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외향인과 내향인의 차이는 에너지의 출처다. 외향인은 사람과의 얽힘에서 에너지를 얻고, 내향인은 혼자 있으며 에너지를 얻는다. MBTI 상으로 나는 외향인이다. 인간관계에서 힘을 얻는다는 뜻이다.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긴다.
즐긴다 해도 경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약간의 경계를 한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인지 파악한다. 이 파악하는 단계에 비합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요소가 작용한다. 그 요소의 근거를 파악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모임에 나갔다. 뉴비가 두 명이나 왔다. 각각 또래 남성과 윗세대 여성이다. 또래 남성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겠다고 자리를 일어났다. 나는 경계 레벨을 올렸다. 사회적으로 매너라 불리는 행동, 혹은 잘 모르는 장소에서 보여야 하는 연출된 조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임 장소는 우리 사무실이 있는 공유 오피스다. 로비는 다양한 인원의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구비되어 있다. 중앙 키친에는 각종 음료가 구비되어 있다. 나는 모임 장소를 공유 오피스로 고지하고, 와서 음료를 알아서 즐길 수 있다 설명했다. 앞서 음료를 즐기라 말해놓고, 정작 음료를 즐기겠다는 사람에게 반발심을 갖는 게 웃기는 일이다.
그 웃기는 일을 실감하며, 왜 나는 이런 웃기는 감정을 느끼는지 분석했다. 그것은 조심성이 없기 때문이다. 조심성은 약간의 망설임, 말줄임 등으로 표현된다. 처음 오는 자리에서 음료를 가져갈 때 '마시면 되는 것이죠?'라 묻지 않고, '마시겠습니다'라 말했다. 나는 어느새 망설임을 예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곳에 나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끼치겠다는 존중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범은 아니고, 내 기분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이견의 여지가 충분하다. 처음 만난 사람과 공간을 어려워하는 모습을 봐야 마음이 편하다. 눈치 보는 사람이 분쟁을 덜 만든다. 분쟁을 싫어하는 나의 성미가 드러난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도 위험 사인이었다. 마초스러움이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 탓이다.
여성에게도 반발심을 가졌다. 우선 약속 시간을 1시간 이상 늦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걸 안다. 인간의 노화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생기곤 한다. 어느샌가 나이 많음의 기준이 내 나이가 되어버렸다. 나 자신을 철없고 나약하다고 여기지만, 나이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젊음을 예찬하는 사회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볼 때마다 무언가 반발심이 생긴다.
젊음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나는 노화를 막으려는 광고들 속에서 자랐다. 주름살과 흰머리를 거부하는 사회적 시선을 느낀다. 광고가 강요하는 젊음은 억지스럽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도 따라가지 못해 불편하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선입견이 작용한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나이가 벼슬이다. 그 벼슬을 사용하려는 이들에 대한 반발감이 있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만으로 조언이나 무례를 정당화하려는 구시대적 태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장유유서는 윗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손아랫사람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본인이 꼰대라 말한다. 독선적인 측면이 있고, 공격적으로 말하는 편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만남에선 그런 측면을 보지 못 했으나, 모임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고, 사람들이 편해지면 본인의 진면모가 드러날 거라 예고했다. 앞으로 무례할 것이니 불편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꼰대 예고는 쎄한 느낌을 준다. 이런 류의 예고는 보통 실현된다.
