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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Nov 05. 2024

의식의 흐름



뭘 쓰지? 의식이 답한다. "의식의 흐름"  대답을 받아 적는다. 그래, 오늘은 의식에 손가락을 맡기자. 



의식이 입을 뗀다. 웅성웅성—말들, 그리고 또 말들— 말이라고 다 적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거나 적는다면 그것은 프로이트의 실험, 누벨바그 영화, 무의식의 향연. 근데 의식 멀쩡한 한낮에 하는 생각이 과연 무의식일까? 맥주 한잔했다면 모를까. 두서없는 것이 생각의 특징. 의식의 흐름은 '아무거나'를 적기 위한 곳. 둥둥 떠다니는 의식. 이 의식을 표현하자면, 둥둥 배. 아니, 통통배. 통통 튀는 의식을 타고 자신을 감상한다. 여러 자극이 무릎을 때리자, 발이 튕겨 나간다. 검정치마의 Antifreeze를 들으며, 카페 창가에 앉아 사람 구경 하면서, 아이스 롱블랙을 홀짝인다. 어수선함 속에 묻는다.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오늘은 공휴일. 멜번컵. 빅토리아주 전역에 있는 말들이 고생하는 날. 경마 행사. 경마 구경하라고 공휴일까지 만든 이 나라는 호주. 말 달리자. 두구두구두구두구. 기수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선물한다. 찰싹찰싹. 궁둥이에 따끔한 맛을 본 거대한 사족이 지면을 박찬다. 지면이 흔들린다. 몇 해 전 초대권을 받아 멜번컵 구경에 나섰다. 말 구경하러 갔다. 인간은 화려한 드레스와 모자를 뽐낸다. 인간의 호사스러움이 더한 볼거리. 



의식이 카페로 돌아온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이 섞인다. 다양한 체격, 다양한 패션, 다양한 헤어스타일. 인간 박물관이 따로 없다. 아, 실내에 있는 것은 나다. 내가 창살 속 관찰 대상일까? 아니, 내가 관찰할 거야. 시선의 주체성을 가져오겠어. 내가 바로 판옵티콘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내 지적 허영을 채우다 못해 넘치게 만드는 글! 찰랑찰랑 찰랑대는 자기애를 마주하고 싶다. 유려한 문장, 혹은 한방을 가진 하드보일드한 문장이 필요해. 이보시오. 공감각을 활용하시게! 글이란 매체의 장점을 뽐내. 글쓰기 구력을 보여주마. 변화구. 직구. 커브. 슬라이더. 볼볼! 볼! 볼! 3볼 상황. 이번에야 말로! 아~ 터져나오는 탄식. 이게 무슨 볼인가요. 똥볼이군요 똥볼! 부정할 수 없네요. 후후후. 웃음이 보약입니다. 



날이 죽인다. 날은 주어다. 죽이다는 수사다. 여기서 죽이다는 형용사. 좋음을 입맛 좋게 강조한 표현이다. 동사였다면, 목적어가 있어야 한다. 그 경우에 날은 날씨가 아니라 날카로운 물체의 단면을 뜻하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날은 의식이 없다. 주체적으로 누군가를 해할 수 없다. 의식 있는 누군가가 날을 이용해 누군가를 죽여야 말이 된다. 너사와는 내가 쓸데없이 논리 타령한다고 한다. 논리 타령 그만두라고 요청한다. 멈춰! 논리 멈춰! 감성으로 답답한 마음을 보듬어줘. 나의 감성은 문학소년의 감성. 실리카겔을 즐길 수 있는 세련됨. 내가 세련되고 풍부한 감성으로 모두를 보듬으리. 보듬보듬. 



