 전달되고 매 순간 쇼를 윤리적 선택 쪽으로 몰아붙이던 정의의 명령은 이제 그의 엄마가 살아가는 방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도록 강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도된 상속, 즉 부모로부터 자식에로가 아닌 자식으로부터 부모에로 전달되는 절대적 미래의 가르침이 지금과는 다른 상상을 가능케 할 도약의 지렛대가 되기를. 『표류교실』의 서사는 바로 이 순간, 즉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완성된 형태로 실체화시키지 않은 채 다만 그것의 가능성을 언뜻 내비치는 순간 끝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게다. 미래의 가능성을 실체화하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해진 답안에 불과해져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 김희정의 스토리 총정리와 결말 해석이다. 글 초반에도 언급했듯이, 비평가는 가치 전도와 함께 전달되는 새 미래의 지렛대를 공동체주의, 혹은 인류애로 봤다. 무엇이 절대적 미래의 가르침이며 무엇이 전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될 것인가? 그것은 나를 남보다 앞세우지 않는 정언명령적 행동,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다!! 김희정의 감수성과 사상이 만나 너덜너덜해진 담론과 사상을 전혀 새로운 것처럼 포장했다. 발달하는 문명에 맞춘 시대 의식을 갖자란 주제를 이렇게 오버하면서 우리 미래를 지킬 유일한 어떤 것이라 다루는 게 비약이다. 게다가 미래의 황폐화의 원인은 인류애, 공동체의식 부족이라는 진단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그간 단단히 봉합되어 있던 우리 사회 내부의 무수한 적대들이 여기저기서 돌출되고 있다. 몫 없는 자들로 강등된 소수자들의 목소리, 각기 음역이 다른 곳에서 발신되는 이 타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예민한 귀가 필요하다. 누구 하나 부당하게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살아남기’란 무엇일지, 이러한 고민의 와중에 윤리, 정의, 정치는 또 어떠한 방식으로 상상 되어야할지 역시 멈추지 말고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표류교실』의 작가 우메즈 카즈오는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자들, 현재에 결박당한 채 도래하는 미-래의 편지를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파국은 언제나 임박해 있다고 경고한다. 편지는 이 순간에도 도착하고 있 다.


- 시국의 뜨거운 감자인 소수자의 인권과 혐오 논란을 예민하게 듣고 이해해야 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위한 어떤 장치가 필요한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표류교실은 미래의 편지를 읽지 않는 이들이 갖게 될 파국에 대해 말해준다고 김희정은 말한다. 얼핏 두 논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으나 묘하게 빗나간다. 표류교실 속 미래가 폐허가 된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과, 과학의 발전에 따르지 못한 문화지체이다. 혹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일 가능성이 높다. 정확히 언급하진 않았으니 단언할 순 없다. 김희정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살기(복지 혹은 그들에 대한 관심과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꼽았다. 결국 작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서사처럼, 김희정은 모든 오독과 어긋난 해석 후에 누구나 동의할 법한 당연하고도 물리는 비평글의 진리식 결론을 배치해 글을 끝낸다. '파국은 가까이 있으니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비평적으로 사회를 봐야 한다.'란 모든 비평가가 한 번쯤은 해봤을 맺음으로 사유의 부족과 논리의 미묘한 결여를 가린다. '음 이거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아, 비판적 사고는 중요하지. 맞는 말이었군.'으로 감상이 끝나면 안 된다. 



이렇게 그녀와의 대화가 끝났다. 문단별로 피드백을 남기는 방식이라 특별히 플롯을 구상할 필요가 없다.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갖고 와서 보충하는 자료를 찾으면 그만이다. 이제 수정 없이 쓴 피드백을 정독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과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후에 비평을 비평하다란 주제에 맞는 구성을 짜고 내가 쓴 부분만 새롭게 배치를 시키는 작업이 이뤄질 것이다. 


 물론 책을 3권만 봤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충분한 준비가 사전에 있었음을 만면으로 드러낼 예정이다. 조금 더 내 생각을 보충할 이론들을 몇 개 더 가져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즉흥적으로 쓴 글에 오류가 많을 터이다. 빡세고 강한 문체로 다듬어 글에 통일감을 주고 강세 줄 곳을 정리해 메타포 한 두 개씩 배치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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