불쾌감의 출처를 되짚으며 나의 정치적 그릇됨을 절감한다. 물론 만남이 겹치면서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재고한다. 잘 모르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몇 가지 상징과 기준으로 평가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나이, 학벌, 영어 실력, 직업, 부 등. 내가 검증을 끝내지 못 했으니 사회적 지표를 활용한다. 남성 참여자가 직업을 공개하며 경계를 낮췄다. 그는 의사였다. 의사란 직업은 우리 사회의 요구를 성실히 부합하고, 잘 정착한 사람이라는 상징이다. 헛짓거리 안 하겠다는 보증서다. 물론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컨대 나는 쉬운 판단을 위해 부적절한 방식을 사용 중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다. 분석과 행동은 별개로 움직여야 한다. 내 감정이 그렇다고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에게 이런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문화인이 아니다. 생각을 그대로 뱉어내는 것은 동물이나 다름없다. 적합한 문제제기인지 판단해야 한다. 상대의 장점을 살피고, 만남의 횟수를 늘리며 상징이 아닌 온전한 나의 경험으로 판단 근거를 삼는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좋아한다. 인간은 반복을 좋아한다. 자주 보면 정이 생긴다. 좋은 점에 눈이 간다. 단점이 대수롭지 않아진다. 상징의 집합에서 한 인물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이런 편견을 바꾸고 싶다면 모임에 성실히 참여해야 한다. 성실함은 그 자체로 호감의 큰 요소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스트는 못 말려
짱구도 못 말리고,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나의 의욕도 못 말린다. 의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모든 소비를 미니멀리즘으로 포장하게 된다.
쇼핑이 끊임이 없다. 이번 주에도 옷을 3벌이나 구매했다. 미니멀한 디자인의 캘빈클라인 니트, 미니멀한 디자인의 코스 실크 폴로셔츠, 미니멀한 디자인의 유니클로 U 에어리즘 나시. 옷장을 미니멀하게 유지하자는 모토를 가진 미니멀리스트였는데, 어느새 미니멀한 디자인 제품을 콜렉트 하는 미니멀 콜렉터가 되어버렸다.
이런 기묘한 미니멀리스트는 몇 가지 문제를 지닌다. 우선 옷장을 슬림하게 유지할 수 없다. 덜어낸 만큼 새로운 옷이 공간을 채운다. 둘째, 미니멀한 옵션으로 거듭난다. 옷을 100개를 사도 결국 같은 옷을 입는다. 바지 개수는 늘어난다. 바지가 20개 넘게 있는데, 일주일에 5일 무신사 회색 슬렉스 바지를 입는다. 나머지 19벌은 등장 기회가 없다. 새로운 옷을 아무리 사도 입는 옷만 입어 방치된다. 방치할 옷이라면 사지 말자, 처분하자-가 옷장 덜어낼 때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방치할 옷이 쌓인다.
매일의 아웃핏은 뻔하다. 변주가 거의 없다. 무신사 바지와 유니클로 구두, 혹은 폴로 로퍼가 디폴트값이다. 상의는 흰색 무지티, 라코스테의 폴로티, 디테일 없는 니트다. 재킷도 무신사 셋업 재킷이나 유니클로 JW앤더슨 블레이저를 돌려 입는다. 같은 옷 입을 거면 도대체 왜 새 옷을 사는 것인가? 그것이 의문이다. 살 때는 입을 이유가 있는데, 사고 나면 그 이유가 없어진다. 결국 매번 같은 행어를 꺼낸다. 옷장 옷의 90%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며 먼지만 모으고 있다.
최대로 덜어내는 복장을 선호한다. 결국 디테일 없는 바지, 티, 아우터, 신발을 고른다. 악세사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하나 정도로 제한한다. 예전엔 실처럼 얇고 짧은 은색 목걸이였고, 이제는 작은 사이즈의 시계를 찬다. 시계와 목걸이를 같이 할 순 없다. 내가 만든 복식 법칙이다. 어차피 딱 하나 할 악세사리라면 투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낭비로 이어졌다. 오메가 시계를 성실히 차다 롤렉스로 넘어왔다. 자기주장이 거의 없는 쁘띠한 사이즈에 시계의 이데아와도 같은 슴슴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인터넷 유머게시판에 로고 가리면 전부 똑같은 시계. 가격만 다름-이라는 글에 올라오는 시계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하는 의욕이 최대 지출을 만들어버린다.