날이 너무 좋아도 문제다. 날은 좋은데 딱히 할 일이 없다. 얼마 되지 않는 이렇게 좋은 날을 낭비한다. 한해 중 가장 좋은 시기다. 최상급 한정판 날씨. 꽃가루와 나무 포자가 흩날려 알러지 반응을 유발하긴 하지만. 올해는 증상이 없다. 날씨도 좋고, 알러지도 없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 거야. 아니, 좋지 않아. 이런 날씨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는 내가 미워진다. 카페에서 노래 듣고 글 쓰고, 커피 마시는 것은 특별하지 않아. 매일의 루틴. 누군가에게 일주일 중 가장 기다린 하루가 돼서야 할 수 있는 활동. 복에 겨웠군. 특별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당위도 성가셔. 막상 무언갈하면 귀찮아. 모든 것은 밸런스. 삶을 충만하게 사는 이에게 허락된 달콤한 휴식. 삶을 적당히 호사스럽게 낭비하는 내겐 당연한 휴식.



문득 최근에 동조자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젊은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듯이, 사이공의 바와 나이트클럽들에서 주말마다 젊음을 낭비했습니다. 만일 낭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젊음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장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나를 독서로 이끈다. 하이라이트를 칠한다. 문장을 음미한다. 어떤 문장은 스트레이트 위스키보다 진하다. 위스키 한 모금 입에 넣고 혀 주위로 돌리듯, 문장의 단어와 운율을 곱씹는다. 동조자는 기가 막히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잘 쓴다. 헤밍웨이는 강한 표현을 쓰라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강함은 아주 익숙하고 흔한 단어. 모두에게 바로 와닿을 수 있는 단어다. '잘 쓴다'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직관적이다. 응우옌은 베트남의 성씨다. 우리나라로 하면 김이박을 섞은 정도의 대중성. 베트남 사람 둘 만나면 하나는 응우옌이 아닐까. 발음은 저마다 다르다. 응우옌, 오왼, 위안, 위엔 등. 응우옌이 가장 쿨하지 않은 발음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낙후된 동남아를 떠올리게 만드는 발음이다. 반면 오왼은 서구화된, 뭔가 세련된, 뉴진스 하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던 베트남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를 응우옌으로 부를 것이다. 그가 내 편견을 깨줬기 때문.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산다. 편견이 말한다. 개도국엔 철학가가 없고, 깊이 있는 생각을 못 할 거야. 일차원적으로 생각할 거야. 이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병폐. 인간은 비슷비슷하다. 동조자의 겹겹이 쌓인 레이어를 보고 이마를 탁 쳤다. 보기 드문 명작이다. 아쉽게도 저자는 미국에서 자란, 미국 교육 시스템의 첨단에 있는 대학교수. 그러나 피해자의 편에서, 아니 피해자는 엄밀하지 않아. 비교적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약소국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인들이 전쟁을 떠올릴 때면, '저쪽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전쟁 이야기를 이민자 이야기에서 분리하려는 경향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 미국의 이민자와 난민들이 갖가지 전쟁- 그중 많은 전쟁에 이 나라가 관여해왔다-을 피해 도망쳤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베트남에서 미국인들이 한 역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싶었고 베트남계 미국인들의 통상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기를 원했는데, 그들의 통상적인 태도는 미국인들의 구조를 받은 것에 고마워하거나 혹은 문학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절충하는 것이었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문체와 구조, 인물을 구축했다. 구조적으로 일관되고, 분명한 톤을 갖고, 적절히 행간을 이용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 그의 문학 작법의 출처는 미국 교육 시스템. 미국의 무기를 받아 칼끝을 미국으로 들이민다. 본인의 모든 삶의 터전으로 말이다. 나라는 존재를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배경을. 이 반동분자에게 기꺼이 교수 자리를, 올해의 책 자리를 내주는 것이 미국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의 수호자를 표방하는 국가의 대인배스러움, 혹은 니들이 뭘 어쩔 건데? 라 되묻는 듯한 오만함을 엿본다.



지옥의 묵시록이란 영화는 월남전을 다룬다. 고증에 신경 썼다. 동조자의 플롯 중 하나다. 주인공이 영화의 자문 역할을 한다. 소설 속에서 감독은 영화의 예술성이 길이길이 남아 전 세계 사람들이 베트남전의 참상을 기억할 거라 말한다. 작가의 입을 빌린 주인공은 속으로 반박한다. '예술이 전쟁보다 오래 살아남고, 예술의 산물들은 자연의 규칙적인 변화가 수백만 용사들의 육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한참 후에도 여전히 훌륭하게 건재합니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상상을 하며, 이제 자신의 예술 작품이 그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3백만 아니 4백만 아니 6백만의 죽은 자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말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국 지식인의 반성적 제스처마저도 오만일 수 있다는 지점을 지적한다. 



