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는 여자가 아닐까야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by 나무

암컷 침팬지는 새끼를 임신하기 전 평균 13마리의 수컷 침팬지와 300회 이상의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여성 인간인 나는 오직 한 남자와 7년에 걸친 연애를 하는 동안 100번도 채우지 못했는데 임신을 해버렸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하겠거니 했지만 너무 많은 과정을 건너뛰고 덜컥 임신이라니 어이없었다. 그때 생긴 내 아이는 지금 어느덧 11살이 되었고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27살의 직업을 가진 여성이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야 할 시점에 임신이 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그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결혼까지 서둘러 해치울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때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은 남자친구보다는 나에게 큰 변수로 작용했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남자친구가 살던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평소에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임신-결혼-출산을 겪으면서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내가 여자구나, 젠장’

임신 중 좋은 것을 먹고 태교에 전념해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 집안을 정돈하고 남편의 생활을 챙기는 것이 내가 여자여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며느리로서 남편 집안의 대소사를 최소한 기억하고 참석하는 것, 그에 맞춰 친정도 챙겨야 하는 것, 아이를 케어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 등 갑자기 나는 돌봐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는 기대되어지지 않는 그런 여러 일들이 내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과되었다.

출산 백일 후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냥 이대로 여자라는 정체성만 남고 나라는 존재의 알맹이가 사라져버릴까 무서웠던 것 같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는 시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셨고 엄마, 며느리, 직장인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전투를 치르는 사람처럼 치열하게 살았다. 특히 아이를 돌보는 문제에 있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쓰나미처럼 덮쳐 올 때 이를 해결하는 선봉에는 어쩌다보니 늘 남편이 아닌 나를 포함한 친정엄마와 시엄마라는 여자들이 있었다. 나는 부담스럽고, 두렵고, 억울하고, 무서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 자주 무너졌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내기를 요구받았다. 물론 이 요구를 한 사람 중에 나 자신도 포함된다. 경제활동과 가정에서의 돌봄생활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역할 갈등이 생길 때 ‘엄마라며 당연히 아이를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하고, 아내라면 당연히 남편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는 여성성의 신화에 가장 먼저 굴복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힘든 터널을 지날 때 남편은 룰루랄라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남편도 갑작스럽게 배우자와 아이가 생겨 여러 역할들이 요구되고 삶이 급변했지만 독립된 주체로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우선 남편은 두 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결혼 전 하던 분야의 일을 계속 이어갔다. 결혼 후 자녀가 생긴 것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남성 가장은 책임감 있고 일에 있어 더 열정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반면 나는 두 아이를 출산할 때마다 경력이 단절되었고 끝내 그 경력을 이어붙이지 못하고 아예 새로운 분야의 직업을 구해 신입사원으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이것은 당연히 연봉차이를 가져왔다. 우리는 같은 대학을 졸업했고 심지어 내가 먼저 직업을 가졌지만 현재 기준 남편은 나보다 연간 60%이상 더 번다.


여기까지 쓴 글을 남편이 읽는다면 그가 몹시도 억울하겠지? 우리가 싸울 때마다 남편이 치트키로 꺼내들었던 말,

“넌 항상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엄청 화를 냈다.

“내 마음대로라니!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가? 해야 하는데 당신이 항상 한 발 뒤에 빠져있으니까 내가 한 거잖아”

이제는 남편의 억울함을 인정한다. 정희진은 남성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시대나 지배적 남성성의 핵심 요소는 앞 시대의 남성성과 겹치거나 재구성, 재결합, 인용된 결과들이다. 다시 말해 남성성은 연속선의 개념이지,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남성 권력은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 누군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자음과 모음, 2011), 25쪽.

나는 남편이 한발 뒤에 빠져있었다고 느꼈지만 실은 내가 그보다 두 발 앞서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가정주부가 되면 주어지는 특권을 즐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고 백일도 되지 않아 일을 하러 나갔고, 어린 아이들을 맡기고 일을 하러 갈 수 없어 가정주부가 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아이가 낮잠 잘 때 취업을 위해 공부했다. 육아와 가정생활에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을 떠맡았다고 피해의식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실은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에게 주어지는 부담과 고통을 내가 온전히 느껴야 했던 것이었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종류의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한다. 갑작스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27살부터 39살인 지금까지 12년간 ‘여자’라는 정체성이 싫었지만 이걸 벗어버리면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분열의 시간을 거쳤다. 이제는 안다. 내가 생각한 그런 ‘여자’는 없고 그런 ‘여성성’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여자가 아닌 나의 40대가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