글을 쓰면서 왼쪽 손목에 시선이 간다. 다이얼의 롤렉스 로고가 윙크해서 잡힌 눈주름처럼 느껴진다. 반가운 마음에 응시한다. 기계식 무브먼트 초침이 '고급, 고급'이란 의태어를 남기며 돌고 있다. 내 몸에 있는 단 하나의 악세사리가 이 친구라니! 기쁨으로 가슴이 먹먹하다. 30대 삶은 아름답다. 롤렉스를 차고 다닐 수 있다니. 나는 멋 안 부렸는데, 일단 시계를 롤렉스야. 아 이 무심함. 미니멀리스트다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미친놈인가?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이 기믹으로 느껴진다. 시계 보고 글을 썼다.
친구 부모님과 새로운 만남
오늘 4시에 친구 부모님을 만난다. 지금이 1시 30분이므로 2시간 30분 뒤다. 만나는 용무는 투자 유치다. 친한 친구, 거의 친동생과 같은 인물이 있다. 그의 부모님에게 투자를 권유하는 자리를 갖는다.
투자 유치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조심스럽다. 가까운 관계일 수록 더 그렇다. 사적인 감정이 섞이기 마련이다. 투자 책임은 본인이 진다. 거리가 먼 타인일 수록 철저히 투자자 경영자의 관계에 선다. 가까우면 그 거리 유지가 안 된다. 그럼에도 투자 유치를 받으러 간다. 투자금이 절실하기도 하고, 내가 확신이 있어서다. 100프로 사업은 없다. 100프로 가깝게 만드는 게 핵심이다. 내 판단에는 100에 가까운 모델이다. 그 정도 안정성에, 내가 직접 투자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조심스러운 자리에 나설 수 있다.
친구를 안지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친구 부모님도 몇 번이나 뵀다. 그간은 친목 목적이었고, 오늘은 친목을 덧씌운 투자유치 목적이다. 색다르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지 간단히 정리할까 한다. 사업 유치를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면 상대도 나도 부담스럽다. 딱 상대가 원하는 만큼만 알려주고, 너무 깊게 인볼브 시키지 않으려 한다.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투자가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기꺼이 '투자하지 않음'이란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안배한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랩탑을 펴서 이것보세요 저것보세요- 한다면 상대가 불편해할 수 있다. 궁금해하면 보여주고, 아니면 간단히 구두로 설명할 계획이다.
설명은 3가지 큰 핵심을 따라 갈 것이다. 비즈니스 모델을 하게 된 이유. 이 모델이 좋은 이유.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 단어로 설명하면, 1. 동기, 2. 산업, 3. 투자이익이다.
비즈니스를 고안하게 된 이유는 이런 구조로 설명할 것이다. 우선 현재 나의 수입 구조를 말한다. 왜 안정적이고 오래가는 소득을 찾게됐는지 설명한다. 일본 여행에서 우연한 발견, 현지 산업 조사를 통해 승산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서사로 풀어낼 것이다.
모델이 좋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높은 안정성, 높은 성공률, 낮은 고정 지출, 압도적 경쟁 우위, 업계 진입 장벽이다. 이해하기 쉽게 숫자를 통해 말할 것이다. 업종별 성공 확률, 산업 투자이익 기준 등. 숫자를 통해 직관적으로 사업의 장점을 설명할 것이다.
투자이익은 돈을 얼마 넣으면 해마다 얼마 버는지 설명한다. 투자금은 에쿼티이므로 소득세가 없다는 점도 짚고 넘어간다. 주 단위로 설정해 매주 얼마를 받는지 언급한다면 한층 매력적인 투자로 보인다.
밖에 비 온다 주륵주륵
밖에 비가 온다. 빗소리를 들으며 블로그에 글쓴다. 이 곳은 멜번의 상징과 같은 스테이트 라이브러리다. 높은 천고 끝에 유리 천장이 있다. 빗방울이 천장을 튕기며 원형을 만든다. 투둑투둑 무수한 빗방울과 천장이 만나 만드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날씨에 있어서 중간이 싫다. 우중충한 날씨는 묘하게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어느 기준을 넘어 구름이 비를 뿌리면 해방감을 느낀다. 세상의 먼지와 때를 씻어 내린다. 이도저도 아닌 상태는 인간에게 불안을 준다. 확답을 얻고자 한다. 맑은 날씨와 비오는 날씨는 확답이다. 흐린 날씨는 중간에 걸친 그레이존에 위치한다. 여러 의견이 섞인 열린 사회는 좋지만 열린 하늘은 싫다.
