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분이 왜 이런 누추한 곳에
난 시장을 좋아한다. 베를린에도 시장이 많은데 다들 개성이 강하다. 야외시장인 마이바크우퍼 막트(Maybachufer Markt)는 운하를 따라 열리는데, 터키 사람들이 파는 저렴하고 싱싱한 과일과 야채를 살 수 있다.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막트할레노인(Markthalle Neun)은 요즘 베를린에서 유행하는 음식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다. 중앙역과 가까운 모아빗에 있는 아르미니우스 막트할레 (Arminiusmarkthalle)도 나의 원픽이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많지 않은데 숨은 맛집들이 많다. 100년이 넘은 노천시장에 지붕을 씌운 거라 잘 보면 도로와 보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번 여행에서는 시장 구경을 반도 못했다. 여름이 되면 대부분의 상인들이 몇 주씩 휴가를 떠나기 때문이다. 내가 꼭 가고 싶던 피자집은 8월 내내 자리를 비운단다. 오후 3시에 막트할레노인에 갔더니 배고픈데 문 연 곳이 없다. 사천식 냉면을 파는 곳이 있길래 가봤더니 재료 소진이란다. 음료수라도 사자 싶어서 시장 안에 위치한 독일의 올리브영, DM에 들어갔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음료수가 차가웠다. 군것질할 거 몇 개랑 주섬 주섬 챙겼는데, 아니 글쎄 계산대에 앉아계시는 분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단정히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목 위로 보이는 이 분의 아우라는 아니 이런 귀한 분이 왜 이리 누추한 곳에라는 질문을 던졌다.
계산원의 예상치 못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었지만 남은 이성을 추슬렀다. 포인트까지 알뜰히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집 두 남자들이 이미 사라져 있었다. 텅텅 빈 시장을 한 바퀴 돌았더니 둘이 앉아서 뭘 먹고 있다. 독일의 맥 앤 치즈라고 할 수 있는 캐제슈패츨(Kaesespatzle)이다. 아니 여기 아직 먹을 게 있었어? 하고 나도 숟가락을 얹으려 했지만, 1인분도 안될 법한 손바닥만 한 접시를 가운데 놓고 둘이 나누어 먹고 있는 걸 차마 뺏을 수가 없었다. 입 짧은 우리 아들이 저렇게 먹는 걸 보니 배가 고프긴 했나 보다.
왜 더 시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이게 마지막 한 그릇 남은 거였단다. 뒤를 보니 역시 범상치 않게 생기신 남자가 가게를 정리 중이다. 손톱은 알록달록 매니큐어를 칠했고, 검정 나시티는 허리까지 옆이 뚫려있다. 그냥 이 복장 그대로 클럽을 가도 전혀 문제가 없을 듯한 외모다. 이 분이 거리에 나가면 방금 전까지 에어컨도 없는 1평 남짓한 가게에서 펄펄 끓는 물에 밀가루 반죽을 삶고 있었다고 누가 생각할까.
결국 주린 배를 잡고 시장을 나왔다. 그리곤 시장 앞에 만두 10개에 5유로라는 말도 안 되는 가성비로 베를린을 사로잡고 있는 중국집에 가서 배 터지게 밥을 먹었다. 역시 박리다매가 최고구나, 왜 요즘 베를린 인기 맛집은 다 중국집인가라는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크라이나에는 진짜 김태희가 밭을 매는가. 정우성은 맥도널드 알바를 얼마나 오래 했을까.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을 전설의 알바생들은 도대체 왜 남들 다 가는 휴가도 안 가고 햇빛 대신 형광등을 쐬면서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사진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rminius-Markthalle-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