나는 가끔 승자의 여유가 고깝게 느껴진다. 특히 느낀 것은 군시절이다. 고참들의 여유로움이 멋지기도 하고, 재수없기도 했다. 잘난 거 없이 시간이 만들어준 권력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여서. 외부에서 온 힘을 자신의 힘으로 만든 것인 양 휘두를 때. 물론 버틴 것 자체가, 그러니까 그 인내 자체가 존중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군대란 환경 외에 인내 능력 개발에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 환경의 위력에 경각심 없이 적응해버리는 이들이 거슬렸다. 결과적으로 나도 거슬리는 선임 중 하나였겠으나. 



의식은 한 가지 주제를 찾으면 몰린다. 의식의 캐파가 크지 않다. 쓸 수 있는 인프라가 많지 않다. 생각을 요하는 주제가 등장하면 전력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내 능력 하찮다. 주제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의식은 한 문장을 통해 책에 머문다. 



쓸 머리 다 써서 다시 통제를 벗어난다. 울타리가 열리고 다시 들판으로 나선다. 무법지. 나는야 들판의 무법자. 황야라고 하기엔 정서적으로 너무나 안정됐다. 경제적 위험도, 건강의 위협도, 어떤 거슬림도 없다. 풀이 사방으로 가득한 들판. 배고프면 아무 곳에서나 풀을 뜯어 먹어야지. 



GPT는 뭐하고 있어? 매달 30불씩 받아 먹으면서 말이야. 돈 값 하란 말이야!!!!!!!!!!!!!!!!!!



-Hey GPT,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풍으로 써줘-



무엇을 쓸까, 흐르는 의식이 말한다, 아니, 으스대며 나에게 속삭인다, 내가 지탱한 이 몸에 쏟아지는 빛 속에서. 어쩌면 그것은 빛도 아니고, 아니, 빛이라기보다 공기의 파동—지나가는 바람처럼 한없이 산란한 중얼거림의 거품. 그래, 오늘은 의식이 흐르는 대로, 손가락마저 그 의식에 맡겨버리자. 너와 내가 아닌, 오직 ‘그’ 의식에게.



의식이 입을 뗀다. 주르륵, 아니 찰칵찰칵. 말—말들, 그리고 또 말들—그게 다 적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무거나 적는다면, 그것은 프로이트의 실험실에서 날아든 파리 한 마리일 뿐. 쏟아져 나오는 무의식의 사발을 연 다음, 세상에 찌끄러진 영화 속 누벨바그의 하얀 커튼처럼. 그런데 이 한낮의 나른한 시간에, 이성으로 감싼 내가 쏟아낸 무언가가 과연 무의식일 수 있을까? 낮에는 이성이 부글거리는 냄비에 돋아나는 버섯처럼 번져나가고, 고작 한잔의 맥주조차 없이 둥둥 떠다니는 이 생각의 부력, 중심 없는 구름배처럼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음, 둥둥 배? 아니, 더 통통한 것이 좋겠군. 통통배.



이 통통배는 내가 앉은 카페 창가에 부딪힌다. 검정치마의 Antifreeze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아이스 롱블랙을 홀짝이며 멍하니 사람 구경을 하는 나. 오, 이거다, 오늘은. 자, 글을 적어보자.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른다. 모름으로써, 아는 것이다.



오늘은, 아! 공휴일. 멜번컵의 날이로군. 말들, 빅토리아주의 들판을 진흙처럼 밟으며 달리는 그 거대한 사지들, 휘감긴 발굽의 충돌음이 전해온다. 이 나라가 휴일까지 내어주며 갈기갈기 달리라 명하는구나, 찰싹! 찰싹! 말의 둔부가 하늘로 치솟고, 땅이 우르르 흔들리며, 경마장에서 인간 군상들이 모여드는 진풍경. 화려한 드레스와 모자들, 인간이 누리는 호사스러움의 절정이, 그 각양각색의 우아함이, 흙먼지와 함께 휘말려 드는 장관. 나는 그곳에 있었노라. 친구 파트너의 회사가 준 초대권, 그것이 유일한 입장권이었다.