빗소리는 재밌는 게, 빗소리 자체를 즐기게 하면서도 노래를 듣고 싶게 만든다. 빗소리 듣다가 노래를 듣는다. 비와 잘 어울리는 노래란 범주가 있다. 부드러운 노래다. 아니, 부드러운 노래가 뭐야? 이지 리스닝에 슬로우 템포에 파워 보컬을 뺀 곡을 뭉퉁그려 부드러운 노래라 부른다. 부드러운 노래엔 밝은 무드와 어두운 무드가 있다. 밝은 무드의 대표주자는 클래지콰이고, 어두운 무드의 대표주자는 챗 베이커다. 비가 오면 듣고 싶어진다. 이번에도 클래지콰이의 Instant Pig 앨범을 재생했다.
실크
나이 들어가며 생긴 습관은 옷을 구매하기 전에 소재를 본다는 것이다. 로고 플레이 안 하는 옷이라면 브랜드가 중요하지 않다. 핏과 봉제 퀄리티, 소재가 중요하다. 옷을 만져보고 멈칫한다. '오옷, 부드러운데?' 소재택을 본다. 캐시미어다. 그것도 90% 이상 들어간. 평범한 제품이 특별한 제품으로 거듭난다. 캐시미어는 여유의 상징, 안락함의 상징. 갖고 싶은 제품이 된다.
캐시미어와 더불어 띠용하게 만드는 소재가 실크다. 아니 이 제품 상당히 부드럽네. 그런데 폴리에스테르 같지는 않아. 소재택이 실크, 면 혼방이라 말한다. 갖고 싶은 제품으로 거듭난다. 실크와 캐시미어는 소재 자체가 비싸다. 위탁판매 업체는 보물찾기 장소다. 캐시미어나 실크 제품이 합리적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면, 구매욕이 샘솟는다. 필요를 이긴다. 없던 필요도 생긴다. 최근 실크 피케 셔츠를 구매했다. Cos 제품으로, 실크가 55%나 섞였다. 피케 셔츠는 라코스테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는데, 실크 소재는 결정을 번복하게 만든다.
그 이후로 외출할 때 격일로 입는다. 내가 좋아하는 의태어는 '샤라락'이다. 실크 소재의 폴로셔츠는 입었을 때 몸에 샤라락 감긴다. S 사이즈로 살짝 핏한 제품이다. 다른 소재였다면 입을 때 약간의 트러블이 생길 수 있는 사이즈. 하지만 실크의 신축성과 부드러운 촉감은 모든 분쟁을 막는다. 소재의 평화유지군이다. 합성섬유 친구들도 부드러운 촉감이지만, 실크가 주는 근본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다. MSG로 손쉽게 만든 감칠맛과 직접 국물 우려낸 육수 차이다. 물론 MSG 사랑하지만, 가능하면 천천히 우려낸 음식이 낫다.
내 외출의 이유 중 하나가 옷이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그 옷을 입고 싶어 외출한다. 불로소득으로 생활하는 내가 '꼭 나가야 하는' 상황은 없다. 내가 24시간 30일 내내 집에 있어도 생계유지에 불편이 없다. 되려 지출이 줄어 가계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고인물은 썩고, 나는 무능력하게 존재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나가서 누구라도 만나고, 새로운 사업을 경험해보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도 보고 미팅도 해야 한다. 당장 돈 몇 푼이 미래의 소득이 될 것이다. 나가야 할 이유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실크 폴로셔츠가 나를 살린다.
