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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Sep 29. 2024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시청했다. 심화 이해를 위해 평론의 교과서라 불리는 이동진 평론가의 리뷰를 찾아보려 했다. 문득 나의 감상이 끝내주는 리뷰에 잡아먹혀, 생각이 뒤섞여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먼저 내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다. 블로그 창을 열고, 영화 감상평을 남긴다



어딘가에서 사회고발 영화의 명작이란 말을 흘려 들은 이후로, 시청해야겠단 생각만 1년째 품고 있었다. 전날 과음했다. 일요일인 오늘 느긋하게 집에서 요양하리라. 시간도 많겠다, 할 일도 없겠다, 1년 미뤄온 계획을 오늘 수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구글 검색을 통해 호주 공영 방송인 SBS가 온라인 스트리밍 페이지에 무료로 공개 중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영상이 내려가기 전까지 2주가 남았다. 다급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시선을 통해 제도의 맹점을 비춘다. 그가 겪는 비참한 상황은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을 억누르는지를 고발한다. 다니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다. 그는 남을 돕고 목소리를 내지만, 그렇다고 성인군자는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인간성은 매우 현실적이다.



분야를 떠나 흔히 '명작'이라 부르는 작품은 대체로 인간의 무력함을 직시한다. 명확히 한계를 설정한다. 그러니까 능력주의를 비판하며, 인간이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작품. 인간은 대단치 않다. 나약하다. 당장 돈 많이 벌고,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직업을 가졌다 해서 그 사람이 남보다 대단하거나 더 가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환경은 언제고 바뀐다. 인간은 늙고 병든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다. 늙고 병들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줄어든다. 편부모 가정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보살펴야 할 때 일터에 나가기 어렵다. 이런 어려움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매정하다. 그러지 않기 위해 사회가 존재하고,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사회는 항상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는 그 지점을 지적한다. 주인공은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존엄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사회의 매정함과 인간의 무력함을 사무치게 느낀다.



'명작'의 특징은 이것만이 아니다. 접속사 하나로 축약하자면 '그럼에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존엄을 지킨다. 그 발버둥이 애처롭고, 경이롭다.



영화는 명작이다. 앞선 특징을 보여준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정부 보조금을 신청하러 가는 장면은 잔인할 만큼 차갑다. 관료주의의 벽 앞에서 그는 이미 탈진했다. 시스템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공무원은 기계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서류를 밀어낸다. 의사로부터 일할 수 없다는 진단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의료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피로한 자신을 다잡으며 싸움을 계속한다. 다니엘이 '체계'라는 장벽 앞에서 무력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다시 서류는 반려되고, 절망에 가득 찬 그의 눈빛은 화면 속을 뚫고 나온다. 더 이상 항의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그의 자존감은 무너져 내린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그저 주저앉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터져 나온다. 락커를 든 손을 체계의 벽에 휘두른다. 그의 분노는 공공기관 건물 벽에 ‘I, Daniel Blake, demand my appeal date before I starve.’라는 문장을 남긴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불만을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외침이 된다. 사회가 한 사람을 무시하고 짓누르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한 글은, 다니엘의 마지막 저항이자 반항이다. 행인이 멈추고, 주위에서 흥미와 공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생기지만, 이는 곧 경찰에 의해 진압된다. 다니엘의 몸은 거리를 떠나지만, 그의 외침은 남아 관객에게 울려 퍼진다.



때로는 상상한다. 만약 사업이 망하고, 건강마저 나빠진 상황이 온다면 어떨까? 일자리를 찾지 못 하면 생계가 끊기고, 일자리를 찾아도 노동이 버겁다. 내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대단한 해결책을 찾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을 반복하며, 안락함을 하나씩 포기할 것이다. 이내 적응할 것이다. 윤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잠깐의 우울을 느끼겠지만, 그마저도 결국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상상 끝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회와 타인에 다정해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영화는 상상보다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인간의 무력함과 세상에 다정해야 하는 이유를 또 한 번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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