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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청 Oct 24. 2021

오키나와 백수4

아무 생각없이 떠난 첫 여행

오늘도 변함없는 루틴. 조식 후 취침. 이제 호텔 직원들이 “쟤는 저런 녀석이야!”라고 슬슬 알고 있는 거 같아서 나올 때마다 가볍게 눈인사. 드디어 상호 간에 적응이 되었구나 싶어서 눈인사하고 돌아서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엄청 빡시게 걸을 예정이라 조식을 한 상 가득 챙겨 먹었다. 그리고 빵만 먹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아서 돈지루에 밥을 한 그릇 가득 퍼서 먹었다. 역시 밥심. ㅎㅎㅎㅎ. 연이틀 돈지루에 빵만 먹었더니 왠지 그냥 쌀밥이 땡긴거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역시나 돈지루는 빵과 밥을 가리지 않는 멀티 플레이어. 어디든 잘 어울린다.


밥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잠도 충분히 잤으니 호텔을 나서서 걷기 시작한다. 유이레일 현청역(겐초마에)과 국제거리 사이로 곧게 뻗은 큰 도로가 있는데 그리로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한참을 걷다 보면 4차선이 2차선으로 줄어드는 구간이 있고 여기부터가 번화가를 지나서 새로운 마을이 시작되는 느낌이라 주변을 유심히 보며 걷는다. 아마도 뚜벅이 여행이 아니었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마을 같아서 지금 생각해도 흥미로운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2차선의 도로의 보도를 타고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중앙선도 없어지고 차 두 대가 간신히 교행을 할 수 있는 동네 길이 시작된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골목 구경 시작.


2차선의 도로의 보도를 타고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중앙선도 없어지고 차 두 대가 간신히 교행을 할 수 있는 이런 길이 나오는데, 지금부터 본격적인 골목 구경 시작.


나하 지방 법무국 바로 앞에 적당한 크기의 중앙공원이 있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이 있다. 명소도 아니고 그저 작은 동네 공원일 뿐인데 왜 여기서 쉬게 됐는지, 그냥 느낌이 좋아서 잠시 앉아서 쉬었는데 두고두고 인연이 깊은 곳이 되어버렸다. 이 공원은 현청역보다 나하공항 방면으로 두 정거장 지난 곳인 쓰보가와역 근처였으니 꽤 긴거리를 걸은 셈이다. 걷기도 많이 걸었고, 점심시간도 되기도 해서 도시락을 살만한 곳을 찾았다. 마치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미세오 사가소!(가게를 찾자!)”라는 대사를 맘속으로 내뱉으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을 수밖에 없는 건가 싶은 순간 홋토못토를 발견했다. 그래 홋토못토는 일본의 한솥이니까 편의점보다 낫겠지 싶어서 제일 맘에 드는 도시락을 하나 사서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으로 향했다. 자판기에서 우롱차 하나를 뽑아서 목을 축이며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왠지 모를 인기척이 느껴져서 보니 치즈태비 한 마리가 도시락을 노려보고 있었다. 표정은 시크한데 자세는 어찌나 다소곳한지. ㅎㅎㅎㅎ. 도시락에 올려져 있던 연어 반 덩어리를 뚝 떼서 던져줬다. 도시락을 다 먹었는데도 계속 옆에 있길래 쓰담쓰담 해 줬더니 배도 뒤집어 까고 아주 애교가 보통이 아닌 녀석이었다. 그래서 소화도 시킬 겸 한참 공원에서 같이 놀아 주다가 일어나려는 찰나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비를 피하는 중에도 계속 옆에서 앉아 있어 줘서 고마우면서도 재밌었다. 물론 그 녀석도 별 뜻 없이 비를 피하는 중이었겠지만...


도시락을 다 먹었는데도 계속 옆에 있길래 쓰담쓰담 해 줬더니 배도 뒤집어 까고 아주 애교가 보통이 아닌 녀석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도 같이 피해주고, 의리있는 녀석.


비가 그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전에 걸어왔던 골목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4차선을 만나는 곳에서 나하 지방 법무국 앞 중앙공원 옆길로 내려갔다. 계속 걷다 보니 큰 도로가 나왔고 왠지 더 내려가면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잠시 멈추고 생각했다. 왔던 곳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갈까 아니면 큰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볼까 하는 고민. 왔던 길은 안전하지만 이미 구경을 했던 곳이고, 새로운 길은 불안하지만 재밌으니. 스마트폰을 구글어스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무슨 용기였는지, 새로운 길로 걸어 내려갔다. 큰 도로가 길게 이어진 보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30분을 넘게 쉬지 않고 걸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결국 다시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만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공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UCC커피를 마셨다. 이제 됐다 싶어서. 여기서 호텔로 돌아가는 건 아는 길이라 좀 더 여유 있게 쉬다가 일어섰다. 혹시 치즈태비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했는데, 결국 오지 않았다. ㅎㅎㅎㅎ.


큰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본 표지판. 우라소에냐 고하구라냐? 그냥 고하구라라는 어감에 끌려서 그리로 걸어간 것 같다. 덕분에 다시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을 만남. 


마음의 여유를 찾고 다시 걷기 시작하니 거리의 풍경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가 하나 보여서 저녁에 마실 맥주를 살 요량으로 들렀다. 편의점하고는 또 다르게 맥주 라인업이 다양했다. 아사히 종류만 해도 5가지 이상이었던 것 같아서 뭘 골라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사히와 기린은 각각 한국에 없는 종류를 샀고, 오리온은 2종류 그리고 저녁거리를 사서 묵직하게 들고 호텔로 향했다. 오래 걸었으니 욕조에 몸을 먼저 담그고 나와서 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며.








PS - 4년 후에 가족과 오키나와에 여행을 갔고 에어비앤비를 통해 빌린 숙소 근처에 밤에 산책을 나왔다가 공원에서 앉아서 잠시 쉬는데 낯이 익어서 보니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이었다. 왠지 2011년으로 감정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치즈태비도 생각났고. 거기서 또 6년이 흐른 지금 이 글을 쓰며 구글어스에 쓰보가와 히가시 공원에 별표를 찍었다. ‘오키나와 백수’ 이 시리즈를 15회까지 써볼 예정인데 구글어스에 별표가 계속 늘겠지?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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