48 시간
귀찮음은 즐거움이다. 현대인은 굳이 귀찮음을 찾는다. 아날로그의 반격이란 책이 말한 핵심과 같다. 책은 읽어보진 않았고,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룬 에피소드를 들었다. 보지 않은 거 본 척하고 싶지 않아서 굳이 사족을 덧붙인다. 편함이 디폴트다. 굳이 덜 편하게 살며 순간을 실감한다.
진정한 사치는 실용성을 벗어날 때 태어난다. 최근 있던 최고의 사치는 시계다. 빈티지 롤렉스 시계. 오버홀과 폴리싱을 끝마쳤다. 외관상 새 제품 같지만 실은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형님이다. 안면거상을 해서 피부가 쫀쫀해 보이지만 장기는 나이 그대로다. 기계식 무브먼트로 굴러간다. 기계식에도 두 가지로 나뉜다. 태엽식과 오토매틱이다. 용두를 직접 감느냐, 일상생활에서 자동으로 감기느냐의 차이다. 편한 정도로 보면 쿼츠> 오토매틱> 태엽식이다. 내 오메가 프리본드가 쿼츠고 롤렉스 스피드킹이 태엽식이다. 쿼츠는 한 번 교체하면 몇 년 신경 안 쓰고 차고 다닐 수 있고, 태엽식은 이틀에 한 번씩 감아줘야 한다.
귀찮은 태엽 감기를 하며 시계를 더 감각할 수 있다. 시간을 표시하는 일에 의미가 생긴다. 사실 시계가 시간을 표시하는 용도를 핸드폰에게 뺏긴지 오래다. 정확성은 비교할 수 없다. 재부팅마다 전 세계 표준 시간이 전송된다. 오차율이 자동으로 정정된다. 시계는 매일 몇 초의 오차율이 생긴다. 주기적으로 정정해야 한다. 태엽식은 더더욱 문제인데, 이틀이 지나면 오차가 분 단위로 늘어난다. 이내 멈춘다. 다시 용두를 돌려 시간을 맞춰야 한다.
태엽을 감으며 이틀의 수명을 얻는다. 이틀마다 감아주는 게 성가시지만, 반대로 감기만 하면 100년 뒤에도 사용할 수 있다. 파트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론상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48시간에 한 번 용두를 돌려 생명을 연장한다. 시간을 새롭게 본다. 시간이란 개념은 인공이다. 태엽을 돌려 시간을 움직이는 게 인본주의적 사고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행동에 투하하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수록 탐구할 기회가 비례해 커진다. 핸드폰이 당연히 표시해 주는 시간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단 생각을 한다. 감으며 몇 초의 오차율이 생긴다. 오차율은 당연한 것이다. 시간은 합의다. 인간의 합의는 표준시로 전 세계의 합의가 된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표준시는 정확하지 않다. 디지털이 돼서 그 선언이 힘을 갖는다.
디지털 세상의 파워가 강해진다. 디지털 권력자가 현실에서 힘을 얻는다. 시뮬라크르다. 하이퍼리얼리즘이라 현실은 전복된다. 전복된 생활이 디폴트가 된다. 태엽 감는 행위가 당연하게 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게 만든다.
태엽을 감으며 몹시 사치스럽고, 철학적인 시간을 갖는다. 시계에 정확한 시간을 요구하는 때는 지났다. 태엽 감는 행위는 롤렉스라는 사치품의 가치를 올리는 사치스러운 행위다. 무브먼트가 정상 작동하는 제품이 비싸다. 정상 작동을 증명하며 기계식 특유의 움직임을 선보인다. 그것은 현대인이 느끼기에 고급스럽고, 사치스럽고, 세련되고, 쿨한 움직임이다. 멋도 합의다. 48시간의 리추얼은 인간 합의를 생각하게 만든다.
