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리뷰] 술병이 하고 싶은 말 (1)
처음처럼 25 / Chumchurum 25
25년 산이 아니고 알코올 함량 25%이다. "Since 1926"이라고 라벨에 표기되어 있어 25라는 숫자가 숙성 연도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잠시 혼동할 수도 있지만, 그럴 리 없다. 애초에 "처음처럼"이라는 희석식 소주 브랜드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때가 2006년, 그러니 25년 숙성은 어불성설이다. 750ml의 큰 사이즈로 마트 선반에서 덜컥 눈에 띄어 사 오게 됐다. 초록병이 위스키 병처럼 크니까 재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국의 희석식 소주이다. (특히 럼주 아님 주의)
그렇다면 라벨에 적힌 "since 1926"은 어디에서 온 걸까? 1926년은 현재 처음처럼을 만들고 있는 롯데주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강릉합동주조(주)가 설립된 시기이다. 강릉합동주조는 동해합동소주, 경월소주로 이름을 바꿔왔고 두산의 계열사를 거쳐 2009년 롯데주류에 인수되었다. 처음 강릉합동주조가 만들던 소주의 이름은 "경월"이고 두산 시절에는 "그린 소주"로 이름을 바꿔 히트를 쳤다가 "산 소주"를 거쳐 "처음처럼"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말하자면 그 사이에 주인도 바뀌었고 아마 공장과 설비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니 라벨에 붙은 "since 1926"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떤 오랜 전통을 이 병에 담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일 것이다. (단군신화처럼... 더 나가면 환빠 주의)
과연 이 술, 어떤 특징이 있을까? 성분표를 보면 잘 보이는 위치에 "증류식 소주(쌀, 보리: 국산 100%)"를 적어놓고 있으나, 여기에 속아서는 안된다. 결국 이것은 수지의 몸 위에 덜 눈에 띄게 쓰여있는 "주정, 기타과당"과 함께 들어가 있는 첨가물일 뿐이다. 증류주 소주가 얼마나 들어간 것인지 함량도 알 수 없고, 결국 희석식 소주의 일환이다. 희석식 소주의 주원료인 주정은 브랜드 무관 모든 희석식 소주에 공통으로 들어가니 특별하기 어렵다. 또한 앞서 출시된 하늘색병 진로소주가 쌀증류액을 표기하고 있으니 증류식 소주를 일부 넣었다 한들 큰 비중이 아닌 이상 희석식 소주로서 새롭다 하기도 뭣하다.
이쯤 되면 도대체 처음처럼 25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해보게 된다. 라벨을 한참 보다 생각났는데, 결국 "25"라는 숫자에 힌트가 있었다. 그렇다, 원래 소주는 25도였다! 최소한 20도 이상이었다! 대학시절만 해도 큰 슈퍼에 가면 25도짜리 진로소주를 살 수 있었고 (뚜껑을 병따개로 따야 했다) 한 병만 먹어도 얼굴이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미 저도수 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주류회사들은 도수 낮추기 경쟁을 하던 와중이었다. 그 결과가 요즘 시중에서 볼 수 있는 16%대의 소주들.
그런데 하나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 애초에 희석식 소주 간 도수 낮추기 경쟁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 2006년의 처음처럼 아니었던가? 처음처럼이 처음으로 소주의 최저선으로 여겨졌던 20도보다 낮은 19.8도 소주를 선보이면서 경쟁사인 진로가 참이슬 프레쉬(일명 파란딱지)를 경쟁적으로 냈었다. 군비경쟁하다 핵무기까지 나오듯 결국 시장에 16도 소주까지 나왔다. 그랬던 처음처럼이 이번에 "since 1926"을 내세워 처음처럼 25라는 알코올 함량 25%의 소주를 낸 것이다. 한국 주류사의 아이러니이다. 처음처럼 25와 함께 어떤 역설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맛은? 증류식 소주가 들어가 있어서인지 뒷 끝에 살짝 쌀 또는 보리 증류주의 향기가 감도는 듯하지만,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수도. (플라시보 효과 주의) 기본적으로 우리가 자주 먹는 소주의 조금 독한 버전이다. 그러니 한국 음식에는 다 잘 어울린다.
감상을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무엇이든 한국 술의 새로운 도전이라면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처음처럼 25도 그래서 반갑다. 대기업일수록 더 과감한 도전을 해서 한국 술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품의 방향성과 거기에 딸린 내러티브를 잘 쌓아나갈 필요는 있다. 아직 시장에서의 영향은 미약하지만 탁약주, 맥주, 증류주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젊은 양조인들이 이미 매우 탁월하게 잘하고 있는 영역이다. 대기업이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