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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빅토르 에리세) 리뷰

이동진 평론가의 2024년 최고의 영화.

by 우언타이

※ 스포일러 있음.

※ 아래 이미지들의 출처는 왓챠피디아.


어떤 예술에는 창작자의 경력과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작 4편의 영화만을 제작했지만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찬란하여 스페인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라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바로 그러하다. 무려 30년 만의 연출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솜씨가 조금도 녹슬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야말로 빛나는 작품.


이 영화 속에는 또 하나의 영화가 등장하는데, 이는 어떤 자의 부탁을 받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딸을 찾아와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한 남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 역의 배우가 어느 순간 실종되어, 영화 속 영화는 영화 속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다. 주인공이 과연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 배우는 대체 왜 사라진 것인지, 스크린을 보는 이들은 한동안 이를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앞서 언급한 영화를 제작하던 감독에 관한 작품이다. 자취를 감춰버린 배우를 찾아내려는 과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에 담긴 흔적들과 하나씩 마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관객은 이를 지켜보며, 빅토르 에리세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걸어온 인생길에 자리한 고민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가 얼마나 영화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자세한 서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결말에 대해 바로 말하자면, 기억을 잃어버린 배우는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마지막과 마주하고, 결국 주인공인 스스로가 주어진 일을 완수해 냈음을 목격한다. 그가 이를 통해 기억을 되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의 훌륭한 연출로부터 우리 모두는 그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다. 전율과 감동이 함께 극장에 임재하는, 벽에 가까운 최고의 명장면.



아마도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관람을 마쳤다면, 빅토르 에리세의 필모그래피에 해당하는 <벌집의 정령>, <남쪽>, <햇빛 속의 모과나무>에 관한 호기심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올해 초 <벌집의 정령>이 개봉했기에, 나머지 두 작품 또한 언젠가 극장에서 만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물론, 훗날 그의 새로운 다섯 번째 영화와 만나는 것 역시, 나는 몹시나 소망한다.


2025.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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