일본의 미래는 세계가 부러워해
카페에 왔다. 오늘은 친구와 브런치와 작업을 곁들인 카페 방문이다. 일본식 카페에 왔다. 음식으론 오니기리 세트, 카츠 커리 베네딕트, 치라시 볼을 주문했고, 친구는 필터 커피, 나는 아이스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 주문을 끝내고 각자 랩탑을 편다. 서로 할 일 한다.
랩탑을 펴고, 전날 미국장을 체크했다. 체크하며 나도 모르게 ....
모닝구 무스메의 러브 레볼루션 21을 불렀다는 얘기였다. 주문한 요리가 나와서 랩탑을 덮었다. 이것은 어제 얘기. 어제 얘기는 어제로 끝내는 게 미덕. 새 술은 새 부대에. 하지만 아까운 조각을 버릴 순 없지. 이것으로 글 한 편.
투자 유치 실패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글쓰기 직전,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 중으로 컨펌 해주겠다는 투자자 후보가 있다. 그는 안 하는 것으로 결정했단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본인이 아무리 투자해도 가져가는 지분이 너무 낮단다. 어차피 수익률은 지분과 무관하게 동일하다 설명했다. 수익률 30프로면, 100원도 30프로, 200원도 30프로를 받는다. 투자 소득은 넣는 금액에 비례한다. 그래도 안 하겠단다. 아무래도 발언권이 약하다는 게 문제인듯싶다. 그가 전재산 투자해도 지분의 3,4프로 밖에 안 된다. 더 말해본들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상대의 결정을 존중하고 통화를 끝냈다.
사업계획서를 발표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이거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 스스로가 사업에 확신이 있고, 내 전재산을 투자한다. 자료는 합리적이다. 요컨대 -더 좋은 서비스를, 더 좋은 입지에서, 똑같은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상대는 납득한 듯 보인다. 정보가 직관적이니, 손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걸 안 할 수 있나? 의구심이 든다. 이걸 안 한다.
벌써 투자 유치 미팅을 열 번 가량 했다.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 했다. 다들 "사업은 좋은데..."로 시작해서 "... 이번에는 못 하겠다"로 끝난다. 매번 투자 유치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좋다는 것을 납득해도, '혹시나'라는 단서가 그들의 결정을 막는다. 혹시나의 사례도 충분히 설명했다 믿었으나 내가 모르는 '혹시나'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투자자였다. 지금은 투자자/운영자 역할을 한다. 최초에 투자 결심까지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번복이 있었다. 성공적인 주식 투자를 멈추고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 원금 손실을 감수할 수 있을까? 주식에서 상폐가 되지 않는 한 원금손실은 없다. 애초에 상폐종목을 고르지 않는다. 주식에서 없는 0 수렴 투자 가능성이 있다. 주위엔 투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염불 외듯 나열하는 지인이 있다. 결국 감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포트폴리오의 25%만 사용하는 위험 분산이다. 만약 전액을 투자해야 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날 구멍을 마련한 덕에 용기 낼 수 있었다. 투자자들을 같은 입장에 둔다. 과거 나처럼 주식에 모든 것을 건, 그러니까 유동 자산이 수억 원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에게 1,2억이면 집을 제외한 전재산이다. 전재산을 투자할 용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역지사지로 이해한다.
보여줘야 한다. 지금 우리 사업은 성공리 운영 중이다. 그 덕에 나도 고정된 일 없이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매주 수익이 생긴다. 나는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시간에 현재 사업의 개선점을 찾고, 새로운 사업의 구조를 짠다. 사업은 선순환이다. 투자자들에게 이 정도로 부족하다. 현재 우리 팀이 유치한 투자자는 동업자 친구의 레퍼런스를 보고 들어왔다. 현 사업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나의 레퍼런스로 쓸 수 없다. 확정 투자자는 우리 사업에 투자 권유를 받았고, 거절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사업을 보며 '아, 그때 투자할걸'이라 후회했던 사람들이다. 요컨대 내가 성사시키지 못 한 열 건의 투자 유치는 다음번 투자를 위한 씨앗이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 투자 유치를 위해 스케쥴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