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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비니 3 병

by 띤떵훈




전날 저녁 주문한 술을 픽업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술을 받아왔다. 이제 배달에 나선다.



아침 러닝 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쾌락은 억지로 누르기보다, 숨 쉴 공간을 두고 유예하는 쪽이 관리가 용이하다고. 갈망하는 대상을 별볼일 없게 만들면, 마음이 덜 흔들린다. 오늘의 세일은 그 말을 점검하는 자리가 될 것 같았다. 일종의 테스트다. 규칙이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발비니 12년 3병과 19크라임스 1병을 주문했다.


발비니 12년은 정가 141불의 고가 위스키다. 우리 매장 옆 ‘댄 머피’가 한 병 99불로 큰 폭의 세일을 진행한다. 300불 이상 주문 시 40불 추가 할인도 있다. 3병으로는 기준에 약간 모자라서, 평소 즐겨 마시는 19크라임스 캐비넷 소비뇽을 더했다. 결국 발비니 한 병 단가는 80불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한국에서도 13만 원대인 제품이다. 세일은 구매의 좋은 명분이다.



이번 금요일은 내 생일이다. 손님이 온다. 부족하지 않게 술과 음식을 준비하려 한다. 귀한 걸음을 해준 이들에게 좋은 것을 내고 싶다. 발비니 2병 정도는 당일 소비가 가능하다. 한 병은 친구와 나눴다. 86불을 받았다. 2병을 다 갖고 싶다가, 위스키를 좋아하는 동료이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에게 선택권을 줬고, 그는 기꺼이 받았다. 남은 한 병은 내 몫이 됐다. 와인은 오피스에 비치해 홀짝홀짝 마실 계획이다. 마침 기존 와인 한 병을 끝낸 참이었다.



한 병은 동료가 가져갈 수 있게 가게 뒤편에 뒀다. 다른 한 병은 다른 친구가 일하는 가게로 배달 갈 예정이다. 식당인데, 저녁 시간에 맞춰 오면 식사를 대접하겠단다. 술 배달을 겸한 저녁.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녀오면 된다. 마침 친구가 우리 집에 두고 간 냄비도 있다. 짐 처리할 겸 챙겨 나왔다. 이런 소소한 왕복이 생활의 결을 만든다. 소비가 이동을 만들고, 이동이 관계를 정리한다.



술 배달을 하면서 생각했다. 세일을 한다고 해도 한 병에 86불이다. 집에서 홀짝이는 조니 워커 블랙 라벨은 66불이다. 그보다 20불을 더 줘야 한다. 위스키란 음료는 기본적으로 비싸다. 호사스러운 음료다. 어느 틈엔가 세일이라는 핑계거리가 있으면 언제든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겼다. 싸게 잘 샀다고 룰루랄라 걷다가 문득 멈췄다. 오늘의 결제는 못 해서 멈춘 게 아니라 안 해서 멈춘 건가. 그 경계선이 규칙으로 유지되는가. 아침에 들은 말이 다시 떠올랐다. 쾌락 유예는 고통이 아니라 설계라고.



나는 몇백만 원짜리 가방이나 신발을 원하지 않는다. 100만 원 넘는 21년산 위스키나 고급 와인도 마찬가지다. 그걸 구분할 입맛도, 배워 보고 싶은 마음도 지금은 없다. 나에게 맞는 범주를 정하면 마음이 편하다. 중간 가격대에서 고르는 편이 내 생활과 맞는다. 그 선이 생기면 과한 유혹은 자연히 멀어진다. 언젠가 취향이 바뀌면,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된다.



오전에 바닷가로 러닝을 가며 들었던 유튜브 교양 프로그램의 사회심리학자는 쾌락 유예를 말했다. 마시멜로 이야기로 요약되는 그 능력. 환경과 마음가짐, 대체물을 조정해 당장의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사람. 성공과 가까워진다고 했다. 과한 절제는 반발심을 키우고, 폭식 같은 반작용을 낳는다고도 했다. 숨 쉴 공간을 마련하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문장. 내가 갈망하는 대상을 별볼일 없게 만들면 도움이 된다고. 오늘의 세 병은 그 말을 생활로 옮기는 연습이었다. 살 수 있지만 굳이 쌓지 않는 쪽, 나눌 건 나누고 남길 건 남기는 쪽.



갈망을 별볼일 없게 만든다는 말은 과장처럼 들리지만, 경험으로는 이해가 쉽다. 초등학생 때 문방구 불량식품을 갈망했다. 하루 용돈 300원, 500원. 몇 개 사면 끝이었다. 한정된 재화는 욕망을 억압하고 더 날뛰게 만든다. 어른이 되어 소득이 생기면, 그 불량식품은 더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다. 욕망의 크기가 줄어든 게 아니라, 환경이 갈망을 묽게 만든다. 선택지가 넓어지면, 특정 항목의 매력이 줄어든다. 단순하다.



쇼핑도 그렇다. 한 달에 2벌 이하 구매 챌린지 중이다. 예전에는 로고가 잘 보이는 물건을 갈망했다. 노스페이스 패딩, 나이키 운동화, 아디다스 트랙탑. 하나만 사도 한 달 용돈의 과반이 날아갔다. 매점의 피자빵과 콜라를 참고, 온라인게임 캐시를 참고, 주변의 추천 한마디에 마음이 뒤집혔다. 지금은 다르다. 나이키 신발을 매일 한 켤레씩 사도 생활엔 무리가 없다. 그래서 나이키는 더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다. 로고는 감춘다. 천연 소재, 만듦새, 관리 가능성. 10년, 20년. 오래 입을 수 있을 것. 체형에 맞는 것. 이런 기준으로 바뀌었다. 쇼핑의 즐거움은 줄었지만, 후회도 줄었다. 갯수를 제한해 다른 방식의 만족을 만든다.



술도 같다. 원하면 매일 한 병씩 살 수 있다. 그러지 않는다. 건강, 저축, 지속 가능한 즐거움. 제약을 둬서 즐거움을 보존한다. 생일과 손님 대접이라는 명분이 있을 때만 잠깐 풀어준다. 제약은 벌이 아니라, 유지장치다. 세일은 유혹이지만, 동시에 점검표다. 오늘의 세 병이 그 역할을 한다.



이제 웬만한 상점에 가도 주눅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나를 건강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소비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게 된다. 원하는 게 많지 않으면, 일상 범위에서 못 할 일도 드물다. 도심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할 수 있고, 리바이스에서 청바지 하나 살 수도 있다. “언제고 사도 돼.” 이 한 문장이 숨 쉴 공간을 준다. 갈망은 진정되고, 선택은 간결해진다. 자제가 쉬워진다.



발비니 3병을 들여놓고 ‘아무도 없으면 내가 다 갖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집에 술이 너무 많으면, 마시지 않아도 될 때 억지로 마시게 되지 않을까. 저렴하게 샀다는 사실이 불필요한 소비의 명분이 되면, 결국 손해다. 그래서 친구 한 명에게 구매 의사를 물었다. 다른 친구에게도 나눔 기회를 줬다. 2병은 당장 소비처가 있어서 보유해도 좋았지만, 친구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아침 러닝에서 들었던 문장이 마지막까지 남는다. 갈망을 별볼일 없게 만든다. 오늘은 대체로 성공 쪽이다. 세일의 달콤함은 여전하지만, 장바구니는 조용하다. 장바구니에 담긴 발비니 3병이 시사한다. 살 수 있음과 사지 않음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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