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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Jun 15. 2017

인간이 '밀폐' 속 '미지'의 공포와 만나면 <더 바>

<미스트>와 <부산행>의 무대를 작은 카페로 옮겼을 때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을 걷던 미모의 여성 엘레나(블랑카 수아레즈 분)는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해 '더 바'란 이름의 카페에 들어간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던 그는 갑작스레 폭발음을 듣고 막 카페 문을 나선 남자가 밖에서 쓰러져 죽어 있는 걸 발견한다. 이내 그를 구하러 나간 또 다른 남자까지 머리에 총을 맞아 죽고,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인파로 북적이던 광장은 어느새 텅 빈 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카페 주인 암파로(테렐레 파베즈 분)와 점원 사투르(세컨 드 라 로사 분), 엘레나와 나초(마리오 카사스 분)를 비롯한 손님들은 테러 공포에 휩싸이고, TV 뉴스도 나오지 않고 전화도 터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 궁리를 찾는다.


영화 <더 바>는 밀폐 공간 속에 갇힌 이들이 미지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린다.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전제를 통해 외부를 대하는 내부의 공포를 조명하고, 그다음에는 내부에 남은 이들 간의 갈등을 통해 서스펜스를 조장한다.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재난' 앞에 선 인물들이 답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과정은 그렇게 점점 이들의 치부와 이기심을 드러낸다. 자그마한 카페에 모인 인물들은 마트에 갇힌 채 문 밖 안갯속 미지의 존재와 맞서는 영화 <미스트> 속 그것과도 닮았고, 좀비에 맞서 열차 칸을 사수하려 한 <부산행>의 인간 군상과도 닮았다.

영화 초중반, 미지 앞에서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인물들의 면면은 퍽 우스꽝스럽다. "우리 중 누군가가 테러리스트일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라기보다 어떻게든 이유를 찾고자 만들어낸 구실로 여겨진다. 이 와중에 서로 가방을 뒤지거나 십수 년을 함께한 동료까지 의심하는 전개는 불안에 눈먼 인간을 공포를 겪는 당사자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한다. "현대사회의 테러리즘이 가져온 실존적 불확실성을 표현한 작품"(할리우드 리포터)이란 평은 <더 바>가 보여주는 공포의 실체를 한 마디로 정리하는 말이기도 하다.


카페 화장실에서 새로운 인물이 발견되면서 급물살을 타는 영화의 서사는 인간성의 추악한 면모를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테러에 이어 에볼라 바이러스까지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의심은 구체적 근거 없이 내내 정황과 추론으로 간단히 결론지어진다. 여덟 명 남짓한 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계급 구도가 형성되고,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약자 그룹을 카페 내에서 또다시 격리하는 강자 그룹의 폭력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이런 지독한 상황은 들어본 적도 없어.

극 중 엘레나의 이 대사는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후반부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방한 말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지하 하수로에서 벌이는 사투는 말 그대로 '똥통에 빠진' 인간 군상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협력과 경쟁을 수시로 오가는 이들이 8명에서 4명, 또다시 2명으로 쪼개지기를 반복하며 편을 가르고 또 배신한다. 생존이란 미명 하에 타인을 향한 개인의 불신이 상대방의 의심을 낳으며 무의미한 갈등이 반복되는 전개는 지리멸렬할 정도다. 이 와중에 "공포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원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란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결국 <더 바>는 '공포'라는 장치를 이용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거기에 선하고 정의로운 주인공 따위는 없고, 불완전한 인간을 향한 구원이나 권선징악의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살아남을지, 아니 애당초 누구라도 살아남기나 할지는 물론 중요한 관건이지만, 정작 영화가 방점을 찍는 지점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 자체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 모든 게 하룻밤 꿈이었다는 듯 다시 인파로 가득한 광장의 모습이 되레 섬뜩하게 각인되는 이유다. 2017년 6월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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