사람들이 스쳐간다. 그들의 눈동자가 내게로 오고, 나는 그들을 본다. 각기 다른 색채와 선율의 패션, 신체, 표정, 헤어스타일. 아, 나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히려 무대에서 내려와 그들을 보는 박물관의 관람객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관찰자는 나야. 바라보는 주체는 내가 되는 거야. 그들은 나를 모른다, 나는 그들을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일까? 이 기묘한 자유, 오직 내게만 주어진 관찰자의 특권!



의식의 흐름 속에서도 글은 쓰고 싶다. 통찰을 뽐내고 싶다. 유려하고, 불현듯 그 짧은 한 문장으로 강타하는 문장을 쓰고 싶다. 공감각의 세계로 가닿아, 글쓰기란 미디엄의 매력을 무한히 펼쳐내고 싶다. 글로 쓰는 변화구, 직구, 커브, 그리고 어딘지 통제되지 않는, 똥볼이라 불릴지도 모를, 그야말로 불완전한 제어. 아, 이것이야말로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감각의 조화로군! 후후후, 그리고 웃음이… 그렇다, 보약이다.



날이 찌르르할 정도로 좋다. 날은 칼날처럼 밝고 빛나며 내 눈에 꽂혀들어 온다. 날은 이제 주어다, 그리고 ‘죽이다’는… 음, 감각적 수사학이다. 죽이다는, 이때 형용사다. 좋다, 좋다는 말로도 부족한 좋은 날이다. 동사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날은 칼의 날, 날카로움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베어냈겠지. 아니지, 아니야, 그건 너무 폭력적이잖아!



날이, 아, 이 날이, 눈부시게 찌르는 듯한 이 날이 참 좋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날씨가 좋을 때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가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쉽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특별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며칠 안 되는 이런 최고의 날씨, 대체 뭘 해야만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기분이 될까? ‘가장 좋은 날’에 어울리는 무언가를, 아! 무언가 ‘영원히 기억될 일’을 해야 하는 압박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매일 가던 카페에 앉아, 음악 듣고 커피 마시는 일상이 오늘을 특별하게 해줄까? 아니다, 나는 복에 겨운 듯한 이 기분이 조금은… 가슴 한켠을 휘감는다. 아! 복에 겨운 하루, 복에 겨운 내 모습.



나는 ‘특별함’을 스스로 부여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아주 사치스럽다고 느낀다. 내 일상은 반복적이고, 나의 루틴은 고요히 물살을 타고 흘러가며 아무 일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멜버른의 한가한 공휴일, 나는 실로 한가하고 지루하게 행복하다. 세상이 말하는 특별함을 쫓기에는, 나는 이미 그 특별함의 껍질에 갇혀 사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평화, 이 고요함—그렇지, 이건 마치 우주 한가운데서의 적막과도 같은 감정이다. 특별하지 않은, 어쩌면 아주 평범한 하루.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일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무의미한 특별함'을 붙잡고 있다.



그러던 중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최근에 읽은 **‘동조자’**에서 나온 문장, 마치 오래된 지하실에서 꺼내 든 위스키처럼 강렬하게 남은 그 문장. ‘우리는 젊은이라면 꼭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듯이, 사이공의 바와 나이트클럽들에서 주말마다 젊음을 낭비했습니다. 만일 낭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젊음일 수 있겠습니까?’ 아, 이 문장. 이 한 구절이야말로 내가 매 순간 잃어가는 그 소중한, 말로 다할 수 없는 _무언가_의 파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을 집어 들 때마다, 문장을 음미할 때마다, 그 문장이 내 혀끝에서 굴러가며 나를 사로잡는다. 한 모금의 스트레이트 위스키를 입안 가득 머금고 천천히 돌리듯이, 문장들이 입술과 혀, 그리고 내 마음을 넘나든다. 생각의 연료로, 한 순간의 불길로, 말라붙은 의식 속을 적셔주는 묘한 액체처럼.



