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리뷰] 씹/뜯/맛/즐 언론 이야기 (1)
지난 12월 3일 2021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우여곡절 끝에 치러졌다. 코로나 19가 엄중한 상황에서 고생한 수험생들과 학부모, 선생님들께 경의를 표한다. 최선을 다한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그리고 선량한 이들이 어떠한 불필요한 논쟁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바로 다음날 조선일보의 기사가 크게 논란이 됐다. 바로 한국사 20번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 "중학생도 안 틀릴 한국사 20번 논란…수능 문제인지 통일교육인지"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교육 분야에 해당되어야 할 것인 웬일인지 정치면으로 분류가 되어있다. 이 기사는 사실관계에 대한 오인으로 인해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게재된 이후 수차례 수정을 거친 상태. 최종본에서는 해당 한국사 문항이 난이도가 너무 낮았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페이스북을 통해 제기한 정치적 논란을 그대로 퍼날르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윤 의원은 이 문항을 올리면서 이런 "페친 여러분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날카롭거나 재치가 번뜩이거나 느긋하거나 식견이 스며나오거나...단상을 나눠주세요. 대환영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윤 의원 페이스북 답글에는 “정권 정책 홍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출제자의 정치적 의도가 전달되는 것으로 보인다” 등의 글이 달렸다." (출처: https://www.chosun.com/politics/2020/12/04/WHTWMLS6PBEEBEY7HNWVROOO3U/ )
그런데 이 기사는 요즘 언론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기사이다. (1) 유명인의 페북을 받아 쓴다. (2) 문제가 아닌 것도 일단 문제라고 단정한다. (3)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클릭을 유도한다. (4)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을 인터넷 댓글을 인용해서 구체화한다.... 요즘 잘 팔리는 기사가 대게 이런 것 같은데, 막상 나조차 어떤 이유에서든 이 기사가 논란이라 하여 눌러보게 되었으니 잘 팔리는 게 맞는 것 같다.
해당 한국사 문제의 지문은 1992년 1월 10일에 있었던 노태우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문을 발췌한 것이다. 수능 한국사 과목에서는 보통 한두 개씩 현대사 문제를 넣어왔고, 91년 남북 유엔동시가입과 92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기초적인 한국사 지식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을까? 과연 이 문제 출제에 대해 어떤 정치적 해석이 필요할까?
조선일보의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 수능 문제가 아닌 통일교육이며 정권 정책 홍보의 수단으로 수능 문제를 활용했다는 거 같은데... 일단 통일교육은 애초에 우리 공교육의 목표 같은 것 아니었나? 박정희 정부에서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의 마지막 문장 조차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로 되어 있는데. "수능 문제인지 통일교육인지"라고 넋두리하는 조선일보의 제목이 이해가지 않는다.
또 조선일보의 기사는 윤희숙 의원의 페북 포스팅에 달린 댓글을 대강 빌려와 "정권 정책 홍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이나, 이는 심각한 오독에 기반해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윤희숙 의원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봤는데 문제의 지문을 문재인 정부의 연설문으로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보인다. 1991년의 일을 언급하는 게 어떻게 현정권의 홍보일까. 물론 일반 시민들이야 혼동하고 댓글로도 달 수 있다 쳐도, 이게 어떻게 일등신문이라는 조선일보에 그대로 실릴 수 있을까. 넌센스이고 코미디이다.
그리고 윤희숙 의원의 포스팅과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서 재밌다고 느끼는 한 가지... 1992년의 민자당과 2020년의 국민의힘은 왜 달라졌을까? 21세기의 보수들은 '북한' '통일' 이런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있지만, 20세기의 보수는 통일에 관심이 많았고 적어도 특정 시기에는 북한과도 잘 지낼 생각이 잠시나마 있었다는 게 새삼 흥미롭다. 물론 결과적으로 북한이 핵개발 강행 등으로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것이 구조적인 원인이겠지만, 우리 국내 정치의 양당제가 국민들의 인식체계 또는 이슈를 보고 반응하는 취향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