‘동조자’의 저자 비엣 타인 응우옌은 정말 대단하다. 그가 이 한 나라, 이 한 시기의 이야기를, 아니 그 모든 편견과 상처를 어떻게 이렇게 강렬하고도 섬세하게 풀어냈을까? 그는 미국의 틀에서 배운 문학적 무기를 그 틀 안에서 겨누는 용기를 지녔다. 그는 칼을 쥔 자의 등을 향해 날을 세운다. 이 무기—글이라는 무기를 통해, 그는 가슴 깊은 곳에 닿는 진실을 말하고, 미국이란 이름의 대륙을 향해 기꺼이 도발을 감행한다.



나는 가끔 승자에게서, 아니 그 여유에서 오히려 반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오만한 여유와, 고요한 듯한 그 자만심. 어쩌면 ‘승자’라는 이름표가 달린 이들, 군대 시절 내 위에 있던 선임들, 혹은 사회 속에서 ‘더 높이 올라선’ 이들이 뽐내는 그 권력의 기만적 매무새. 시간이라는 것이 주는 그 황금의 빛 아래, 오로지 지위가 높아졌다는 이유 하나로 당연히 받는 권력. 그 ‘권력’의 정당성을 고요히, 그러나 날카롭게 비틀어본다. 어쩌면 그들의 강함이란, 그저 ‘있었음’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 그저 시간이 쌓였을 뿐인데. 그들은 그 시간이 만들어낸 지위에 자신을 안주시켜 두고, 마치 자신만의 힘이라도 되는 듯 휘두르곤 했다. 견뎌낸 것, 그 ‘견딤’의 무게가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의문을 품는다. 그들이 정말로 강한 걸까?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낸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가? 견딘다,라는 말이 가진 그 의미 속에는 어쩌면 묵묵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무심한 적응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응의 연속, 결코 새로운 시도나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타성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그 완강한 안주.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어딘가에 정착해, ‘견딘다’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될까? 나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또다시 그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나라는 사람, 내 의식, 내 기억과 감정은 한때 몰아치는 폭풍처럼 강렬했지만, 이젠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 폭풍의 흔적을 닮아가며 그 잔잔한 호수로 변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고요해진 내 삶 속에서 나는 때때로 그 폭풍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폭풍은, 그 몰아치는 격정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어느 순간 ‘모험’을 자처하던 날카로운 에너지가 사라진 채, 그 자리에 고요한 안식만이 남은 나 자신을 본다. 그렇다, 나는 더 이상 그 위험 속에서 떨리던 어린 날의 나와 같지 않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며, 이 고요함을 ‘성장’이라 칭하며 자신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멜버른의 이 화창한 날에, 내가 오늘을 특별하게 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어루만진다. 정말로 특별함을 갈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특별함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꾸짖는 것일까?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는 일상,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 고요한 일상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처가 아닐까 하고.



자, 이제 나는 이 들판, 이 드넓은 세계 속의 무법자로 돌아가고자 한다. 통제 없는, 가벼운 자유 속에서, 이 자유를 즐기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한다. 내게 남겨진 들판은, 황야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온화하고 평화롭다. 경제적 위험, 건강의 위협,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슬림 없이 나를 둘러싼 이 푸른 들판 속에서, 나는 가끔씩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에 빠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한가로운 날들 속에서 평온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에 만족하고 싶다.



이 들판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보다, 그저 이 평화 속에서 떠도는 나를 바라본다. 오늘의 이 무더운 태양,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그리고 가만히 내 손을 적시는 빛의 따스함.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묻는다. “정말로 더 많은 것을 원하느냐?” 하고. 그리고 나는 문득, 그저 미소를 짓는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안식이 되어준다면, 나는 더 이상 무엇을 바랄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잘 쓰면 어쩌란 말이야!!!!!! GPT, 나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할 거야!!


사실 비참하지 않아. 나는 무능하고,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 후후후. 웃음이 보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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